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의 필자가 털어놓은 사적인 속옷 이야기
속옷 잘 챙겨 입어요? 어떤 스타일의 속옷을 즐겨 입어요? 예쁜 속옷을 입을 때 어떤 느낌이 들어요? 지극히 서정적이고 자극적인 속옷 이야기. 여기 4명의 필자가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딸아, 너는 이렇게 속옷을 입어라
만으로 서른일곱에 나는 패션잡지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내 회사를 만들었다. 디지털과 뉴미디어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디지털’, ‘모바일’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시기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로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인데 몇 년간 안정된 회사에 더 다니지 그래?” “큰 회사도 운영이 어려운 요즘 같은 때에 나가서 뭐 먹고살려고 그래?” 주변 선배와 동료들이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나를 회유 혹은 만류할 때마다 내 대답은 당차고도 단호했다. “선배, 제가 얼마나 독종인지 모르세요? 디지털이 뭐 별건가요? 디지털이든 뭐든 전 떡볶이집을 해서라도 잘 먹고 잘 살 테니 걱정 마세요.” “저도 다 계획이 있어요. 두고 보세요. 전 잘될 거예요”. 떡볶이집은 무슨, 계획은 개뿔…. 사실 당시의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고 계획은커녕 당장 다음 달 급여가 입금되지 않으면 뭘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대책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직서를 썼고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하나를 얻고 책상 두 개를 사서 내 회사를 차렸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들 ‘벼랑 끝에 선 기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때의 내 마음이 딱 그랬던 것 같다. ‘내 열정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 용기는 나이 들수록 줄어든다. + 사업을 하려면 열정과 에너지, 용기가 필요하다. 이 모두를 정확히 만족시키는 시점이 지금인데 지금 이 시기를 놓친다면 나는 평생 남의 머슴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심정.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내 회사를 차리고 법인 등록을 끝내던 날, 나는 의식을 치르는 마음으로 숍으로 달려가 속옷 7벌을 새로 샀다. 그 전에 입던 레이스 소재, 두툼한 패드가 붙은 뽕브라, 똥꼬와 밀당하는 기분을 선사하는 T 팬티 등은 상자에 넣어 장롱 위로 치워버리고 오직 실용성과 가성비만을 감안해 만든 패디드 캐미솔 7장과 베이지색 심리스 브리프 7장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건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기댈 곳도 없고 보잘것없는 내 작은 회사를 자리 잡게 할 때까지 여자로서의 삶에는 관심 끄겠다는 다짐.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설레는 일 없이 나의 모든 신경과 시간을 나의 일에 바치겠다는 내 스스로의 약속.
그렇게 4년 10개월을 지냈다. 다행히 내 회사는 조금씩이나마 자리를 잡고 성장해나가고 있고 내 나이는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어섰다. 속옷은 올해 초에 다시 싹 바꾸었다. 엄청나게 야들야들하고 사치스럽고 레이스투성이인 것들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내 사업도 사업이지만 내 몸 곳곳에서 나타나는 노화의 징후들이 ‘속옷 되갈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금씩 침침해지는 눈, 자고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유독 전날보다 꺼져 보이는 윗가슴, 체중은 늘지 않았는데 조금씩 죄는 느낌이 드는 예전 옷을 체감하며 일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용기가 나이 먹을수록 줄어드는 것 못지않게 나의 여성적 젊음 역시 점점 줄어든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았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속옷은 신발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예쁜 것을 착용하려면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 편한 것을 선택하면 생활의 측면에서는 편하지만 ‘예쁨’의 자존감은 떨어진다. 다시 말해 러닝화나 브리프 팬티는 가성비와 기능 모두 만점에 가깝지만 나의 섹시함을 잊게 만든다. 반면, 스틸레토 하이힐이나 레이스 T 팬티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내가 섹시한 여자, 남자에게(성에) 관심이 있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대화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일도 중요하지만 여자로서의 삶, 남자에게 끝없이 호기심을 갖고 남자들과 계속 대화하고 싶어 하는 여자로서의 삶도 중요하다는 걸 5년 전에는 왜 몰랐을까?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때와 달리 섹시한 속옷을 입고 남자들과 즐겁게 데이트하는 생활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실용성 위주의 유니폼 속옷 7벌과 함께하느라 잃어버린 5년여는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언젠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해야 할 정신 교육에 속옷 항목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딸아 너는 이렇게 살아라.
11. 라면만 먹고 사는 상황에서도 속옷은 네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사 입어라. 그 속옷이 너에게 자신감을 줄 것이다.
12. 같은 값이면 좀 불편해도 섹시한 속옷을 택해라. 보기 좋은 게 결국 마음도 편하게 만든단다.
13. 보기 좋은 걸 입었다면, 그리고 보여줄 상대가 있다면 최대한 부끄러워하지 말고 너의 속옷을 상대에게 자주 보여주어라. 단, 뭔가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만들지 말고.
14. 보여줄 상대가 없을 때는 보여줄 상대가 있을 때보다 더 좋고 더 섹시한 속옷을 입어라. 그때가 진정 너의 속옷을 보여주고 싶은 상대에게 맘껏 보여줄 수 있는 기회란다.
15. 네가 미혼이라면 되도록 세상이 네게 강요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에게 네 속옷을 보여주어라. 단, 다른 여자들에게 죄짓지 않는 선에서! 너의 에너지는 물론이거니와 남자들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단다.
그나저나 딸아, 엄마의 충고를 들을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니? 어서 예쁜 속옷 입고 밖으로 나가렴. 멍하니 흘려보내기에 젊음은 너무나 짧단다! 미안하지만 나도 오늘 예쁜 속옷 입어서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조만간 또 만나 이야기 나누자꾸나, 그때까지 우리 둘 다 즐겁길! Love U!
– 심정희(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보앤샘홀더스 대표)
스포츠 브랜드 속옷을 선물하는 남자라니!
썸 타고 있던 회사 선배가 선물을 내밀었다. 같이 해외 출장을 갔던 것을 계기로 친해졌는데 그 이후로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번듯한 외모에 꽤 잘나가는 선배였고, 무엇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탑재된 유머 감각이 매력적이었다. 둘이 함께 떠난 첫 여행, 고즈넉한 한옥에서 별을 구경하며 선배가 고백을 했다. 그날 우리가 본 풍경은 완벽했고 차가운 공기가 살랑이며 이마를 스쳤고, 밤하늘은 황홀했고 그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애매하지만 섹시한 밤이 지났고, 그 이후 서울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건넨 선물이었다. 집에 와서 선물을 펴보니 속옷 세트였다.
아. 속옷이라니.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지? 우리의 첫 번째 밤이 좋았다는 기념품의 일종일까? 그날 나의 속옷이 본인 취향이 아니었으니 자신이 준 것으로 갖춰 입으라는 말인가? 그날 뭘 입었더라? 그냥 무난한 흰색 세트였던 것 같은데? 아니면, 이것을 입고 다시 만나자는 초대장 같은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속옷을 펼쳤다. 빨간색 스트라이프의 스포츠 브랜드 속옷이다. 사이즈도 잘 맞췄고(컵의 크기가 조금 컸지만, 감사하게도), 순면에, 나름 깔끔하고 예뻤다. 뭐랄까. 대학교 동아리 후배한테 줄 법한 디자인이다. 캐주얼하고 발랄하고 건전하다.
고르면서 했을 고민이 속옷을 펼치는 순간 더빙이 되듯이 들렸다. 속이 훤히 비치는 레이스 속옷을 선물하면 ‘너랑 하고 싶은 것은 아주 섹시한 일이야!’라는 노골적인 메시지로 보일 테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것을 선물하면 내가 질색을 할 테고,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을 선물하면 성의 없어 보일 테니… ‘부담 없으면서도 이상한 메시지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고른 거야’라는.
실용적이고 예쁘긴 했지만, 섹시하진 않았다. 얼마 전 화사의 공항패션 중 하나인 히프슬렁 룩의 알렉산더 왕 바이크 쇼츠 같았단 말이다! 겉으로 내 입어도 될 만큼 건전하다. 그리고 우린 몇 번을 더 만났고, 그사이 난 그와 관계를 정리했다. 만나면 즐겁고 유쾌했지만, 긴장감은 없었다. 아직도 그가 선물한 속옷은 아주 잘 입고 다닌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무난하게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하얀 레이스의 속이 살짝 비치는 브라렛을 선물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남자에게 ‘영화 속 섹시한 속옷 노출 장면 톱 10’을 검색해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실제로 2015년 미국의 영화 전문 매체인 ‘워치모조(www.watchmojo.com)’가 선정한 리스트가 있다. 1위는 <밸리에서의 2일>(1996, 존 허즈펠드 감독)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투명한 흰색 레이스의 승리!).
아무리 그래도 남자한테 속옷을 선물받을 때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외엔 절대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야한 것이 받고 싶은 법이다. 비록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입는 순간 그에게는 절대 섹시미를 발휘해서 엄청난 섹시폭탄으로 변신하게 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이 입었을 것 같은 그런 것. 아. 그러고 보니 내 생에 가장 섹시했던 남자가 선물한 망사 T팬티가 생각났다. 받았을 때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렜다. 너무 어렸고, 생전 처음 입어보는 것이라 ‘세상에 이것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입을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났고, 온몸이 섹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에게 난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엄청나게 섹시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래된 남자친구와 디자인 숍에서 쇼핑을 하면서 반짝이는 파란 새틴 소재에 팬티 한가운데 노란색 오리가 그려져 있는 남자 드로우즈를 선물했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혀를 끌끌 차면서 ‘도대체 이런 건 누가 사주는 거야?’라고 말할 법한. <미녀 삼총사>에서 우리의 섹시 스타 카메론 디아즈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면 소재의 삼각팬티를 입고 깜찍하게 춤을 추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의 남자 버전쯤 되는 것이었다. 다른 여자와 함께 그 팬티를 보면 깔깔거리며 웃을 것 같은.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그 팬티를 보게 되면 우선은 깔깔 웃을 테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의 유머러스하고 감성적이었던 한 시절이 생각나겠지. 쌤통이다.
– 장세희(프리랜스 콘텐츠 디렉터)
나를 증명하는 방법
고백하건대, 새로운 남자가 생기면 가장 먼저 바꾸는 게 있다. 향수와 속옷, 이 두 가지다. ‘그 남자에게 뭐가 어울릴까’에서라기보다는, 그 남자를 만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질까 하는 마음에서다. 이를테면, 얼마 전 육체적 사랑이 압도적으로 컸던 남자를 만날 때는 코코 마드모아젤의 향수를 뿌리고 아장 프로보카퇴르의 볼륨 패드가 단단히 박힌 에메랄드 블루 컬러의 실크 브라와 팬티 세트를 입었다. 그를 만날 땐 꼭 레이스 아님 새틴처럼 몸에 흐르는 소재의 란제리 세트를 고집했다. 아마도 정신적인 사랑의 빈 공간을 채울 만한 요란스러움이 꽤나 필요했다 보다. 평소 우드나 스파이시, 타바코 향을 즐겨 뿌리는 내게 코코 마드모아젤은 비교적 평범한 향인데 내게 그는 꼭 그만큼이었다.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 그저 그가 만나는 여느 여자 중 하나로 기억되길 바랐다.
365일 중 절반 이상을 내 몸과 함께하는 속옷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다. 기본 브라 또는 과하지 않은 푸시업 브라, 그리고 심리스 팬티 또는 T팬티라 불리는 ‘쏭(thong)’을 세트로 해 6개월에 한 번씩은 바꾼다. 그리고 색깔은 반드시 검정이어야 한다. 속옷이 비치든 안 비치든 검정이 좋다. 슬리브리스를 입을 때 살짝 보이는, 가슴 바로 위 브라끈에 조그맣게 적힌 캘빈 클라인 로고를 무척 좋아한다. 캘빈 클라인을 처음 입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톱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와 크리스티 털링턴의 영향이 컸다. 속옷만 입고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선 모습, 그리고 흑백사진이 풍기는 간결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절대 잊지 못한다. 로고만 적힌 새하얀 속옷이 그렇게도 패셔너블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나 역시 캘빈 클라인을 입으면 그들처럼 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는 최근까지도 레디투웨어와는 독립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MYCALVIN이라는 해시태그를 내세워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와 잘 맞는, 건강하면서도 패셔너블한, 그리고 크리에이티브한 아티스트를 모아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캠페인을 진행했다. 가령, 에이셉 라키와 켄달 제너는 속옷 차림으로 자신이 언제 가장 매력적인지를 말한다. 영상과 사진에 담긴 그 모습은 속옷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서도 얼마나 당당하고 자유로운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케이트 모스의 1990년대나 켄달 제너의 2019년이나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의 메시지는 단 하나다. 속옷을 입은 겉모습보다는 그 태도에 집중하라는 것. 패션은 그 다음 라운드다. 스스로에게 당당하다면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패셔너블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는 우리 머릿속에 어떤 태도를 갖게 해줄 만큼 분명한 이미지로 몇십 년간 베이식한 브라와 팬티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최근에 관심이 생긴 속옷은 리한나의 새비지×펜티(Savage× Fenty)다. 지난 5월 LVMH와 함께 럭셔리 속옷 브랜드 펜티를 론칭한 데 이어 이번에는 협업 라인으로 뉴욕 패션위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9월 11일 비공개로 진행한 런웨이는 9월 20일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공개되었다). 새비지×펜티가 화제를 불러 모을 수 있는 건, ‘리한나 = 펜티’ 대신 ‘리한나 + 펜티’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펜티는 리한나의 속옷 취향을 보여주는 1차원적인 마케팅 전락에서 벗어나 리한나, 그리고 그를 따르는 팬들의 취향이 더해진다는 점에서 과거 스타 브랜드와는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상에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사이즈의 모델을 고용해 이미지 플레이를 한다든지, 란제리 쇼를 현실이 되게 만든다든지 등 팬들의 의견과 피드백을 적극 반영해 브랜드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기존에 속옷 왕국이었던 빅토리안 시크릿이 판타지를 안겨줬다면, 새비지×펜티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솔루션을 제공하는 셈이다.
앞서 말했 듯 속옷에 대한 나의 취향은 기분에 따라, 최근의 관심사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속옷을 식사에 비유한다면 매일 쌀밥을 먹다가 햄버거나 짬뽕, 스테이크가 당기는 날도 있으므로. 그러나 편식은 없다. 모든 스타일과 종류를 경계와 구분 없이 도전한다. 한 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치장하고 외출한 날이었다. 마침 검은 머리인 것도 싫증이 났는데 속옷부터 셔츠, 재킷, 팬츠, 신발, 그리고 머리, 하물며 아이라이너까지 모두 검은색인 내 자신을 보니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때 이후로 컬러 아이템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당시 꽂힌 건 핑크 컬러였다. 속옷을 살 일이 생겨 매장에 들렀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실크 브라와 T팬티, 스포츠 브라와 보이프렌드 브리프, 하물며 나이트가운까지 모두 핑크로 꾸몄으니 내 자신이 얼마나 컬러에 억눌려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또 한번은 스포츠 브라에 매료된 적도 있었다. 한번 입으면 다른 건 입지 못한다는 스포츠 브라, 그 극강의 편안함을 맛보았고 그 이후로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샀다. 당시 가장 즐겨 입었던 스포츠 브라는 스투시. 스포츠 브라 그 이상 패션 아이템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서스펜더 팬츠나 겨드랑이 부분이 깊게 파인 슬리브리스 톱을 입을 때는 그것을 안에 입고 나갔다(때에 따라 브라에 청바지만 입고 나간 적도!). 어느 한때는 주야장천 남자 팬티만 입고 다닌 적도 있다. 시작은 남자친구의 것이었다. 남자친구네 놀러 갔다가 그의 옷장을 물색하던 중 파란색 로고 밴드가 눈에 띄는 언더아머의 롱 브리프를 발견했다. 허벅지를 포근히 감싸는 길이, 엉덩이를 안정감 있게 받쳐주는 두 줄의 심 라인, 그리고 허리마저도 편하게 감싸는 허리 밴드까지. 여자들이 옷 맵시를 위해 T팬티를 입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동안 남자들은 이토록 바지처럼 편한 팬티를 입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 몸이 예민하거나 많이 부을 때는 남자용 브리프를 반바지처럼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렇듯 속옷은 스스로 뭘 좋아하고,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즉,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수록 골라 입는 재미가 생긴다. 또 하나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 중에 나에 대한 애정도, 자신감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부터라도 자신이 지금 좋아하는 걸 떠올리며 속옷을 골라보길. 어제 나는 강아지가 잔뜩 프린트된 팬티를 샀다.
– 오유라(<데이즈드> 패션 에디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보통의 날.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오후를 보여줄 때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은 집 안 빨랫줄에 걸려 있는 속옷으로 향한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팬티 몇 장은 보통 사람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입는 옷, 속옷.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미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신체를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장치가 필요했고, 보정의 기능에 충실한 속옷이 등장했다. 속옷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맨살에 가장 먼저 닿는 옷,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모두를 위한 옷이 되었다. 질 좋은 캐시미어 코트는 입지 않아도 속옷을 입지 않는 사람은 없다. 고가의 실크 소재 속옷을 갖고 있진 않아도 속옷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팬티 몇 장과 브래지어, 내의 몇 벌은 가지고 있다. 속옷을 잘 챙겨 입은 날은 왠지 모르게 ‘안심’하게 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가 골라준 내의로 속옷 인생을 시작한다. 봉제선의 까끌까끌함이 혹여 피부를 따갑게 할까 거꾸로 뒤집어 입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고, 여자라면 가슴이 봉긋하게 올라올 즈음 선물받은 첫 브래지어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됐다. 이제는 사방에서 정보가 쏟아진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며 팬티 열 장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다는 홈쇼핑 프로그램, 매의 눈으로 자신의 사이즈를 체크하는 백화점 매대를 둘러싼 여자들의 쇼핑 경쟁, 고고한 자태로 요염하게 서 있는 럭셔리 속옷 브랜드 쇼윈도의 마네킹까지.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체온을 조절해준다는 기능성 속옷 광고에 놀라워했다가 요즘은 하나 더 추가됐다. 모유를 쉽게 모을 수 있는 스마트 기술이 접목된 속옷이 등장했는가 하면 덴마크에서 개발한 항균과 탈취 기능이 강화돼 무려 한 달간 세탁이 필요 없는 속옷도 있다. 속옷 하나 사는 데 선택지가 너무나 많아졌다.
아무거나 살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거나 살 수 없는 속옷. 누구나 속옷을 고르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촉감과 온도다. 외부의 자극이 피부 감각을 통하여 뇌로 전달되는 감각 촉감. 맨살에 옷의 표면이 닿는 순간, 나를 ‘안심’시켜줄 제품들을 나는 꽤나 까다롭게 찾는 편이다. 적당한 바삭거림이 마음에 드는 코튼의 가벼움, 우아한 실크가 안겨주는 보드라움과 편안함, 모달 원단이 피부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청량감, 구김은 가더라도 자연스러운 주름과 약간의 까끌거림이 주는 시원함이 마음에 드는 리넨…. 촉감과 온도에 예민한 나에게 안정을 주는 나만의 속옷을 찾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속옷 한 장 고를 때도 그만큼의 관찰이 필요하다. 어느 아이돌이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걸치지 않은 듯한 실크 소재의 팬티를 입는 버릇이 있다고 한 말에 크게 동감했다. 맨살에 닿는 속옷을 선택하면서부터 나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함께 선택할 수 있기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배우 송새벽의 대사가 크게 다가왔던 것도 같은 이유다.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팬티는 5만원에서 몇 백원 빠진 거 사 입어. 내가 오늘 죽어도 병원에 실려 가서 빨개 벗겨놔도 절대로 기죽지 않게 비싼 팬티 사 입어. 이거는 되게 중요한 거야. 죽어서는 쪽팔린 거 대책이 없어. 죽어서는 팬티 못 갈아입어. 마지막은 내 팬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막 사는 것 같아도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매일 비싼 팬티 입고 그렇게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
당신에게 속옷은 어떤 의미인가?
– 도현영(<요즘 여자>, <그녀들의 멘탈뷰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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