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향 그리고 서울 여자

향기롭게 재해석한 ‘얼루어링 서울(Alluring Seoul)’ 향초를 만들었다. 수향의 향기로운 공간에서 그녀를 만났다.

니치 향수와 향초가 주목받기 시작하던 지난 2013년 봄, 수향의 대표 김수향은 이태원 경리단길 골목에 자신의 이름을 따 ‘수향’이라는 향초 매장을 열었다. 향초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연분홍색 박스와 향초가 나란히 진열된 매장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가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매혹시킨 건 수향만의 특별한 향기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완성된 향초는 자신만의 취향이 분명하고 흔하지 않은 것에 가치를 두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태원 565’, ‘레인 드롭’, ‘유즈’ 같은 독특한 네이밍도 눈길을 끌었다. 향초나 디퓨저에 원하는 이니셜이나 글귀를 적은 레이블을 붙여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렇게 갖고 싶고, 선물 받고 싶은 브랜드로 자리 잡으면서 수향은 이니스프리와 협업해 제주 자연의 향기를 담은 10가지 향초를 선보였고,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 더베이 101과 협업해 해운대의 향기를 재현한 ‘해운대 101’이라는 향초를 만들기도 했다. 그 밖에도 먼데이 에디션과 플라자호텔, 달팡 등 다양한 브랜드와 흥미로운 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얼루어>와 함께 말린 장미 꽃잎을 담은 왁스 타블렛을 별책부록으로 제작해 왁스 타블렛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달에는 <얼루어>와 함께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서울 여자’를 모티브로 한 향초를 제작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사는 매력적인 ‘서울 여자’ 김수향을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1 <얼루어> 창간 12주년을 기념하며 독자를 위한 특별 선물로 기획된 향초, 얼루어링 서울. 2 향초와 디퓨저를 진열한 2층 매장. 3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와 협업해 제작한 컬렉션 향초들. 4 수향의 정체성이 반영된 모던하고 세련된 공간. 5 가로수길 골목의 오래된 이층집을 개조한 빌라 수향.

‘서울 여자’를 주제로 한 향초를 만들어달라는 <얼루어>의 제안을 받았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나요?
먼저 제가 생각하는 서울 여자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봤어요. 서울 여자는 세계 어떤 도시의 여자들보다 진취적이고 용감한 것 같아요. 성형수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지만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또 서울 여자는 예쁘고 매력적이에요. 자신의 분야에서 열정을 다하고, 아름답게 꾸밀 줄도 알고요.

서울 여자의 이미지를 향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어렵지 않았나요?
각 지역별 여자의 이미지를 향으로 묘사하면, 아랍 여자에게서 풍기는 향이 오리엔탈 계열이라면 서울 여자에게서는 산뜻하고 여성스러운 향이 느껴져요. 싱싱한 토마토에서 나는 향기처럼요. 토마토 잎과 과육의 향을 미들 노트로 하고, 톱 노트에는 시트러스와 그린 향을 가미해 산뜻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고자 했어요. 베이스 노트에는 앰버와 머스크 향을 더해 여성스러운 느낌을 살렸죠. 전체적으로 싱그러운 느낌이에요.

향을 처음 맡았을 때 싱싱한 풀잎을 문질렀을 때 나는 신선한 풀내음이 느껴졌는데 토마토 향이었군요.
요즘 계절과 잘 어울리는 향이죠.

매장 입구에 걸린 서예 작품이 인상적이에요. 수향만리(秀香萬里). 빼어난 향기가 만리까지 퍼진다는 의미죠?
맞아요. 아버지가 직접 써주신 거예요. 가끔 제 이름이 가명이 아니냐고 물어보는데 수향(秀香)은 아버지의 서예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사람이 이름처럼 산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살고 있네요.

향초를 만들기 전에는 음악 기획사에서 일했다고 들었어요. 향초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독립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의 음반을 내고 다양한 음악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10년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음악 취향에 따라 사람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됐죠. 향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의 성향이나 스타일에 어울리는 향을 제안해줄 수도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처음에는 니치 향수를 추천해주는 퍼퓸바를 기획했어요. 그러다가 향초를 만들면서 그 매력에 빠져 브랜드를 직접 만들게 됐어요.

향수와 향초를 만드는 건 어떻게 다른가요?
향초는 촛불로 향을 공기 중에 퍼트려 향을 맡게 되고, 향수는 몸에 닿아 자연스럽게 체취와 섞여 같은 향도 다르게 느껴져요. 향초는 향수처럼 톱, 미들, 베이스 노트를 섬세하게 느끼기 어려워 단순할수록 향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요. 향수처럼 즉각적으로 공간의 향을 바꾸고 싶다면 룸 스프레이가 효과적이에요. 하지만 로맨틱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향초가 제격이죠.

새로운 향을 만들 때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서랍 속에 향수 샘플이 가득 들어 있어요. 기존에 나와 있는 향수나 새로 나온 향수의 샘플을 구해서 시향을 하다 보면 새로운 향에 대한 영감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향도 패션이나 뷰티처럼 트렌드가 존재하거든요. 요즘은 관념적이고 이미지를 형상화한 향을 선호하는 추세예요.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좋은 향기가 났어요.
그린 노트가 가미된 시트러스 향이에요. 작업실 책상에 놓여 있는 향초들은 아직 테스트 단계에 있는 제품들이에요. 에센스로 맡아본 향이 좋았더라도 향초로 제작했을 때 향이 덜 난다거나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향을 피워보고 수정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해요.

각각의 공간을 어울리는 향으로 채우는 레이어링이 요즘 인기인데요. 작업실 외에 공간은 어떤 향으로 채우나요?
작업실 외에 침실이나 거실, 옷장이나 욕실 같은 곳은 제가 좋아하는 향을 많이 사용해요. 그린이나 마린 계열처럼 물기에 젖은 듯 촉촉함이 느껴지는 향을 선호해요. 침실에는 향이 코끝에 은은하게 와 닿도록 왁스 타블렛을 걸어두면 좋아요. 휴식과 숙면을 위해서는 허브 계열의 향을, 로맨틱한 순간을 위해서는 플로럴 계열이 좋겠죠. 거실에는 시트러스나 그린 계열의 향이 무난해요. 달콤한 향도 좋고요. 사람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던 달콤한 음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달콤한 향에 끌리거든요. 외출하기 전 침실에 룸 스프레이를 뿌리고 문을 닫아두면 집에 돌아왔을 때 깨끗하게 정돈된 침구처럼 산뜻한 느낌이 들어요. 욕실에는 향초 대신 향 비누를 둬요. 풍부한 향이 오랫동안 퍼지고 욕실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죠. 옷장에는 우디 계열의 왁스 타블렛을 걸어두는데 외출할 때 옷에 밴 향이 은은하게 퍼져요. 현관에 디퓨저를 두면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 기분 좋은 향을 느낄 수 있어요.

향과 늘 함께하는 삶은 어떤가요?
지난 몇 년 동안 삶이 많이 달라졌어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조언을 구하러 아는 분을 찾아갔는데 좋은 향기가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Life is better than you smell good’이라는 수향의 모토가 탄생하게 됐죠. 경리단길에 매장을 열면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는데, 매일 싱싱한 생화를 매장에 두는 거예요. 향을 만들고 좋은 향과 늘 함께하면서부터 제 삶도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 것 같아요. 사람도, 공간도, 향이 시작과 마지막을 담당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아름다운 집이라도 좋지 않은 향기가 난다면 근사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공간의 향이라는 게 서울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라고 생각해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향을 통해 자신만의 공간에, 자신의 취향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욕실에서 작은 사치를 만끽할 수 있는 배스 라인을 만들고 싶어요. 전통적으로 향의 원료로 쓰인 꽃과 식물을 사용해 베이식한 향수 라인도 만들고 싶고요. 판매를 위해서라기보다 하나의 작품처럼 소장할 수 있는 컬렉션으로요. 해외 진출도 계획 중이에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홍콩과 유럽 시장의 관문인 밀라노에 매장을 여는 게 꿈이에요.

    에디터
    뷰티 에디터 / 조은선
    포토그래퍼
    정성원,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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