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을 때 속상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질 때, 참지 말고 주저앉아 엉엉 울기로 한다.

 

나는 잘 운다

날 때부터 잘 울었다.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대차게 울어대더라. 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근데 또 싱글싱글 잘 웃었어. 자라면서도 좀 새침했지만 잘 울고 잘 웃었어. 그렇게 예뻤어.” 나는 기억날 리 없는 그 시절을 엄마는 그렇게 기억한다. 시작이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 내내 따라다닌 별명이 울보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뻑하면 울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엉엉 우는 나를 벽 앞에 세워두고 단호한 말투로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쳤다.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될 리 없지 않은가?’ 어렸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럴 땐 엄마 품에 숨었다. 쏜살같이 달려가 엄마에게 얼굴을 박고 숨넘어갈 듯 헐떡헐떡 울었다. 나라 잃은 백성처럼 울었다. 엄마는 등을 툭툭 쓰다듬으며 “울어라, 울어. 힘 다 빠질 때까지 실컷 울어버려. 그럼 나아져.” 별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작년 11월, 아끼던 친구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떴다. 유년을 함께한 친구이기에,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하며 유치하게 놀 수 있는 친구였는데 뭐가 급했는지 사라져버렸다.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얼굴로, 마음으로, 입사 면접 이후 처음 까만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 길이 구만리처럼 멀었다. 마침내 영정 사진과 마주했는데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했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주저앉아서 오열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다. 순간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탁 막힌 것처럼 숨통이 조였다. 울고 싶은데, 잘 울 수 있는데, 그거 내가 전문인데 아무리 쥐어짜도 한 방울의 눈물조차 나질 않았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과 직면했을 테니까요.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와 닿았을 거예요. 시간이 좀 흐른 다음이라도 그 슬픔을 표현하는 걸 권해요. 울음은 죽은 이를 향한 애도의 표현이자, 남아 있는 사람에겐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거든요. 그럼 좀 나아질 거예요.” 이택중 신경정신과 원장의 말이다. 그날 이후 난 아직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었더니 좀 낫더라

눈물은 98% 이상이 수분이다. 거기에 약간의 염화나트륨 성분이 함유돼 있어 조금 짜다. 많이 먹어봐서 잘 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눈물은 자신이 슬플 때는 물론 다른 사람이 슬플 때도 나온다. 눈물의 주된 기능은 보호다. 보호의 대상은 눈 자체일 수 있고, 감정일 수 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 수 있다.

눈물은 감정의 산물이다. 눈물은 몸의 파이프를 청소해준다. 어린 시절 기운이 다 빠지도록 울고 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팔팔해졌다. 모두 한바탕 제대로 울고 나서 속이 후련하고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낀 적 있지 않나? 가슴 엄청 아픈 눈물, 고귀한 눈물, 자기연민의 눈물까지 가지가지지만, 속에 쌓이고 쌓인 나쁜 것을 씻어주는 데는 별 차이 없다. 하긴, 압박이나 강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밸브의 꼭지를 느슨하게 돌리면 샤워한 것처럼 시원해지긴 할 테다. 운다는 행위는 감정의 변비를 해소해준다. 이택중 전문의는 그 기분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는 행위는 기억이나 생각을 다시 처리하는 작용을 해요. 쉽게 말하면 치유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죠. 리셋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감정적 눈물은 오랜 시간 쌓인 부정의 감정이 더는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분비물이라고 보면 돼요. 터져 나온다는 면에서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죠. 부정적인 감정은 묵히지 말고 빨리 털어내야 좋아요. 만성적으로 지속하면 기억력이나 집중력 둔화 등의 증상도 생길 수 있어요. 우는 사람을 보고 감정적이라고들 하잖아요. 우는 행위는 오히려 이성적이고 중립적인 인지를 가능토록 해요.”

암 치료 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울어야 삽니다>를 통해 “가장 정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토해내듯이 우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병욱 박사는 정신적인 고통뿐 아니라 신체적인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울어야 산다고 주장한다. 가슴속에 맺힌 슬픔과 한을 눈물에 담아 펑펑 쏟아내야 몸 안의 독소를 뽑아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분노, 화, 미움, 슬픔처럼 눈물로 덜어내야 하는 일들을 참고 외면할 때, 가슴속에 쌓인 감정들은 독소가 되고 몸의 생기마저 빼앗아간다. 독소를 해소하지 못하면 마음의 병은 물론, 심각하게는 육체가 망가진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암’이라는 종양 덩어리를 꼽는다. 눈물을 흘리면 면역 글로불린G 같은 항체는 2배 이상 증가하여 암세포를 억제하거나 감소하게 한다. 항체는 독소를 중화시키고, 병원균이 인체 세포에 접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며, 소화기계도 원활하게 움직여서 소화력이 크게 늘어난다. 눈물은, 울음은 사내답지 못한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자기방어 수단이다.

우는 것도 능력

잘 우는 건 잘 노는 것만큼이나 유의미한 능력이다. 이택중 전문의는 잘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낮다고 말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소극적인 사람일수록 눈물의 치유 효과에 대한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다. 눈물의 힘을 알지 못하니 그 힘에 기댈 일도 적어진다는 뜻이다. “임상심리학자 코드 베네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잘 울지 않는 사람이 잘 우는 사람에 비해 더 강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자주 느낀다고 해요.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을요. 잘 우는 사람은 공감 능력이 높고, 타인과의 유대 관계를 잘 쌓고 싶어 하는 사람일 수 있어요. 건강한 사람인 거죠.” 1997년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영국 전역은 큰 슬픔에 빠져들었고, 많은 영국인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서는 우울증으로 치료받는 사람이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다이애나 효과’ 라고 불렀는데, 그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행동 자체가 감정의 해방구 역할을 하여 정신적인 치유제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종과 달리 눈물을 잘 흘리도록 변이한 것은 울음이 마음의 짐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사람의 시간은 죽은 사람의 시간보다 느렸나, 빨랐던가. 어느덧 먼저 간 친구의 기일이 다가온다. 그 곁으로 가서 한 반나절은 꺼이꺼이 한바탕 눈물의 파티를 벌일 준비를 한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일년 치에 이자까지 얹어 실컷 울 테다. 그래야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간절히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눈물의 에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