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프, 인친, 트친, 페친. 다양한 친구들 틈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어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두 분이 ‘찐친’인가 봐요.” 한 미팅 자리에서 이 말을 듣고 조금 움찔했다. 상대가 언급한 ‘두 분’은 나와 업계 지인이다. 그가 우리를 ‘찐친’으로 인정한 증거는 이렇다. 인스타그램에서 서로를 팔로우하고 있다는 점, 스토리 기능으로 종종 서로를 태그하며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오면 댓글을 자주 달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를 움찔하게 한 지점은 내가 그 지인과 얼굴 보고 밥을 먹은 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다. 동종 업계에서 일하며 서로의 활약을 응원하고 따로 또 같이 협력해온 상대에게 호감을 표했을 뿐 단 한 번도 그의 이름 옆에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다. 온라인에서는 활발히 소통할지라도 고작 얼굴 한 번 마주한 우리를 정말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친구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심리적으로 가깝고 일정 시간 이상 관계를 맺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 말이다. 그러나 최근 등장하는 단어를 보면 친구의 기준은 관계를 형성하는 플랫폼이 키를 쥐고 있는 듯하다. 관계를 맺는 리그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온 이후 친구의 종류는 촘촘하게 진화했다. 인친, 페친, 트친, 블친 등 오프라인의 모든 만남은 친구로 정의된다. 함께한 시간과 애정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뒤 친구라 퉁쳐온 관계와는 어쩐지 맺고 끊는 과정 역시 가뿐하다. 친구란 본래 두 사람이 함께 맺는 인연이지만, 때로는 관계의 주도권이 어느 한쪽에 치중된 듯한 느낌도 받는다. 

<트렌드 코리아 2023>의 저자 김난도 교수팀은 2023년 트렌드 중 하나로 ‘인덱스 관계’를 꼽았다. 현대인의 인간관계는 우연한 만남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전제다. 분명한 목적을 세운 뒤 관계를 형성하거나 접점이 없는 낯선 사람과 찰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한 뒤 흩어진다. 관계의 밀도보다 특수한 목적이 지인에서 친구로 진화하는 새로운 기준이 된 셈이다. 그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진행한 젠지 세대 연구를 바탕으로 관계 친밀도의 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표에서 흥미로운 점은 친밀도에 따른 연락 방법이다. 친할수록 연락의 빈도가 늘어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생중계되기도 한다. 줌과 같은 비대면 프로그램, SNS의 위치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일상을 공유한다. 관계의 스펙트럼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고 교류의 밀도까지 고려하는 일련의 과정은 전략적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든 구조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관계에는 함정이 있다. 힘든 하루를 보낸 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연애 고민을 나누고, 전남친의 욕을 함께하는 등 생산성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주제로 2시간씩 수다를 떨 수 없다. 함께하는 이유가 ‘좋아서’로 가능한 일이다. 서로 공유한 시간과 추억, 주고받은 에너지가 축적된 우정은 친구라는 존재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이다.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 우정을 쌓는 관계는 새로운 두 세계가 만나는 과정과 동일하다. 필터와 기술로 편집된 모습이 아닌 온전한 내 모습을 풀어놓는다. 흉측하고 망측하고 추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여지는 모습이다. 속내를 까뒤집어서라도 보여줄 수 있는 실존하는 우정은 일평생 몇 되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콘텐츠에 우정이 등장하는 것 역시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애초에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영국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 역시 친구의 한계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한 사람에게 적정한 인간관계의 수는 150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적정하다’의 기준은 안정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뜻한다. 제아무리 인싸라도 인맥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150명 정도라는 얘기다. ‘던바의 수’로 알려진 이 수는 말 그대로 최대일 뿐이며, 150명 중에서도 절친 사이로 진화할 수 있는 숫자는 15명 내외로 크게 줄어든다. 던바는 이 작은 숫자의 산출 근거로 시간과 에너지를 꼽았다. “누군가를 깊이 배려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의 친한 친구가 되려면 최소한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쉽게 얻어질 수 있는 우정은 세상에 없다는 연구 결과는 기묘한 위로로 해석된다. 

친구 과잉의 시대에서 우정과 관련한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O. Henry)의 말은 꽤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 어떤 우정도 우연이 아니다(No friendship is an accident)’ 친구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듬뿍 함유해 발생하는 사건이다. 흘러가는 대로, 상황이 이끄는 대로 이뤄지는 건 없다. 소통 창구는 진화하지만 내 세계에 친구를 들이는 일에는 전적으로 내가 담긴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우정을 쌓을지’가 이 시대의 진정한 친구를 좌우한다. 흥청망청 쏟아지던 친구라는 단어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마음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