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만나는 가죽 패션
따뜻한 바람이 불고 만물이 깨어난다.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한 봄, 우리는 오래된 허물을 벗는 대신 새로운 가죽을 입는다.
‘가죽’ 하면 으레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가 있었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터프 가이나, 터질 듯한 몸매를 반질 반질한 가죽 옷에 가둔 섹시한 팜므파탈 같은 것 말이다. 누구를 상상하든 그 뒤에는 항상 투박한 블루스나 록 음악에 술 한 잔을 기울일 것 같은, 거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건 세상에 가죽 소재로 만든 옷이 퍼펙토 재킷과 바이커 팬츠, 선셋 대로의 어린 창녀들의 미니스커트에 한정된 시절의 이야기다. 2015년의 봄을 맞이하는 지금, 가죽은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다양한 영감과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품은 스타일리시한 옷으로 거듭났다.
2015년 봄/여름 시즌 런웨이에서 가장 눈에 띈 가죽 트렌드 중 하나는 단연 미니멀리즘이었다. 가죽의 매끈한 표면과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질감은 별다른 장식 없이 날카로운 재단 하나만으로도 세련된 실루엣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디올 컬렉션에서 볼 수 있었던 롱 코트는 그런 가죽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정강이까지 길게 툭 떨어지는 깨끗한 실루엣에 얇은 벨트로 허리를 한번 조여준 이 코트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헤로인 ‘트리니티’를 보는 듯, 반듯한 재단의 가죽 코트 하나만 걸쳤을 뿐인데 캐리 앤 모스의 쿨하고 지적인 이미지가 절로 연상되었다. 캘빈 클라인 컬렉션은 롱앤린 실루엣의 간결한 코트와 부분적으로 레이저 커팅 디테일을 더한 미니멀한 드레스를 제안했는데, 네이비 블루, 크림즌 레드 같은 짙은 채도의 색상에 가죽 특유의 반질반질한 광택이 덧입혀져 날카롭게 빛났다. 또 낙낙한 실루엣에 제각각 길이가 다른 아이템을 여러 겹 레이어링한 랙앤본의 가죽 룩은 중성적인 1 990년대식의 미니멀리즘을 재현한 듯했고, 니나 리치와 데렉 램이 선보인 간결한 가죽 미니 드레스는 시티 룩을 추구하는 여자들에게 적격이었다. 아노락 점퍼, 밀리터리 베스트 등 유틸리티 트렌드와의 조합을 시도한 아크네 컬렉션 역시 매력적이었고, 다양한 가죽 패치워크 기법을 선보인 프로엔자 스쿨러 컬렉션 또한 인상적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프랑수아즈 아르디와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프랑스의 쿨걸을 연상시키는 빈티지풍의 가죽 룩은 루이 비통, 프라다와 톰 포드 등 트렌드를 주도하는 브랜드에서 주로 볼 수 있었다. 프라다는 가죽 코트와 미디 스커트에 레이스와 자카드 소재를 군데 군데 장식해 빈티지한 매력을 뽐냈고, 루이비통은 가죽을 잘게 잘라 이어 붙이는 패치워크 기법으로 패턴 플레이를 선보이며 1970년대의 사이키델릭 문화를 오마주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향수를 담아낸 가죽 룩도 눈에 띄었다. 톰 포드는 프린지가 달린 미니스커트와 블루종 앙상블로 그 시절의 록스피릿을 담은 룩을 제안했고, 타미 힐피거의 큼직한 가죽 퍼펙토 재킷은 금빛 칼라와 지퍼로 인해 글램 록의 화려함이 느껴졌다. 이 외에도 가죽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질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패션 위크 곳곳에서 엿보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준 디자이너는 단연 J.W. 앤더슨이었다. 지난해 로에베의 수장이 되면서 가죽 소재의 진가를 발견한 그는 로에베의 데뷔 컬렉션에서 가죽 조각을 이리저리 이어 붙인 독특한 질감의 상의를 선보였고, 거기에 가죽 소재의 와이드 팬츠와 길게 늘어뜨린 오비 벨트를 매치해 전례 없는 독창적인 룩을 제안했다. 그의 개인 브랜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축 늘어지는 챙 모자부터 롱 스커트 같은 크롭트 팬츠들, 드레이핑 기법의 미니스커트와 크롭트 톱까지 가죽 소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어졌다. 이 외에도 정교하게 가죽 조각을 이어 붙이며 그 이음새 또한 하나의 장식으로 승화시킨 발맹과 지방시, 레이저 커팅 기법으로 가죽에 정교한 무늬를 새겨 넣은 구찌나 얇은 가죽 끈을 격자 무늬로 이어서 그물망처럼 만든 알투자라까지,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실험이 이어졌다.
이렇듯 제2의 피부처럼 쉽고 편안해진 가죽 소재는 더 이상 투박한 삶을 상징하지 않는다. 다양한 디자인과 스타일로 새롭게 거듭났고, 우리의 신선한 봄 스타일링을 책임질 핫 트렌드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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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박정하
- 포토그래퍼
- LEE HO HYUN, INDIGITAL, 심규보(Shim Kyu Bo), GETTY IMAGES/MULTIBITS, EVERETT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