영&크리에이티브 K-POP 프로듀서, 주디 리

창작부터 제작까지. 자신만의 웨이브를 만들어가는 90년대생 K-팝 프로듀서 4명.

주디 리 1996년생.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란 유년 시절 경험을 토대로 걸 그룹 제작에 대한 꿈이 생겼다. 일본 에이벡스(AVEX), 하이브 산하 소스뮤직에서 XG와 르세라핌을 기획하며 노하우를 쌓았다. 2024년 10월 자신의 소속사 크로마(CHROMA)를 설립, 여자아이들을 위한 친구 같은 걸 그룹을 만들고자 한다.

한국,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배경에서 자랐다. 이런 환경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나라마다 인기 많은 팝 컬처, 가십거리를 잘 아는 게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했다. 항상 또래 여자아이들이 뭘 좋아하나 관심이 많았다. 여섯 살 때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영어를 할 줄 모르니까 댄스팀에 들어가 춤을 배우면서며 친구를 사귀었고, 음악의 도움을 항상 받았다. 어머니가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로 태교를 할 정도로 워낙 음악을 좋아하시기도 했다. 스스로 음원을 찾아 듣기 어렵던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는 곡을 CD로 구워주실 정도였다.

K-팝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같은 동네에 살던 교포 2세 친구가 유튜브로 동방신기 영상을 보여줬다. 2003년 즈음이었으니 유튜브 초창기인데, 한국말도 잘 못하는 친구가 K-팝 가수를 이토록 좋아한다는 데 놀랐다. 춤을 배우면서는 힙합과 R&B 베이스 음악을 하는 YG 아티스트에 자연스레 끌렸다. 도쿄에서 국제중학교를 다니던 중학생 시절에는 거의 K-팝 전도사 수준이었다.(웃음)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웃음)
미국 출신 친구가 내 아이팟 플레이리스트를 보고, ‘넌 정상적인 음악은 안 듣니?’라고 한 게 자극이 됐다. K-팝을 듣는 건 비정상이라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걸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 친구끼리 원더걸스의 ‘Nobody’ 영어 버전을 커버해 학교 축제 때 선보였다. 노래가 워낙 좋아서인지 K-팝을 모르던 백인 친구들도 1년 내내 ‘Nobody’를 부르면서 다녔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그 경험이 제작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나?
그럼에도 음악을 만드는 건 나와 거리가 먼 일이라 여겼다. LA로 돌아가서 경영과 영화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당시 한인타운에서 래퍼 붐이 일었는데, 아는 친구 작업실에 놀러 갔다가 마침 여자 톱 라이너가 못 오게 됐다면서 나보고 해보겠느냐고 묻더라. 결과물은 좋지 않았지만, 제작에 흥미와 자신감이 생겼다.

88라이징, 라이브 네이션, 애틀랜틱 레코드 같은 곳에서 수 개월씩 커리어를 쌓은 것도 그 때문인가?
LA는 할리우드의 본고장 아닌가. 대학생 인턴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내 걸로 도전할 일이 온다면, 있는 동안 몸으로 다 부딪치고 배워보자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걸 배웠다. 무엇보다 겁이 없어졌다. 그 시기 K-팝 영역이 확장되면서 “블랙핑크 멋있더라” 같은 말을 듣다 보니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구나,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내 걸’ 만들겠다는 확신을 어떻게 그렇게 확고하게 가질 수 있었나?
항상 친구 만들기에 급급했기에 음악을 통해 많이 치유받았다. 2NE1의 ‘Ugly’를 들으며 스쿨버스에서 엉엉 울기도 했고,  사실 얼마 전 재결합 콘서트를 보면서도 오열했다(웃음). 여자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항상 어떤 친구가 인기 있고 사랑받는지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데이터가 있다. 이걸 토대로 여자아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공감하고 좋아하는 걸 그룹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해진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도 내 좋은 친구였다. 팬 창작물의 표지 이미지를 만들려고 포토샵을 익히며 ‘미감’이라는 걸 처음 배웠을 정도다.(웃음) 덕분에 서브컬처나 팬 활동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다.

2020년, 일본 최대 엔터테인먼트 회사이자 레이블인 에이벡스(AVEX)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왜 일본이었나?
미국에서 나는 결국 비주류 아닌가. 아시안으로서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려면 아시안 마켓에서 내 무기를 좀 더 단단하게 갖춰야겠다 싶던 차에 에이벡스에서 걸 그룹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했다. 그게 XG였다.

당시 XG의 방향성은 어땠나? 곡과 실력, 스타일 등에서 파격적인 XG의 성공은 일본에서 하나(HANA), 코스모시(cosmosy) 같은 걸 그룹이 나오는 토대가 됐다.
내가 리딩할 수 있는 연차는 아니었지만, 아티스트들이 가진 실력과 집념, 야망이 정말 뛰어났다. 그걸 구현해주는 게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성장형 아이돌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기도 했다. 에이벡스에서 나중에 선보인 보이 그룹 ‘ONE OR EIGHT’도 마찬가지다.

르세라핌과는 어떻게 일하게 됐는지?
하이브에서 걸 그룹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아티스트 전략 기획 마케팅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4세대 K-팝 포문이 막 열리고 회사도, 산업의 에너지도 강렬하던 시기에 르세라핌의 브랜딩과 아이덴티티, 메시지와 전략에 참여하며 시장 전체를 좀 더 크게 보는 법을 배웠다. 가장 큰 업적을 꼽자면 카즈하를 데려온 것이다.(웃음)

하이브와 에이벡스, 한국과 일본 최대 규모 레이블에서 일하며 배운 것은?
결국 다 ‘사람 대 사람’이라는 것. 일하는 방식은 다르더라도, 유대감이 형성되고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결국엔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

크로마는 어떤 조직인가? 내가 생각하는 제작자로서의 나의 강점은?
대기업 안에서 자본력과 더 큰 영향력을 갖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걸 타협하지 않고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다행히 시장이 변모하며 이런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 캐스팅할 때도 여러 환경에서 아웃사이더로 지내며 내가 느낀 바를 반영하려 했고, 언어가 가능하다 보니 다국적 연습생과 밀접하게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아티스트와 가장 밀접하게 생활하는 매니지먼트다. 제작과 미학은 방향성만 공유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 생각하는데, 지속성을 위해서는 애정과 열정을 가진 매니지먼트 인력의 역할이 아티스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최근 자극이 되는 것은?
어릴 적 내가 위로를 받은 일본, 미국, 한국의 ‘소녀 감성’ 콘텐츠를 많이 찾아 보며, 그 시기 소녀들이 느낀 감성을 일깨우려고 한다. 디즈니 채널 <한나 몬타나>와 미소녀 마법 애니메이션, 한국 하이틴 감성 드라마, 야자와 아이 만화 같은 것.

지금 준비 중인 걸 그룹을 소개한다면?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걸 다 ‘때려 넣으려고’ 한다. 우리 사무실이 도깨비터라고 하더라. 예전에 여자친구와 BTS도 썼던 곳이라고.(웃음) 어떻게든 여기에서 버텨야겠다 싶어 물도 떠놓고 액막이 황태도 소중히 모셔뒀다.

    포토그래퍼
    유동근
    헤어
    박은빈
    메이크업
    장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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