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기술력과 예술적인 장인정신이 깃든 워치메이킹의 영역을 넘어 지속가능한 미래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워치 브랜드들. 재활용 스틸, 종이, 씨앗 등을 소재로 한 친환경 워치로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이글로시 디테일의 단방향 베젤을 장식하고 P.900 오토매틱 칼리버를 탑재해 3일간의 파워리저브를 지원하는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 e스틸™ 그리지오 로시아 44mm 워치는 1천4백만원대 파네라이(Panerai).

최근 시계 업계에 대두된 가장 큰 이슈는 ‘ESG’.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다. 시계에 문외한이던 시절, ‘도대체 왜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고 시계를 살까’ 생각했다.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 드레스 워치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히 깨졌다. 투명한 케이스백으로 무브먼트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직접 보고나서부터다. 관심은 오랜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장인의 예술적 가치, 더 나아가 환경보존과 공정 무역을 위한 매뉴팩처의 꾸준한 노력으로까지 이어졌다. 값어치는 거품이 아니었다. 단순히 팔기 위해 시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정립하고 후대에 기술과 정통성을 물려주려고 헌신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파텍필립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둔 것뿐입니다’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처럼. 이제 재산 가치를 갖는 시계 소비 행태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워치 생태계를 물려줄 수 있는 의식을 고취해보면 어떨까.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지속가능한 친환경 소재를 살펴본다.

PANERAI
리사이클 스틸로 무장하다

재활용 소재로 제품을 만드는 건 시계뿐 아니라 패션, 뷰티, 가구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먼저 시도할 수 있는 ‘ESG’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부품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한 치의 오차도 생기지 않는 정교함을 요하는 시계 제작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매뉴팩처에서 오랜 시간, 조금씩, 점차적으로 그 함유량을 늘려왔는데, 2021년 파네라이가 역사상 재활용 소재 비중이 가장 높게 기록된 ‘섭머저블 e랩-아이디™(eLAB-ID™) 워치’를 공개했다. 중량 기준 전체 소재의 98.6%에 달한다. 지름 44mm 케이스 전체와 베젤, 다이얼, 무브먼트의 메인 플레이트 및 브리지, 록 크라운 보호 장치, 케이스백까지 전부 경량 항공 우주 등급 재활용 에코 티타늄으로 구성했다.

이 같은 혁신적인 탄생에는 협력업체의 도움이 컸다. 에코 티타늄은 에라메트(Eramet), 브랜드를 상징하는 샌드위치 다이얼을 위해 도입한 레이저 커팅은 프로 카드랑(Pro Cadrans), 아워 마커와 핸즈에 코팅한 재활용 발광 도료 슈퍼 루미노바는 RC 트리텍(RC Tritec)과 모니코(Monyco), 전면 돔형 재활용 사파이어 크리스털은 노보 크리스털(Novo Cristal), 무브먼트의 주요 부품에 쓰인 첨단 재활용 실리콘은 실트로닉스 ST(Siltronix ST), 패브릭 질감의 재활용 플라스틱 스트랩은 모렐라토(Morellato)가 파트너사로 참여해 제조했다. 외주 부품 공급업체를 투명하게 공개한 것은 시계 업계에서 전례 없던 일. 그만큼 깨끗하고 상식적이며 무엇보다 상생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아쉽게도 섭머저블 e랩-아이디™는 30개만 한정 판매해 지금은 구매할 수 없다. 파네라이의 친환경 시계를 매장에서 직접 보고 싶다면 최근 출시한 새로운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 e스틸™️(eSteel™️) 워치를 추천한다. 총중량 137g의 52%에 해당하는 72g을 재활용 소재로 만들었는데, 섭머저블 e랩-아이디™ 워치와는 다르게 파네라이의 차세대 재활용 소재 e스틸™이 케이스 제작에 쓰였다. 부식에 강한 저자극성 소재로, 착용감이 편안하며 기존 파네라이 모델에 적용하던 오스테나이트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와 동일한 특성을 가진다. 대신 가격은 1천4백만원대로 비슷한 사양의 스틸 워치보다 훨씬 저렴하다. 다른 점을 굳이 더 찾자면? 같은 그린 컬러라도 e스틸™ 워치 다이얼과 베젤에서 좀 더 채도 높게 보인다는 정도. 이 모델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한 파네라이의 노력은 e스틸™ 소재를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기본 스트랩은 재활용 PET 소재로 만든 패브릭 스트랩, 여기에 재활용 러버 소재의 교체용 스트랩도 제공한다.

IWC
비건을 위한 배려

IWC 자체 제작 69355 칼리버를 탑재해 46시간 파워리저브 지원, 교체 가능한 팀버텍스 페이퍼블루 색상 20mm 스트랩을 매치한 포르투기저 크로노그래프 41mm 워치는 가격미정 IWC.

IWC 샤프하우젠이 가죽을 대체할 시계 스트랩 개발에 뛰어든 이유는 비건 스타일을 고수하는 고객의 고민을 포용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동안 책임감을 갖고 가죽 소재를 조달해왔고, 메탈과 러버, 텍스타일 스트랩도 보유하고 있지만, 브랜드는 가치소비를 위해 힘쓰는 워치 마니아를 위해 고품질 대안을 선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중 출시된 비건 레더는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154년간 이어진 훌륭한 기술력을 보유한 IWC가 아닌가. 브랜드의 모티프인 개척 정신을 바탕으로 소재 개발 연구진은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 결과 종이 스트랩, 팀버텍스(TimberTex)가 탄생했다. 만져보면 가죽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며 폭신하다. 석유 기반의 합성 가죽과 달리 80%를 천연 식물 섬유로 구성했다.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하는 스칸디나비아와 오스트리아 산림에서 수확해 비영리기구인 국제산림관리협의회(Forest Stewardship Council, FSC)의 인증을 얻은 목재에서 추출한 셀룰로오스다. 종이로 만든 팀버텍스 스트랩은 기존 가죽 스트랩의 절반 가격이다. 그럼에도 21만원대의 적지 않은 가격대로 책정된다. ‘종이로 만든 것에 비해 가격이 꽤 나가는데?’ 하지만 제작 비하인드를 보면 금액 책정이 단번에 납득된다. 스트랩을 구성하는 성분을 채취하는 것도 까다롭지만, 이후 60단계에 달하는 정교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공정 방법은 현대 제지 산업의 요람인 이탈리아 전통 기술에서 힌트를 얻었고, 모두 장인의 손기술로 구현된다. 100% 천연 염료로 염색한 식물 섬유 사이사이에 재활용 마이크로파이버를 채우고 압축하고, 다시 채우고 압축하는 과정을 거치면 시계를 차고 수영해도 마모되지 않을 내구성을 가지게 된다. 재활용 실로 한땀 한땀 꿴 마감까지 확실하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쳤기에 육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불규칙한 결. 이게 바로 장인의 수고와 땀, 브랜드의 심도 있는 의식 과정이 켜켜이 쌓여 탄생한 팀버텍스 스트랩만의 고유한 멋이다.

“종이로 만든, 가죽 대체 친환경 스트랩인 이유가 국내 고객의 구매에도 영향을 미치나요?”라는 에디터의 질문에 IWC 부티크 매니저는 “그렇다”라고 답했다. 실제 부티크에는 팀버텍스 출시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시곗줄만 구입하는 고객이 종종 있었다. 포르투기저 크로노그래프 워치, 포르투기저 오토매틱 40 워치, 포르토피노 오토매틱 워치,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 워치까지. 총 네 가지 모델에서 블루, 브라운, 블랙 컬러 스트랩 중 교체해 사용할 수 있기에 기존 IWC 워치를 갖고 있는 마니아의 구매율이 높다. 그리고 정교하게 제작하는 워치 스트랩이기에 보유 수량이 많지도 않다. 지속가능한 소비를 하기 위해선 기다림은 필수인가 보다. IWC는 사회적 및 지속가능성 유지의 일환으로 앞으로도 계속 환경친화적인 소재를 찾을 것이다.

OMEGA
씨앗에서 출발한 바이오세라믹 시계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벨크로 스트랩을 장식한 딥 블루 컬러 미션 투 넵튠(Neptune) 워치, 그린과 블루 컬러의 미션 투 어스(Earth) 워치, 6시 방향 토성 고리 서브 다이얼을 장식한 베이지 컬러 미션 투 새턴(Saturn) 바이오세라믹 문스와치 워치는 각 33만원대 오메가(Omega).

명동부터 파리까지, 지난해 전 세계적인 오픈런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이오세라믹 문스와치 워치를 기억하는가. 스와치와 오메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시계는 하이엔드 워치의 DNA를 합리적인 가격대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폭발적인 수요 탓에 한정판이 아님에도 브랜드는 구매 한정이라는 대비책까지 마련했다. 더불어 이 컬렉션이 진정으로 정점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근거는 식물성 플라스틱을 함유한 친환경 바이오세라믹 소재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스와치 그룹에서 연구 개발한 바이오세라믹은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오일로 만든 플라스틱과 세라믹을 1:2 비율로 결합했다. 피마자 씨앗에는 청산가리보다 6000배나 강한 독성 물질 리친이 들어 있어 염증 치료에 종종 쓰이는 식물이다. 위험 요소 때문에 필요하지 않을 때는 모두 폐기되는 독이 든 식물로, 시계를 만들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것. 하지만 스와치 그룹에서 이 소재를 개발한 이유는 좀 다르다. 지속가능한 식물성 친환경 소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오메가 그룹의 하이엔드 워치 고객이 수리를 위해 시계를 맡겼을 때 대신 착용할 임시 부품용으로 고안했다.
하지만 매트하면서도 실크처럼 촉감이 부드럽고 예상보다 튼튼한 결과물에 연구진은 지속가능한 시계의 주요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이로써 2021년 스와치 빅 볼드 바이오세라믹 워치로 처음 세상에 선보이고 문스와치 워치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주에서 영감 받은 문스와치 워치는 태양계 중심의 가장 큰 별부터 가장자리 아주 작은 행성의 이름을 딴 11개 컬렉션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시계에는 우주 행성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요소가 담겼으니 뜻을 기리며 즐겨보길. 명동과 부산 게릴라 팝업스토어 이후, 언제 어디서 다시 오메가 문스와치 워치가 풀릴지 모르나, 다음 번에는 웃돈을 얹어 리셀하기 위함이 아닌 지속가능한 식물 시계를 만나보는 착한 오픈런으로 기록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