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에이징 시대가 저물고 프로에이징 시대가 도래했다. 패션계에서는 누가 누가 잘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현업에 종사하며 2년 전 100세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치른 아이리스 아펠을 꼽는 데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듯하다.

100세에도 열렬히

안티에이징, 영포티, 웰에이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나이 듦을 과시하고, 그 노하우를 나누는 프로에이징(Pro-aging)의 시대. 이는 평균수명이 길어지며 원하든 원치 않든 시니어 세대의 경제활동이 연장됐고, 그 안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제대로’ 나이 들어가는 표본이 생긴 덕이다. 배우 윤여정은 75세의 나이로 영화 <미나리>를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던 당시 수상 소감을 통해 “일하게 해준 두 아들에게 감사하다. 아들들아, 이게 바로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고 말해 뭉클함을 자아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줏대 있게 소신껏 자신을 지키며 쾌거를 이룬 윤여정의 모습은 멋졌다.

아이리스 아펠은 어떨까. 패션 키즈라면 누구나 패션위크에 대한 로망 내지는 환상이 있다. 런웨이를 당차게 걷는 모델을 올려다보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하우스 브랜드의 컬렉션을 가장 먼저 감상하는 로열티도 물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슈퍼모델 못지않은 포스로 프런트로를 장악한 패션 셀럽을 마주하는 것도 값진 경험이다. 꿈을 키우던 시기 선망하던 대상을 만났다면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프렌치 스타일에 심취해 있던 시절에 카린 로이펠트와 캐롤린 드 메그레, 바네사 파라디 등을 하염없이 좇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에 강렬한 활력을 준 것은 뉴욕 태생의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을 파리에서 만났을 때다. 그는 마치 무채색 도시를 원색으로 물들인 마법의 컬러와도 같았는데, 당시 찾아본 그와 관련된 기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세요. 나이와 숫자가 무섭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만의 행복을 찾고, 가능한 한 개성을 유지하고, 나와 다른 무리의 의견에 따르지 마세요.” 당시 그의 나이는 90대 중반이었다.

맥시멀리스트로 알려진 아이리스 아펠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특히 고전적인 직물을 재현하는 데 능해 백악관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더 독특한 직물과 가구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고, 그 과정에서 기발하고 특이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동그랗고 커다란 프레임의 안경, 컬러풀한 깃털이나 러플 장식의 오버사이즈 아우터, 볼드한 네크리스와 뱅글 레이어드 같은 그의 시그너처 스타일도 그중 하나다. 그는 모두가 데님 진에 화이트 티셔츠, 가죽 재킷을 입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르게 입을 용기’를 가지라고도 했다. 일찍이 컬러나 소재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환상적인 스타일이 뉴욕을 넘어 전 세계로 알려진 것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 <Rara Avis(Rare Bird): The Irreverent Iris Apfel>을 개최한 이후부터다. 또 2015년에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앨버트 메이슬스에 의해 아이리스 아펠과 그의 남편의 감각적인 삶이 다큐멘터리 <Iris>로 기록되며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는 2019년, IMG와의 모델 계약으로도 연결되는데, 평소 그의 스타성과 예술성을 높이 여긴 타미 힐피거의 권유였으며, 역시나 계약 이후 다양한 광고 캠페인과 브랜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틴에이저예요.” 그는 100세 생일 기념 안경 컬래버레이션 출시 파티에서 이 같은 말을 남겼다. 그간의 행적과 인터뷰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몸은 나이 들었을지언정 틴에이저와 같은 마음으로 열렬히 패션을 사랑하고, 옷 입기를 즐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리라. “인생을 즐기는 비결은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말 역시 배우 윤여정과 같은 듯 다른 프로에이징의 비법 포인트. 모르긴 해도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 어느 브랜드와의 협업을 위해 열심히 아이디어 회의를 할지도 모른다. 

 

슈퍼 모델도 프로에이징

최근 어떤 알고리즘 때문인지 SNS 피드에 시니어 모델 크루의 활동을 기록하는 계정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나름의 재미가 있어 지금까지도 짬이 나면 한 번씩 들어가 보고는 하는데, 주된 테마가 바로 프로에이징이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보고 상심하거나 검은 색으로 염색해 위장(?)하는 대신 윤기 나는 은발로 스타일링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에 어울리는 패션 스타일을 더해 메이크오버하는 식이다. 새로운 SNS 플랫폼이 나오면 사용 방법을 알려주며 시니어 세대가 사회와 단절되지 않도록 끈을 연결하기도 한다. 개인의 소소한 식이요법이나 마인드컨트롤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숏폼 영상을 찍으며 함께 웃을 일을 많이 만들기도 한다. 기쁘게 웃고 즐거움을 나누는 것만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도 없으므로. 이것은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모델이 되어 상품도 만들고 광고도 찍으면서 수익도 창출하고 있다. 모든 시니어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으나 누구나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영향은 줄 수 있으리라. 

글로벌 패션 신에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역사가 더 깊다.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나이가 가장 많고 오래 활동을 이어온 슈퍼 모델은 1931년생 카르멘 델로피체다. 1947년 16세의 나이로 모델에 데뷔해 쉬지 않고 활동을 이어오며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한 그는 은빛 머리에 자연스러운 주름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물을 많이 마시고 올바른 식습관을 위해 노력하며 필라테스도 꾸준히 한다는 그의 삶은 ‘얼루어’ 그 자체다. 노먼 파킨슨, 리처드 아베돈, 살바도르 달리 등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모델이 2023년에도 활동을 한다니. 하지만 지난해에는 91세 나이로 누드 화보를 촬영했고, 올 4월에는 <보그 체코>의 커버를 장식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이 노인을 존중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불평 대신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프로에이징이란 비단 겉모습뿐 아니라 이처럼 건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바른 태도가 8할 이상일 것이다.

미국에 카르멘 델로피체가 있다면, 영국에는 다프네 셀프가 있다. 매일 아침 발레 스트레칭과 요가를 하고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으며, 리프팅 대신 미소로 입꼬리 운동을 한다는 그는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당당히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녀들이 아직도 자신이 모델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웃긴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은퇴할 생각이 없다는 그다. 1950년대 결혼한 이후 모델 활동이 둔화됐지만, 90년대 들어와 런웨이로 복귀한 이후에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9년에는 오랜 시간 모델 활동을 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오랜 경력이 나이 든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준 것에 사명을 느낀다는 다프네 셀프. 2015년부터는 아카데미를 설립해 여성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전문성을 길러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즐거운 에너지가 가득한 린다 로댕은 전직 스타일리스트이자 모델이며 뷰티 사업가다. 건강한 은발에, 청바지를 즐겨 입고, 채소를 좋아하며 화려한 립스틱을 즐겨 바르는 그는 대표적으로 에너제틱한 뉴요커 스타일이다. 나이 든 자신을 더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꾸미기 위해 스스로를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신경 쓰게 되었다는 린다 로댕.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잘 어울리는 것만 취하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괜한 집착을 내려두고 명징한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지는 것 역시 프로에이징의 장점이 아닐는지. 나이 드는 것이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아니며 흥미롭게까지 느껴진다는 그는 “여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자유롭게 많은 기회와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그를 비롯해 많은 은발 모델들이 당당히 존재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