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책
시간의 속성은 묘한 것하다. 당장의 큰 일도 한 달쯤, 일 년쯤 지나보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시간의 속성은 묘한 것하다. 당장의 큰 일도 한 달쯤, 일 년쯤 지나보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기억은 디테일을 잃고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몇 가지 큰 사건으로만 한 해, 한 해를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 중의 많은 것들은 잊혀진다. 그렇게 퇴적된 시간이 역사가 되고, 역사는 다시 몇몇 중요한 장면으로 남는다. 한 장 한 장을 그렇게 뜨거운 사건들로 채우는 책이 있다. 기록하는 책이고, 기억하는 책이 남아서 과거의 일들을 읽어준다.
<사진으로 보는 ‘타임’의 역사와 격동의 현대사>는 여차하면 흉기로 쓸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두껍다. 제목 그대로 1923년 창간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역사와 <타임>이 기록한 현대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책이다. 저널리즘 매체로서 <타임>의 자부심은 그들의 유명한 슬로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타임이 말해줄 것이다(Time will Tell).” <타임> 편집부는 자신의 위용도 보여줄 겸, 잠든 자료들에게 다시 세상 빛을 쐬어줄 겸, 보관소에 잠들어 있기는 너무 아까운 사진과 기록을 꺼내고, <타임>의 위대한 편집자들의 기억과 <타임> 속의 글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들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비주얼 자료는 21세기 현대사 – 교과서보다 훨씬 재미있는 – 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편집자로서 <타임>이라는 잡지가 점점 틀을 잡고, 저널리즘의 표본이 되어가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누가, 왜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고, 그해의 특집 기사가 무엇이고 누가 올해의 인물 타이틀을 차지했는지 살피는 일은 두꺼운 책을 베고 잠들 때까지 책에서 손을 떼어놓지 못하게 만든다. <타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올해의 인물’은 1928년에 시작했고, 그 첫 번째 인물은 단독으로 대서양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였는데, 사실 그 ‘올해의 인물’은 일종의 ‘땜빵용’ 기사였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미리 찰스 린드버그의 기사를 싣지 못한 편집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것에서 전 국민이 궁금해하고 기다리는 위대한 꼭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사진이 실려있다. 21세기 미국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증명이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그때 <타임>은 케네디의 죽음을 표지에 싣지 않았다. 창간 이래로 죽은 사람의 이미지를 표지에 올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변하고, 예외는 있다. 몇 해전 <타임> 은 마이클 잭슨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고 이달 막 발행된 <타임>의 표지는 젊은 날의 스티브 잡스다.
시사적인 내용보다 더욱 문화적인 내용에 집중하는 책은 편하게 읽기 좋다. <타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Rolling Stone 500 Great Songs>는 <롤링스톤>이 선정한 500곡의 위대한 곡과 사진자료, 곡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미지가 가득한 이 책을 덮고 <100권의 금서>를 꺼내면 701페이지짜리 책 한 권에 담긴 거대한 텍스트에 놀란다. 금지된 책의 문화사를 보여주는 이 책은 역사적으로 금서 목록에 올랐던 100권의 책을 조명하고 있다. 금서가 되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 정교적 이유, 성적 이유, 사회적 이유의 네 가지였고 저자들은 어떤 책이 왜 금서가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설명한다. <화씨 451>, <호밀밭의 파수꾼> 역시 한때는 금서였다. 지금은 모두 죽기 전에 읽어야 할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임에도 말이다. <패션, 문화를 말하다>는 패션으로 20세기의 문화를 읽는 책이다. 패션은 인간의 욕망과 자기 표현의 수단이기 전에 문화와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사회, 정치, 디자인, 미술, 음악 등의 서로 다른 영역들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패션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성장해왔다. 이 책은 1900년을 시작으로 10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패션과 문화의 오랜 연애 관계를 들여다본다. 쏟아지는 패션을 다룬 책 중에 가장 지적이고, 비주얼 자료도 훌륭하다. 패션 역사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기록하는 책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지난 시간을 읽어준다. 모든 책은 기록의 역할을 자청한다.
1.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김지수
<보그>의 피처 디렉터 김지수는 시를 읽는 것이 가장 가난한 사치라고 이름 붙였다. 좋아하는 시를 골랐고, 여느 때처럼 견고한 이성과 섬세한 감정을 섞어 글을 지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페이지원
2. <칼과 황홀> 성석제
작가 중에는 미식가가 많다. 성석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꾼 성석제의 본격 음식 이야기. 국내와 해외를 종횡무진하며 마주친 풍경들과 혀끝의 기억이 한데 어우러진다. 인생의 본능적인 허기를 건드린다. 문학동네
3. <그림과 그림자> 김혜리
김혜리의 눈은 사려 깊고, 표현은 조심스럽다. 그녀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사람을 읽다가 이제는 그림을 읽어준다. 이제야 제대로 그림 읽는 여자를 만났다. 앨리스
4. <파라노이드 파크> 블레이크 넬슨
성장 소설치고 재미없는 책은 없지만 이 책은 조금 더 특별하다. 죄와 구원에 관한 아름다운 청춘의 기록을 담았고, 성장소설 중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중이다. 구트 산 반트 감독은 빠르게 이 책을 집어 들고 영화화했다. 내인생의책
5.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에쿠니 가오리 외
일본의 작가들이 ‘유럽, 맛’을 주제로 단편 소설을 썼다. 분명 인물도, 작품의 정서도 주제도 일본풍인데 배경만은 철저히 유럽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일본 음식이 돈가스였나. 술술 읽히지만 어쩐지 기묘하다. 시드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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