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이 흐른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발레리나 김주원, 그리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노영심이 여름밤을 연주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세 명의 아티스트를 묶은 것은 나눔에 대한 공통된 시각과, 그 과정에서 비롯한 인연이었다. 탱고와 아리랑이었고, 즉석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도 했던 어느 아름다운 여름밤에 대한 기억.
지난 6월 19일 오후 6시, 피아노 한 대와 텅 빈 의자들만이 늘어선 홀 한복판에서 발레리나 김주원은 춤을 추고 있었다. 넉넉한 사이즈의 파란색 티셔츠 아래로 쭉 뻗은 다리와 팔, 그리고 기다란 목을 흘깃흘깃 훔쳐보며 그녀가 어떤 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지 알아채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 앞에는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앉아었다. 질끈 묶은 머리와 VT에서 익히 본 친숙한 부드러운 표정. 그녀가 연주 중인 곡이 ‘아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 곡이 끝났고,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음을 겨우겨우 목 끝에서 삼켰다. ‘아리랑’이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었나? 곡이 끝남과 동시에 김주원에게 호들갑스럽게 감상을 털어놓았다. 최근 본 ‘아리랑’의 무대 중에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아티스트들이 ‘아리랑’을 사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서 말이다.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기운과 정서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곡이잖아요. 언제 들어도 애절하고요. 이 아리랑은 ‘드뷔시를 주제로 한 아리랑’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드뷔시의 ‘달빛(Claire de lune)’과 ‘아리랑’을 접목해 영심 선생님이 만들었죠.” 대답을 마친 김주원이 토슈즈를 신고 홀을 거니는 동안, 뒤늦게 도착한 임선혜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럽 음악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바로크 음악계에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프리마돈나로 활약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 중하나다. 김주원과 노영심의 아리랑이 드뷔시를 주제로 했다면,임선혜가 선택한 아리랑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가곡 작곡가 안정준의 ‘아리아리랑’이다. 소프라노가 최대의 성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작곡한 ‘아리아리랑’은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화려하다. 피아니스트 노영심과 발레리나 김주원, 그리고 소프라노 임선혜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에 오른 그녀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다음 날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공연을 볼 기회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룹의 직원을 위해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세 가지의 색, 세 개의 꿈(Nocturne by 3 Artists)>이라는 이름의 여름맞이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이 무대에 한데 모이게 된 이유 또한, 박용만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용만 회장을 ‘용만 아저씨’라고 부르던 김주원이 그 인연의 시작을 들려줬다.
“용만 아저씨와 저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점차 친해졌어요. 영심 선생님하고는 ‘따뜻한 재단’을 통해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선혜 언니와 저는 영심 선생님 소개를 통해 알게 됐죠. 신기한 건 모두 종교가 같다는 거예요.” 같은 성당을 다녀 함께 묵주 반지를 맞췄다는 사실도 자랑다.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10년째 고아원 꿈나무마을을 지원하고,고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잇는 재단 ‘바보의 나눔’에 두산 그룹의 이름으로 매년 10억원을 기부하는 등 기부와 나눔의 행보를 꾸준히 이어온 박용만 회장을 비롯해 노영심, 김주원, 임선혜 역시 세상일에 관심이 많다. 유니세프의 홍보대사인 김주원은 크고 작은 기부와 봉사활동을 펼치는 한편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 중이고, 임선혜는 2009년부터 연말마다 명동성당에서 ‘임선혜의 희망나눔 콘서트’를 펼치고 있다. 노영심도 마찬가지다. 이주노동자를 무료 진료하는 라파엘 클리닉의 후원음악회에 참여하고, 앨범의 수익금을 기부하는 것을 비롯해 백혈병·소아암 환자, 입양아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석하는 그녀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재능기부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일 거다. ‘함께 재미있는 걸 만들어보자’는 박용만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번 여름 콘서트 역시 재능기부 형태로 이뤄졌다.
즉흥곡으로 선택한 것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였다. 이 순간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부드러운 여름밤의 공기처럼 다정하게 울려 퍼지는 즉흥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순간을 음미했다.
티켓 신청이 오픈 2분 만에 완료된 열기를 증명하듯, 공연 당일 콘서트 장소인 두산 Way 홀은 450명에 달하는 두산임직원과 그들의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으로 가득 찼다.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찾은 공연은 노영심의 오랜 동료이자 국내 유일의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인 전제덕의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 연주로 시작됐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준비한 공연이기 때문일까? 공연은 박용만 회장의 매끄러운 진행만큼이나 부드럽고 온화하게 흘러갔고, 무대가 펼쳐질 때마다 엄습하던 감동과는 별개로 친한 친구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관객들은 손뼉을 치고, 환호를 보냈다. ‘고음악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임선혜는 첫 곡으로 재즈를 택했다.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를 탄생시킨 조지 거슈인의 곡, ‘The Man I Love’와 ‘Summer Time’을 부른 그녀의 무대는 의외의 선물 같았다. 김주원이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인 이영철과 숨가쁘게 탱고를 추고, 이정윤과 창작 발레 ‘The One’의 무대를 펼칠 때는 객석도 함께 숨을 죽였다. 두 개의 아리랑 역시 리허설 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선사했다. 하지만 이날의 가장 아름다운 무대는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 박용만 회장이 공연을 신청한 직원의 사연을 듣던 차례에, 생일을 맞이한 직원을 위한 축하 공연이 즉석에서 펼쳐진 것이다. 마침 같은 날 생일을 맞은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즉흥 연주에 함께 참여하면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이 좋은 날을 위해 연주자들이 선택한 곡은 다름 아닌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이 순간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여름밤의 공기처럼 다정하게 울려 퍼지는 즉흥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순간을 음미했다. 아름답고 완벽한 이 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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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이마루
- 포토그래퍼
- 안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