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알지 못했던 서울의 낯선 얼굴이 펼쳐진다. 

‘푸른 밤’, 모시에 먹과 옅은 색, 91×116.8cm, 2023.

‘방화’, 마에 먹과 옅은 색, 100×80.3cm, 2022.

| 김보민 |

자연의 경치를 그린 동양화 산수화가. 김보민은 서울을 배경으로 사라진 시공간을 마음속으로 도시를 탐험하듯 과거와 현재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산수화에 매료된 이유가 있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서예가로 활동 중인 어머니 덕에 어린 시절부터 먹이 익숙했다. 화곡동, 가양동 등 강서 지역에서 나고 자랐는데 이 정서도 무시할 수 없는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산과 물을 보고 자라서인지 작품에도 자꾸 반영되더라. 정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가 된 것 같다. 겸재 정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역시 3년 동안 강서 지역에서 현감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때 강서를 그림 속에 많이 남겼다. 20대 초반에는 그 그림을 들고 다니면서 그림 속 풍경과 실제 풍경을 비교했다. 풍경을 상상해서 그리는 관념 산수화가 아닌 풍경 산수화를 그린 그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미학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작가라는 걸 초기작을 보면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림 속에 과거, 현재 모습이 모두 담겼다. 시공간을 아우르는 이유가 있나?
옛날 영화, 사진, 기록을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보다 보면 영화의 교차 편집처럼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얼마 전 심리 검사를 했는데 나란 사람 자체가 무척 회고적이라고 하더라. 시간을 곱씹고 되뇌는 게 개인적으로는 힘들 때도 있지만 작업에 반영되는 듯하다. 동아시아의 미학 역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딱 나누지 않는다. 시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이라 인식한다.

서울은 그 어느 곳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면에서 탐구할 게 무궁무진할 것 같다.
맞다. 얼마 전 8년 만에 뮌헨을 방문했는데 바뀐 게 하나도 없더라. 서울은 ‘풍경 기억 상실증’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정도로 너무 빨리 변하고 그걸 기억하기도 힘들다.

최근 선보인 작품 ‘River of Shadows’는 기존 작품과 맥락을 달리한다. 이유가 있었나?
어느 순간 먹이라는 오래된 재료를 사용하지만 이 도시를 제대로 보고 내 스타일로 새로운 양식을 입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야겠다는 고민을 몇 년 전부터 해왔고 비로소 이번 작품을 통해 반영됐다. 누군가는 근대 이후의 동양화라고 이야기해주었는데, 사진이나 영상 같은 과거 매체를 사용하기도 하고 시점 역시 변했다. 동양화의 경우 ‘조각법’이라는 방식으로 작가가 새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풍경을 그리는데,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나’의 시선에 집중했다. 전작에 시간, 풍경, 인물 등에 대한 내러티브가 많았다면 좀 더 즉각적으로 변했다고 느낀다.

스웨덴과 마케도니아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했다. 당시에는 어떤 풍경을 그렸나?
그곳의 풍경을 묘사했는데, 현지에서는 동양의 어떤 풍경 같다는 피드백을 받고 흥미롭다는 반응이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점이 무척 재미있었다.

작업 과정에서 취재의 영역도 클 것 같다.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방식은 다양하다. 역사와 민담 자료를 찾아볼 때도 있고, 택시를 타거나 미용실에서 동네 주민들이 수다 떠는 이야기 등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으기도 한다.

강서 외에 좋아하는 서울의 풍경은 어디인가?
북촌. 이곳을 주제로 작업한 그림이 있는데 자료를 모으며 조선시대와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서울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가 주는 감정 자체는 쓸쓸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면을 지닌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옛날 사진을 볼 때, 일제강점기에 힘들게 강을 건너는 그림, 도시를 건설해가는 이미지 등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게 거대한 꿈이 아닌 우리 각자의 소박한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나 시대의 꿈이 아닌 개인의 꿈이 모이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고 또 새롭게 받아들이는 곳은 서울밖에 없다. 개인의 작은 역사가 담겼고, 담기고 있다.

 

 

삼미전기 옆 골목에 전시한 3D 아티스트 채연 작가의 작품 ‘유영’.

을지로3가 평래옥 골목에 전시된 꿉기의 ‘태양의 제단, 2023’.

| 언노운오션 |

서울 도심에 건물만 한 꽃이 피어나고 요상한 괴물이 등장했다. AR을 활용해 서울 곳곳에 전시를 펼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이다. 

지난해 을지로 골목을 배경으로 AR 전시를 선보였다. 프로젝트의 시작이 궁금하다.
사파리를 돌며 처음 보는 동물을 구경하듯 을지로 골목 사이사이에 AR 작품을 설치해 낯선 감각을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Object Safari’라는 이름을 짓고 을지로 11개 골목에 11명의 3D 아티스트 작품을 전시했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골목 풍경에 새로운 감각과 시선을 부여하고 싶었다.

을지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골목마다 개성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전시를 기획하고 여러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골목과 계단, 통로 등이 모두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을지로가 유일했다. 인쇄소와 공장 등 건축 시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건물과 트렌드가 응집된 공간의 분위기 역시 독특했다. 새것과 옛것이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시 주제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현재 더 큰 규모로 다음 전시를 기획 중에 있다.

다음 동네는 어디인가?
여러 곳을 후보에 놓고 탐색 중이다. 스케일을 더 크게 잡으려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공간을 낯선 영감으로 채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언노운오션의 시작이 궁금하다. 시작은 개발자였다고?
다양한 콘텐츠에서 영감 받는 것을 즐긴다. 일상의 무대인 공간이 무료할 때면 권태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늘 새로운 영감을 주는 콘텐츠로 가득하기를 갈망했다. 실제 공간 위에 가상 콘텐츠를 배치할 수 있다면 한정된 공간에서 무한한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AR 기술의 가능성을 느꼈다. 개발자로서 그런 활동을 펼쳐보고 싶어 플랫폼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프로젝트의 범위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의 최적의 방법을 찾고 그 방식이 AR과 3D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여러 아티스트가 생각하는 바를 제약 없이 표현할 방법을 찾아서 세상 곳곳에 영감을 가득 채우고 싶다.

영감의 원천으로서 서울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깊은 역사와 함께 전위적이고 열정 가득한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도시다. 그 파동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 도시 자체가 가진 생명력, 생동감이 엄청나다.

 

 

| 바트 반 게누텐 |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크리에이터. 서울의 467개 동을 찾아가는 시리즈 ‘ Welcome to my DONG’을 촬영하며 각 동의 숨은 이야기와 역사를 촘촘하게 기록한다. 

국내 유일의 ‘동’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어느 날 아내와 동네를 산책하던 중 ‘홍등가’라고 불리는 곳을 발견했다. 몇 년을 산 동네였는데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당시 팬데믹으로 인해 일을 쉬면서 유튜브에 이런저런 콘텐츠를 올리던 시점이었는데 ‘이걸 콘텐츠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파헤쳐보니 내가 사는 동에는 알지 못했던 정보가 너무 많았다.

이 콘텐츠의 지속가능성을 보았나?
물론이다. 한국을 소개하는 많은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 정부 기관이 있지만 일부 장소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이런 곳은 트렌디하고 멋지게 소개되는 반면, 배경 이야기나 역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여행 크리에이터로서 조금 작은 단위에 집중하고 싶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467개의 동이 있는 줄 몰랐다. 시나 구가 아닌 동을 단위로 잡은 이유가 있었나?
‘구’는 다소 큰 단위라고 생각한다. 가령 아현동은 식민지 시대 어린이 묘지였던 비하인드가 있는 곳이다. 만약 구를 단위로 했다면 마포구의 거대함 속에 이 이야기는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을 거다. 동네에 숨겨진 소소한 이야기가 도시의 다양한 얼굴이 되고,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려면 보다 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시를 단위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기는 하다.

때로는 동과 동 사이에 큰 차이가 없어 힘들 것 같다. 가령 명동은 명동1동, 명동2동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나.
정말 너무 어려울 때도 있다. 정보가 많지 않아 난감할 때도 있지만, 가끔 정말 작은 동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마주할 때도 있어 아쉬움은 없다. 낙원동, 통의동이 좋은 예다. 악기 산업으로 유명한 동시에 ‘쪽방’이라는 별칭을 가진 독특한 주거 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영상을 보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자료 조사는 어떻게 진행하나?
일단 인터넷을 싹 다 뒤진다. 유튜브, 팟캐스트, 구글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50년 넘게 거주한 주민을 찾아가 질문하기도 한다. 이게 관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쪽에 늘 관심을 가지려고 하다 보니 우연히 들은 정보도 다 수집하고 기억하게 된다. 요즘은 여러 사람이 내게 제보해주는 경우도 많아져 좋다.

이 모든 과정을 혼자 다 하나?
그렇다. 취재부터 촬영, 편집, 게스트 섭외 등 모두 혼자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발로 뛰며 느끼는 서울의 매력은 무엇인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을 좇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한국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한국전쟁 이후 몇십 년의 민주화 과정부터 정부 제도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모든 역경을 극복하며 성장했다. 아마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고난과 역경을 빠른 속도로, 이 정도 성공을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본다. 동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보는 역사의 층은 더 촘촘하고 흥미롭다.

아이고바트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동 시리즈를 잘 끝내고 책으로 또 한번 기록을 남기고 싶다. 언젠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도 싶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