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내가 고친다. 여자들이 공구박스를 열었다. 못 한 번 박아본 적 없어도 상관없다. 우린 해본 적이 없을 뿐 못할 일은 없으니까.

 

해가 바뀌며 나이를 먹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내가 사는 집도 함께 늙는다. 공간 역시 돌봄이 필요함을 독립 후에야 실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집이 고장 나면 수리 기사를 부르면 된다’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 또한 실감하고 있다. 출퇴근을 하는 평일에는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고, 너무 늦은 시각이나 혼자 있을 때는 낯선 사람의 방문이 부담스럽다. 견적이라도 물으면 전화 너머로 직접 봐야 안다는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이고, 나사 하나를 조금 더 조이는 정도의 간단한 수리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집을 고치는 것보다 수리 기사를 부르는 일이 더 품이 드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 KB금융의 1인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2030 여성 1인가구의 43%가 생활 속의 큰 어려움으로 주거환경 수리를 꼽았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활에 큰 지장을 미치지 않는 잔고장 정도는 집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을 무렵, 룸메이트의 어머님이 방문하셨다. 인테리어 시공을 하시는 어머님의 눈에 달랑거리는 경첩과 홈이 닳은 나사, 애매하게 벌어진 틈새가 더 잘 보였다. 이내 차에서 전동드릴을 꺼내오기에 이르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어긋나고 어설펐던 틈새는 순식간에 테트리스를 하듯 맞물렸다. “여자는 공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이런 건 어차피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거든. 할 줄만 알면 이렇게 간단하지.” 더 이상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 수납장을 볼 때마다 그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집이 고장 나면 수리 기사를 부르면 된다. 아니, 집이 고장 나면 일단 내가 고쳐보면 되지 않을까? 가장 단순한 문장부터 고치고 싶어졌다.

여성을 위한 주택 수리

“집수리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아요. 하지만 강사는 모두 남성이고, 배우는 사람도 대부분 남성이죠. 여자가 이런 걸 왜 배우냐는 분위기가 없지 않아요. 저희가 여성주택수리 워크숍을 진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라이커스 대표 안형선의 말이다. 라이커스는 여성전용 주택수리 서비스 브랜드다. 여성들의 안전한 주거환경 보장은 물론 일자리에 대한 성역할 고정관념 개선을 목표로, 여성의 입장에서 불편하고 불안했던 점을 보완한 주택수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려 예약하고 견적을 미리 받아볼 수 있는데 견적의 경우 출장비, 시공비, 부품비로 수리비용구조를 투명하고 세세하게 안내한다. 그래서 ‘바가지’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여성 수리 기사는 고장 원인과 관리 방법까지 설명해주고, 1년의 서비스 보증기간을 제공한다. 여성 전용이라는 점이 그렇게까지 니즈가 있을까? 정식 서비스 전 모집한 체험단에 이틀 만에 100명에 달하는 여성 고객이 지원했다. 여성들은 이미 그렇게나 원하고 있었다. 라이커스는 혼자서도 집을 고쳐보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주택수리 워크숍 ‘고쳐볼LAB’을 2019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기본적인 안전수칙과 공구 사용법을 익히고, 충분한 실습 시간까지 포함한다. 콘센트, 전구와 같은 소모품 교체부터 타일과 경첩 교체, 욕실 배관 갈기와 실리콘 바르기까지 활용도가 높은 기술을 우선으로 엄선했다. “워크숍 역시 빠르게 매진되었어요. 신청하지 못해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많아 추가 회차를 오픈하기도 했고요.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했는데, 실습 위주의 워크숍이라 참여 후의 만족도도 높았어요. 추후 더 난이도 높은 기술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중급과정을 따로 개설하게 됐죠.” 안형선 대표의 설명이다.

드릴질하는 여자들

라이커스는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고쳐볼LAB’ 외에도 여러 기관과 협업해 워크숍을 연다. 모든 일정은 라이커스 SNS를 통해 공지되는데, 나는 운 좋게도 도봉여성센터에서 진행하는 집수리 입문 워크숍의 마지막 자리를 신청할 수 있었다. 총 이틀에 걸쳐 진행된 워크숍은 첫날 수공구와 전동드릴 사용법을, 둘째날은 콘센트와 스위치와 같은 전기 소모품 교체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6명의 소수 정예로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대뿐 아니라 참여하게 된 동기도 다양했다. 자신의 집을 직접 고치고 싶어서, 고치는 일이 재미있어서, 고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서.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여성으로서 공구와 수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모인 것만으로도 느슨하게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업은 기본적인 이론에서부터 시작된다. 집을 이루는 벽체의 종류, 나사를 박기 위해서는 벽마다 어떤 부품이 필요한지, 어떻게 박아야 더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눈에는 익지만 써본 적 없는 각종 수공구와 전자드릴 사용법까지 익히고 본격적인 실습에 들어갔다. 석고보드와 합판, 철재, 콘크리트까지 다양한 소재에 직접 나사를 박아보고 나아가 2인 1조로 짝을 지어 가벽에 실제 선반을 설치했다. 드라이버와 드릴이 주는 손맛을 아는가? 막연히 거칠고 위험할 것만 같았던 전동드릴은 의외로 섬세한 맛이 있다. 나사가 홈을 타고 벽체에 뿌리를 내리듯 고정되는 순간의 쾌감이 있다. 그 쾌감을 처음으로 맛본 작은 감탄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방문고리 앞에 자리 잡았다. 캐치박스를 고정한 나사가 튀어나와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지 반년이 넘었다. 드라이버로 조여보기도 했지만 이미 문틀이 바스라져 고정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럼 나사가 단단히 들어갈 수 있도록 틈새를 메우면 됩니다. 빈틈에 나무젓가락이나 연필 등을 깎아 넣고 다시 나사를 박아보세요.” 쉬는 시간을 틈타 얻은 해결법대로 시도해보니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야무지게 앙다문 문고리가 별거라고, 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 모든 나사를 조일 기세로 고칠 것을 찾아다녔다. 다음 날 수업까지 들으니 피복을 벗기고 전등을 교체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한 번 들은 수강생들이 왜 더 높은 난이도의 수업을 원하는지 너무나 이해가 됐다. 물론 단 이틀의 수업만으로 능숙한 집수리 스킬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감이 생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다는 후보가 생긴 것으로 충분하다. 역시 여자는 공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