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배우가 있을 수 있을까. 그 긴 필모그래피를 신뢰로 가득 채운 이 배우는 스타덤에 오른 지금도 여전히 진중하게 배우의 길을 이야기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류승룡은 또 한번 세상에 자신을 증명한다. 광해를 왕으로 만든 이 남자는, 도무지 흔들림이 없다.

슈트와 니트 스웨터, 셔츠는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슈즈는 프라다(Prada).반지는 불가리 비제로원아니쉬 카푸어(BulgariB.zero1 Anish Kapoor).

슈트와 니트 스웨터, 셔츠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
(Salvatore Ferragamo).
슈즈는 프라다(Prada).
반지는 불가리 비제로원
아니쉬 카푸어(Bulgari
B.zero1 Anish Kapoor).

소극장에서의 화보 촬영이 처음은 아니죠?
연극할 때 많이 했죠. 오랜만에 극장에서 촬영하니 고향에 온 것 같아서 좋네요. 조명에 비치는 먼지도 그대로고… 그래서 아침에 막내들이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하는 물걸레질이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광해의 심복이자 하선을 광해의 대역으로 세운 허균을 연기하죠. 허균을 어떤 인물로 생각했어요?
허균은 실존인물이죠. 아주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인 인물이고, 비운의 지략가였고, 선비이면서도 풍류가인 천재였죠. 품성도 강직하면서도 자유로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바로 그 당대의 천재 허균의 후손입니다만….
그래요? 몇 대손?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죠.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꿈꿨고요.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허균의 수 많은 업적과 모습들 중에서도 굉장히 예민하고 중요한 때를 그립니다. 나라를 걱정하면서도 나라를 개탄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물이죠.

시사회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영화에 웃음이 많다는 것에 다들 흥미로워하더군요. 그 웃음이 이미 시나리오 단계에서 계산되어 있었어요? 아니면 현장에서 배우들이 만들어낸 것인가요?
시나리오에 뼈대는 갖춰져 있었던 게 많고요, 배우는 그 뼈에 근육과 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죠. 그게 너무 과하면 체지방이 되는데 이번 영화는 꾸준히 운동한 것처럼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사실 좀 걱정을 했죠. 전작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워낙 웃겼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영화 끝날 때까지 한 장면에서도 정확히 웃지 않더라고요.
의도했던 바예요. 대신 눈에 이 사람의 올곧음과 깊이를 담아내려고 했어요. 우리 영화에는 상황의 아이러니에서 오는 웃음이 많아요.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대한 웃음도 그렇죠. 사실 우리 사회가 대부분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돌아가잖아요.

여배우를 제외하면 캐스팅이 모두 30대 이상의 남자 배우인데, 현장 분위기가 좀 달랐어요?
마음은 다 18세에 멈춰 있습니다. 나이는 많은데, 다 장난꾸러기였어요.

영화 속에서 허균과 하선이 점점 교감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 순서대로 촬영할 수는 없었겠죠? 이만큼 교감했다가 다시 경직된 분위기로 돌아가야 했을 텐데요.
익숙해졌어요. 모든 영화를 그렇게 찍으니까요. 제일 좋은 것은 처음에 마음속에 그래프를 짜는 것, 견고하게 설계를 하는 것, 감정의 배분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계산해서 그날 촬영이 어떤 것이든 그 감정을 집어내는거죠. 또 그런 게 배우에게 연기하는 짜릿한 맛을 주기도 해요.

첫 촬영과 마지막 촬영은 어떤 장면이었어요?
첫 촬영은 다행히 자고 있는 하선을 발로 차서 깨우는 장면이었죠. 맨 마지막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의 초반부에 나오는 광해가 총 쏘는 장면이었습니다.

추창민 감독은 현장에서 어떤 스타일이었어요?
어떤 얘기든 귀를 열고 들으세요. 그것을 자기 해석과 자기만의 어떤 신념으로 뚝심 있게 끌고 가죠. 저도 처음에는 너무 정석으로 가는 건 아닌가 하고 우려했었는데 역시 굉장히 뚝심 있고 장중하게 완성되었더군요 . 치우치는 모습이 별로 없는 과유불급의 미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모로 배우에게 매력적인 작품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의 마음을 가장 끈 건 무엇이죠?
허균이 아닌 다른 캐릭터가 들어왔더라도 이 작품을 했을 것 같아요. 모든 캐릭터가 자긍심이 생길 만했어요. 400년 전 시대를 빌려왔지만 현시대를 꿰뚫어 비유하는 통렬함이 좋았고요.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묵직하게 느껴지는 어떤 감동들…. 저는 시나리오에서 그걸 느꼈거든요. 관객들이 보고 다시 한번 느껴주길 바라요.

재킷과 스카프는모두 구찌(Gucci).

재킷과 스카프는
모두 구찌(Gucci).

사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관객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요. 하지만 그 점도 영화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진 않더군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좋은 리더에 대한 그리움이 있겠다 싶어요. 그러니까 눈물이 나오고 슬픔이 생긴 거예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무엇일까. 스스로의 비겁함에 대해 용기를 얻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할 거리를 가슴속에 전해주죠. 그런 뜨거운 감동이 조금씩 퍼지다 보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을 하면서 그런 아주 작은 바람을 가졌어요.

하선을 죽이고 싶지 않지만 죽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허균은, 이상주의자일까요? 아니면 현실주의자일까요?
허균을 굉장히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하선을 왕의 그림자로 세운 것도 반란의 목적이 아니라, 조용히 반대 세력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고요. 그러다 하선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속 깊이 생각했던 이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제안을 하게 되죠.

당신도 현실주의자인가요?
저는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예요. 현실을 바로 직시하죠.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저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판단이 굉장히 빠르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항상 작은 것에 감사하고,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게 현실주의자가 아닌가 싶어요.

이병헌은 “내가 이 영화에서 얻은 것은 류승룡이다”라는 말을 남겼는 데 말이죠. 영화 속에서 두 분이 끌어가는 장면이 굉장히 많죠. 두 분의 교감이 아주 중요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이병헌 씨는 너무나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하죠. 하지만 그 부분은 저희 두 사람이 해냈다기보다 다른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이 다 골고루 해준 것 같아요. 감독님도 아마 이 영화를 잊지 못할 거예요. 시나리오, 배우들, 스태프들, 제작 환경이 모두 완벽했으니까. 모든 영화가 그렇진 못하거든요.

<최종병기 활>에 비해서 체력 소모는 훨씬 덜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이번 영화가 <활>보다 훨씬 어려웠어요. 활은 비주얼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죠. 변발을 했고, 액션 장면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동적인 것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그 정도의 카리스마를 내야 하죠.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눈빛과 분위기로 긴장감을 유발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었습니다.

‘2인자로서 상대 배우를 받아주는 리액션에 치중한 연기를 하겠다’ 라는 말에 감독이 정말 고마워했다면서요?
하지만 분명히 제가 받아주기만 하지는 않았거든요. 내가 이렇게 줄 때 병헌 씨가 또 잘 받고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도 이선균 씨와 그런 짜릿한 맛을 봤는데 이번에도 그랬죠. <내 아내의 모든 것>이 탁구처럼 ‘딱딱딱’ 주고받았다면 이번엔 테니스처럼 ‘타악타악타악.’

극중 허균이야말로 가장 비밀이 많은 인물이죠. 가장 모호하게 그려지고요.
이번 영화에서는 넘치는 것보다 약간 모자란 게 낫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밥도 그렇잖아요. 적당하게 먹는 것이 좋죠. 과한 것보다는 약간 부족한 게 나은 것 같아요. 제가 만약 110을 연기하려 했다면 감독님은 90이 나온 지점에서 자꾸 오케이를 하는 거예요. 그 중간 지점을 찾는 작업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일지도 모르죠.

턱시도와 셔츠, 커머밴드,보타이는 모두 던힐(Dunhill).

턱시도와 셔츠, 커머밴드,
보타이는 모두 던힐(Dunhill).

당신의 필모그래피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누껴지지 않아요. 어울리는 역할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역할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은 정말 두려움이 없나요?
두려움 없이 사는 삶이 제일 두려운 것이겠죠. 늘 긴장감이 있죠. 아주 적절하고 필요한 긴장감들. 그게 과해지면 두려움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죠. 항상 그래요. 저는 두려워요. 겉으로는 자신감 있게 포장을 하지만 자기 내면과 싸울 때에는 ‘잘해낼 수 있을까’와 ‘넌 잘할 수 있어’라는 두 마음이 계속 공존하면서 긴장감을 만들죠.

어려운 역할을 즐기는 건 아니고요?
오히려 감사하죠. 저도 처음에는 악역으로 시작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래요. 배우가 어떤 역할로 한번 검증을 받으면 그 캐릭터로 한참 소모하다가, 이제 많은 사람이 충분히 봤다 싶을 땐 싫증을 내죠. 그런데 처음 검증받은 역할이 악역이었죠. 다른 게 하고 싶어도 악역만 들어왔었어요 사실.

그것이 연기를 잘하는 남자 배우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더군요.
<활>조차도 악역은 악역이었죠. <내 아내의 모든 것> 하고 그 다음이 허균인데요. 만약에 <내 아내의 모든 것> 없이 바로 허균을 했으면 이 배우가 ‘이것 저것 다 한다’라는 느낌은 못 받았을 거예요.지금 촬영 중인 새 영화에서는 정신지체를 앓는 아버지를 연기하죠. 배우에게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한창 상승세인 배우에게는요. 저는 그 기대감을 빨리 상쇄하고 싶어요.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그런 배우도 있고, 그게 또 맞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내 아내의 모든 것> 후에 다음에 ‘또 웃기겠지’ 기대했겠지만 허균으로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고, 허균으로 ‘묵직한 연기’를 보여준 후에는 다시 바보로 돌아가고. 그렇게 해야 제 스펙트럼이 넓어질 것 같아요. 그래야 관객들도 계속 다음 영화를 기대해주겠죠.

대중에게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배우인 셈이군요.
관객이 원하는 바로 그것은 너무나 감사하게 광고로 보여드립니다! 그런데 아마 작품에서도 그 이미지를 쭉 끌어가면 관객은 외면할 거예요. 관객은 아주 냉정하고 정확하죠. 오, 나 ‘관객심리학’ 강의 개설해야겠는데….

안 그래도 당신이 교수로 있는 학교의 소극장을 섭외하려고 전화했었어요.
오 그런데요?

이미 잡혀 있는 수업이 있다고….
아니 이것들이.

하하. 아닙니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거든요.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학생을 가르치는 건 당신에게 또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배우는 평생 배워야 되고 저도 현장에서 배워요. 배우가 배우를 가르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죠. 하지만 저는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고1 때 부터 연극하면서 왜 이런 걸 아무도 안 가르쳐주지? 싶었던 것들 말이죠.

연기를 전공했으니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은데요.
전인교육 시스템과 주입식 교육이, 예술을 하고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배우로서 어떻게 웃을까? 어떻게 울까? 인간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부분이 너무 달라져요. 전 연기가 좋아서 연기를 하다 보니 배우가 되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은 배우가 화려해 보이니까 연기 학원을 다녀요.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연기를 시작했으면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미치도록 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아요.

슈트와 타이는 모두 모노갤러리(Mono Gallery). 셔츠는니나 리치(Nina Ricci). 시계는불가리(Bulgari). 행커치프는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트와 타이는 모두 모노
갤러리(Mono Gallery). 셔츠는
니나 리치(Nina Ricci). 시계는
불가리(Bulgari). 행커치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직접 느끼고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때는 알 수 없는 이야기죠.
연기가 과연 취미냐, 아니면 진짜 직업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면서까지 할 수 있냐. 여기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줘요. 제가 연기 생활 하면서 터득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다 주고 있죠.

그 학생들처럼 스무 살 무렵, 당신의 가장 큰 고민은 뭐였어요?
저는 진짜, 연기에 미쳤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에 전형적으로 연극만 하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개구리바지에 야상 입고 등산화 신고 다니는 헝그리족.

연극영화과 과복처럼? 그땐 주로 어떤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만 하다 보면 맨날 연습하면서 세트도 만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외형적인 것이나 풍요로운 삶에는 덜 관심을 갖게 되죠. 황정민씨, 정재영 씨 모두 학교 동기인데, 우리 다 그런 거지들이었어요. 학교에서 맨날 자고 먹고 연기만 했죠. 어떤 대단한 포부를 가진 사람은 없었어요. 그냥 연기가 좋았죠. 거의 항상 주인공을 했던 것 같아요.

황정민, 정재영 그분들을 다 제치고 항상 주인공을 했군요.
반이 여러 반이니까, 그들도 주인공을 무척 많이 했죠!

최근 작품이 모두 잘되면서 ‘흥행의 신’이라는 말도 나오고, ‘인기’라는 것도 생겼죠. 뭐가 가장 달라졌어요?
예전엔 나 혼자 열심히 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나를 보여줘야 하는 바쁨이 생겼어요. 어떤 부분은 조심해야 하고, 어떤 부분은 무척 형식적으로 해야 하니까 양심에서 오는 증폭들이 있어요. 하지만 바쁜 건 똑같아요.

인터뷰가 부쩍 늘었을 텐데, 인터뷰는 좋아해요?
인터뷰하는 거 무척 좋아해요.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혹은 공부하지 않은, 혹은 업무가 너무 많은, 혹은 너무 자극적으로 써야 되는 이런 기자들하고 만나는 건 참 하기가 싫어요. 똑같은 질문은 할 수 있어요. 열 개 중에 다섯 개는 똑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열 개 중 아홉 개가 너무 구태의연하면 싫죠. 촬영장 에피소드? 관객 몇만 들 것 같아요? 그럴 땐 하기가 싫어요. 차라리 그냥 답변을 A4로 써서 주고 싶다니까. 이번에 그거 해보려고요 진짜로. 아, 그 질문이요? 그럼 거기 3번이요.

여기랑 여기 손가락으로 막 가리키고요?
아니면 답변을 카드로 만들어서 그냥 줄까? 아님 읽어줄까? 인터뷰도 서로 진심이 있고 잘 맞아야지, 이번 기사는 류승룡 해야 하니까 마지 못해서 한다면 저도 형식적으로 하죠. 지금은 아주 즐겁네요.

요즘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예요? 새로 찍는 영화의 현장, 집, <광해>의 홍보 현장 중에서.
집이죠. 집과 현장.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죠. 집이 편안해야 현장이 편하고,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내가 내 집을 지킬 수 있죠. 하지만 내일 또 새벽 촬영이 있어서 오늘은 현장을 선택하는 거고요.

아까 직업으로서의 배우는 달라야 한다고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네요.
그렇죠. 요즘은 취미생활이나 자아실현 혹은 자신의 힐링 정도로 연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이걸로 생활을 해야 하는 배우나 배우지망생은 모든 걸 다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기고만장하면 안돼요. 잘될수록 더 마음 깊숙이 늘 갖고 있었던 감정들을 끌어내는 감정의 노동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연기로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 베테랑 배우인 당신에게도 쉽지 않나요?
배우가 그 감정에 가보지 않으면 절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요. 사람들의 인생을 다 살아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관찰하고 간접체험하고 책을 읽죠. 책이 가장 좋아요. 좋은 영화 보고 좋은 공연 보는 건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같아요. 배우가 아니더라도요.

모든 게 너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서 뭔가 뜨거운 것이 안에서 올라 오는 느낌 있잖아요. 이번 영화에서는 언제였어요?
영화를 찍을 땐 늘 70~80명의 스태프와 함께하니까 분명히 막내들로 인한 실수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런 것에는 모두 다 관대해요. 어느 현장에나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실수들, 당연한 삐걱거림. 이런 것들은 다 있어요.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볼 때였어요. 모든 게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저 장면을 찍을 땐 이랬지, 저 때는 누가 다쳤지, 저 때는 누가 싸웠지. 같이 몇 개월 동안 고생했던 막내들 이름까지 쭉, 하나하나 올라가는 거 보면 안에서 막 뜨거운 것이 밀려오죠. 특히 이번 현장의 분위기는 좀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죠?
병헌 씨와 내가 처음으로 독대하는 장면이었는데 스태프들도 이병헌이 어렵고, 나도 어려워하고 또 감독님도 우리 둘을 어려워하고…. 서로 어려워서 생기는 긴장감이 있었어요. 저 둘이 어떻게 할까? 70명의 스태프가 개미소리 하나 없이 다들 숨죽이면서 보고 있는 긴장감이, 저는 그게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일부러 편하게 대해요? 아니면 그냥 그렇게 두나요?
이번에는 철저하게 그냥 두었어요.

그 긴장감을 이용했군요.
이용했어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허균과 하선은 그런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정이 생겨야 하고요. 영화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지점에서 서로 정이 생겨서 나중에는 편해졌죠.

모든 장면과 모든 연기가 다 중요하겠지만 모든 작품에는 배우에게 결정적인 한 장면이 있을 것 같아요. 목숨 걸고 해내야겠다 싶은 장면 말이에요.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백성들을 빨아먹는 저들을 용서치 못하겠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 드리리다.” 이 대사를 하는 장면이었죠. 이건 정말 엄청난 것이죠. 정말 왕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내가 광해 죽이고 너를 왕으로 세우겠다는 얘기잖아요. 율도국 같은 세상, 한번 해볼래? 하나만 죽이면 돼. 이거 얼마나 무서우면서 뜨거운 얘기예요?

하선에게 인사를 하는 단순한 장면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고요.
사실 그 장면은 두 가지로 찍었어요. 하나는 나만 인사를 하고, 또 하나는 중전이 내 옆에 서 있죠. 그 엔딩에 따라 영화의 메시지가 달라질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장면 찍을 때 느낌이 왔어요. 아 왔어 왔어, 요거 요거 엔딩이야 엔딩. 배우를 하다 보면 또 그런 촉이 생겨요.

올해, 모처럼 한국영화가 아주 잘되고 있어요. 배우들도 고무적일 것 같은데요.
올해만 4백만 넘은 영화가 벌써 7편이거든요. 정말 어마어마한 거예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다시 오는 것 같아서 아주 기대가 됩니다.

시사회 반응이 너무 좋아서 개봉일을 앞당겼다죠?
아직 개봉 전이니 어떨지 모르죠. 굳이 개봉일을 당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흥행하길 바라진 않아요. 또 그런 방식이 영화의 가치와는 조금 안 맞는 것도 같고요.

당신에게선 굉장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언제나 그래요?
직업병인 것 같기도 한데, 영화에 쏟아붓기 위해서 하이 퀄리티 에너지는 꽁꽁 숨겨두는 편이고, 평상시에는 그 잉여 에너지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