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내게 천국을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을 향한 작은 마음.

엄마를 떠올릴 때면 내 마음은 형형색색 물드는 것 같다. ‘패션’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옷이 좋아진 건 아마 엄마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외출할 때마다 내게 어울리는 색과 형태를 찾아 정성스럽게 옷을 고르던 엄마의 모습이 참 고왔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어쩌다 보니 지금 나는 패션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보고 자란 그 아름다운 풍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 엄숙정의 아들 문승희(스타일리스트)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두 번의 계절이 지났다. 하늘이 높푸르던 가을에 보내드렸는데, 벌써 봄꽃이 지고 있다. 이쯤이면 조금은 담담해질 줄 알았건만, 여전히 아빠의 병실에 앉아 있는 나를 깨닫고 놀랄 때가 있다.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돌아온 의식을 놓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주 큰 소리로 아빠를 여러 번 부르다 엉엉 울던 며칠이었다. 지옥이 이런 모습일까 싶었는데, 지금은 지옥이더라도 살고 싶은 때가 있는 걸 보니 내가 알았던 것보다 아빠를 더 많이 사랑하나 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몰아 본 주말에는 아주 많이 울었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이 ‘미안해, 사랑해’뿐이었던 그 두려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 틀리면 빠꾸’라고 말하는 관식이가 “너는 아빠가 있는데 뭐를 고민해~” 하던 아빠 같았고, 아빠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금명이가 부러워 자꾸 눈물이 났다. 아빠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아빠, 나는 여전해. 여전히 아빠가 그리워.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가끔 쓰는 일기를 볼 수 있을까? 좀 봐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아빠를 떠올릴 때의 슬픔은 아빠를 사랑하는 만큼이라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어쩌겠어. 사는 동안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막막한걸. 그런데 아빠, 이렇게 슬픈 와중에도 나를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 것도 아빠더라. 아빠와의 따뜻한 기억, 목소리, 아빠와 찍은 사진이 그래. 아빠가 내게 만들어준 세상이 즐겁고 다정해서 자꾸만 치유가 돼. 고마워 아빠.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맴도는 말은 ‘보고 싶다’뿐이네. 나의 최고의 아빠, 다시 만날 때 꼭 웃으면서 만나자. 오늘도 여전히 사랑해.” – 황성환의 딸 황선미(에디터)
온 세상 엄마와 딸은 다 그런 걸까? <폭싹 속았수다>를 보는 매 화 금명이의 내레이션이 가슴을 후벼 팠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엄마가 우주 같은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어릴 때는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디서 주워들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에 반박하기도 했다. “나는 올리사랑할 거야”라고 말도 안 되는 단어를 쓰면서. 하지만 크면서 알았다. 그건 불가능하다.
엄마의 사랑을 따라잡는 일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일만큼 버거웠다. 때로는 혁오의 ‘TOMBOY’ 속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에 어색해”라는 노래 가사처럼 엄마에게 맹목적으로 받는 사랑이 불편하게도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연달아 야근한 날이면 눈 비비며 일어나 기어코 나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출근할 때면 나보다 힘도 약하면서 두 팔 걷고 따라 나섰다. 그러지 좀 말라고, 알아서 한다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매번 괜한 소리를 냈다.
얼마 전,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친한 언니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금명이랑 다름없는, 엄마의 사랑이 때로 부담스럽기도 하다는 내 말을 듣던 언니가 말했다. “나도 여전히 갈 길이 먼데,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어. 내가 자식한테 해주는 건 뭘 바라고 하는 게 아니더라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풋내기 시절 내가 ‘올리사랑’이라며 감히 도전한 ‘치사랑’은 평생 할 수 없는 거였다. 그래도 이젠 좋아서 하는 엄마의 그 마음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뒤늦게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최주리의 딸 김지수(에디터)
밤낮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키워냈다.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의 무릎은 걷는 게 무서울 정도로 닳았다. 중국 장가계도 가고, 미국 그랜드캐니언도 다녀온 그 씩씩한 무릎이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섭다고 할 때,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도 우리가 상처받을까 티 한 번 못 내고 손수 아들의 제사상을 차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을지 영영 알 길이 없다.
그 속으로 할머니는 또 우리 걱정이 먼저다. 우리 걱정 좀 그만하라 해도 우리가 아플 때면 그 아픔이 자신이 오래 산 탓이라며 또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한다. 언젠가 홀로 계신 집에 불쑥 찾아갔을 때 화투점을 보다 “어쩐지 화투패가 잘 떨어져 오늘 좋은 일이 있나 했다!” 하며 함박웃음으로 반기던 할머니 얼굴을 잊지 못한다. 나는 이런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컸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으려 한다. 할머니,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건강하고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줘요. 사랑합니다. – 이운월의 손녀 김지혜(웹 디자이너)
사춘기를 지나며 아빠와 멀어지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 아닐까? 세상 온갖 예쁘고 좋은 건 다 갖고 싶은 그 시기, 엄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력자가 되었지만, 아빠와는 매일 한 뼘씩 어색해졌다. 성별도, 관심사도 달라 대화가 안 통한다 느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는 아빠와 마주칠 일이 점점 줄어든 것도 그쯤이다. 예민한 수험생 시절에는 되레 짜증만 늘어갔다. “딸~” 모두가 잠든 새벽, 아빠가 술에 취해 방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성인이 되고 보니 이미 벌어진 아빠와 나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괜히 놀리거나 괴롭혀보기도 하고, 쓸데없는 걸 물어보기도 했지만 갱년기가 찾아온 아빠는 왠지 까칠했다.
상황 역전이다. 고민이 깊던 어느 주말, 비우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창고 서랍에 잔뜩 들어 있는 캠코더용 6mm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이거 빨리 파일로 변환해!” 미루고 미루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달려들었다. 20년 가까이 쓰지 않은 캠코더를 꺼내고 창고 여기저기를 뒤져 어렵사리 찾은 케이블로 캠코더와 TV를 연결했다.
“오늘은 재윤이를 위해 캠코더를 새로 산 날이에요.” 테이프를 넣자마자 흘러나오는 아빠의 목소리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태어난 날부터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빠는 내 8년의 시간을 캠코더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아빠의 행복한 미소는 어쩌면 변함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사할 때면 어김없이 귀중품과 함께 자동차 트렁크로 향하던 캠코더는 아빠의 보물이었다. 아빠의 세상은 온통 나였다. – 이정환의 딸 이재윤(에디터)
게임 때문에 지지고 볶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엄마가 벌써 환갑을 앞두고 있다. 지금도 엄마를 떠올리면 혈기왕성하게 싸우던 모습이 생생한데, 요즘 내 눈앞의 엄마는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안 돼” “그만해”라고 소리 지르던 엄마는 이제 “하고 싶으면 다 해봐”라는 말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 시절 내게 한 모진 말이 엄마에게도 치열한 전투였다는 사실을. 천둥벌거숭이 같던 나를 바른길로 이끌기 위한 엄마의 시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 조혜숙의 아들 김재한(개발자)
- 아트 디자이너
- 나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