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 세계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매력과 로망은 지금도 유효하다. 모든 걸 버리고세계 여행을 떠날 용기는 없는, 소심하고 성실한 당신도 방 안에서 떠날 수 있다. 이 세계가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방구석 여행을 위해선 큰 트렁크 대신 큰 책장 하나가 필요했다.

부릉부릉 시동 걸기
방 안에서 떠나는 세계 여행도 준비할 것은 있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디부터 돌 것인가? 물론 책 속에 답을 찾을 수 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여전히 여행에 관한 가장 낭만적인 상상을 제공한다. 부와 매력을 갖춘 한 신사가 호기롭게 내기를 하고, 여행 중 사랑에 빠진다. 마지막에 전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날짜변경선을 계산하지 않아 결국 내기에서 이겼다는 극적 결말은 어떤 할리우드 영화도 따라잡을 수 없는 쾌감이 있다. 내기 끝에 세계 여행을 떠나는 거룩한 계보는 <기발한 세계 일주 레이스>로 이어진다. 하버드 동창생이며 미드 작가로 일하고 있는 두 친구는 LA에서 출발해 한 명은 서쪽, 한 명은 동쪽으로 떠나는 세계일주 레이스를 시작한다. 우승 상품은 스카치 위스키.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마주치는 사건, 사고, 풍경이 정신없이 펼쳐지지만, 그만큼 현장감은 살아 있다(부산에도 다녀갔다!).

세계 여행이 시간과 돈과 마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떠날 수 있는 것이 되자 ‘비행기 때문에 여행의 낭만이 다 사라졌다’라고 투덜대는 세스 스티븐슨 같은 사람도 생겨났다. 그는 ‘비행기를 타는 건 여행에서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다. 물론 때로는 매우 쓸모가 있다. 하루 만에 시카고 출장을 다녀올 수 있고, 2주 동안 뉴질랜드에서 휴가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도 분명히 있다’며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은 150일간의 세계 일주>를 시작했다. 그의 여행법은 여행에서 가장 좋은 순간이 공항 리무진 타고 공항으로 향할 때라고 믿는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기차, 버스, 자전거, 배로 떠나는 느리고 낭만적인 세계 여행을 위해 변호사인 여자 친구도 덩달아 사표를 냈다. 집 떠나면 고생길이라는 오래된 격언과 떠나봐야 안다는 여행의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은 함께 먼 길 떠나는 독자를 배려하듯, 물리적인 무게가 아주 가볍다. 작가는 이 책으로 해마다 치열한 선발끝에 발행되는 <미국 최고의 여행기> 시리즈에 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

굳이 사서 고생하는 세계일주가 맞지 않다면 <서른 살의 일요일들>이나 <여행의 여왕>을 권한다. <서른 살의 일요일들>은 엄밀히 따지면 세계 여행 책은 아니다. 유럽 대륙을 가지 않았기 때문인데, 대신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행이 잘 나와 있다. 김정화가 쓴 <여행의 여왕>은 생생한 세계 여행 책으로 2년간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긴 여행의 기록이다. ‘대망(!)의 삽질 제3탄은 중국 국경에서였다. 망할 놈의 비자 때문에 일이 계속 꼬이자 나는 오만 가지 정이 다 떨어져 전격적으로 중국을 뜨기로 했다’는 식의 직설적인 문장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 찬 여행책 때문에 오그라든 손가락을 시원하게 펴준다.

북미와 남미 사이
<세상 끝의 사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마이클 커닝햄의 <아웃사이더 예찬>은 작가가 미국의 소도시 프로비던스에 머물며 쓴 책이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을 수 있고, 그 조개로 멋진 수프를 끓일 수 있는 마을. ‘여기서는 파도가 절벽을 치지 않으며, 독수리가 하늘을 맴돌지도 않는다. 소박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곳은 뉴멕시코 사막이나 핀란드 호수에 더 가깝다. 만과 수평선과 모래언덕은 모두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어 이곳의 사상을 드러낸다. 이곳은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소리없이 외치고 있다.’ 언뜻 심심하게 느껴지지만,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이 마을에 마음을 주게 된다. 작가는 이곳을 나이 든 보헤미안에 비유한다.

보헤미안 감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에릭 메이슬의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도 생각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가 여전히 펄떡이는 보헤미안의 심장이라면, 프로빈스타운은 지혜로운 눈을 떠오르게 한다.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과 한때 친했고, 여전히 특이하게 옷을 입고 다니며, 여전히 가난을 무시하며 살고 있으며, 여전히 영웅적인 낙관주의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하고 있는 마을. 게다가 왕년에 놀아본 어른들처럼 늘 여유를 가지고 있는 마을 이야기는 미국을 다시 보게 한다. 뉴욕에 대한 책은 너무나 많아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오래된 책이지만 장 자크 상페의 <뉴욕 스케치>는 파리 사람이 느끼는 뉴욕을 유머러스하게 말해준다. <뉴요커>의 기자인 에덤 고프닉은 파리 체류기 <파리에서 달까지>를 쓴 후 귀국해서 뉴욕 지식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뉴요커, 뉴욕을 읽다>를 펴냈다. 뉴욕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뉴욕에서 미식가가 된다는 것, 뉴욕에서 글을 쓴다는 것과 뉴욕에서 뉴요커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적혀 있다. 약간의 동경이 더 필요할 땐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을 읽는다. 뉴욕을 건축으로 여행하는 이 책은 뉴욕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설렘과 지적 호기심이 조화를 이뤄 좋다. 이 책을 들고 브라운스톤 건물을 찾아 다니고 싶어진다. <뉴욕은 언제나 공사 중>은 뉴욕의 일상을 다섯 가지 공간으로 나눴다. 호기심 많은 커플은 ‘뉴욕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라는 것에 주목한다. 저자를 포함한 8명의 뉴요커가 들려주는 집과 생활에 관한 인터뷰가 실려 있는 부록도 재미있다.

미국 여행은 곧 대도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봐야 할 곳은 아직 많다. 여행기로 ‘빌 브라이슨’이라는 거대한 브랜드를 세운 빌 브라이슨은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기>를 썼다. 하도 이리저리 다녀서 그가 어느 국적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빌 브라이슨은 미국인이다. 남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렇게 빈정댔는데 과연 자신의 고국을 여행하는 건 어땠을까? 물론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번에도 엄청 투덜거린다. 서부를 여행할 땐 이렇게 적었다. ‘남자들은 위험해 보이고, 여자들은 맛이 가 보였다. 나는 유랑자들의 땅에 접어들고 있었다. 공상가, 실패자, 부랑자, 정신병자들, 미국에서 이들은 언제나 서부로 간다. 뭐 일이 잘 안 풀리면 언제든 연쇄 살인범이 될 수도 있고. 동부로 가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게 신기하다.’ 투덜거림의 매력은 과연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것에 있다.

<나를 부르는 숲>은 미국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숲, 그중에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내용이다. 동행한 친구 덕분에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의 가장 웃긴 책이 되었다. 1947년에 쓰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국 여행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그녀는 여러 대학과 학회에서 초청을 받아 미국 순회 강연을 했는데 이때의 경험과 인상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미국 여행기>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며 뿌리 깊은 유럽인이 바라본 미국. 생동하는 신대륙에 대한 호감을 느끼는 동시에 미국 전역에 퍼져 있던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신기한 것은 무려 5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미국을 떠나면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에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곳이 열렬히 그리워질 거라는 것만은 확신한다고.

미국에 대한 수많은 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남미에 대한 책은 적다.우리 나라에서 멀어도 너무 먼 이 대륙은 그래서 더 여전히 신비로움과 흥겨움을 간직하고 있다.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헤밍웨이, 파나마 모자가 있는 곳. 내친김에 <쿠바의 헤밍웨이>부터 집어 들었다. 헤밍웨이를 좋아한다면 더 흥미롭겠지만, <무기여 잘 있거라>가 박상민의 노래 제목인 줄만 아는 사람도 이 책을 통해 쿠바의 매력을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다. 쿠바 사람들에게 ‘파파’라고 불리며 여생을 쿠바 사람으로 살았던 그는 낚시를 하고, 수많은 친구를 사귄다. 결혼하고 연애하고 이혼하고 또 결혼한다. 그는 지금도 쿠바인들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미국인이며, 쿠바를 여행하는 모든 사람의 키워드다.

비트 문학의 우상인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미국 서부 여행과 멕시코 여행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학을 자퇴하고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캐시디 등과 함께 미국 서부 및 멕시코를 횡단한 체험을 토대로 쓴 책이다. ‘기성 세대에 대한 도전’, ‘자유’와 같은 중요한 가치들이 이 여행책 한 권의 무게를 더했고, 전후 ‘뉴 제너레이션’을 읽는 지표가 되었다. 이 두꺼운 책을 3주 만에 쓴 것은 문학사의 전설로 남았다. 정말 여행과 글에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종모의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는 매 장마다 방랑의 미학이 담겨있고, 박미로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남미 6개국의 12개 도시를 돌면서 쓴 남미 집중 탐구 생활이다. 현직 에디터 박미로가 마감과 마감 틈에서 길어 올린 이 책은 감상뿐 아니라 역사, 문화, 이념과 같은 배경지식을 버무려놓아 더 흥미롭다. 세계적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 영화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등의 인터뷰를 읽는 행운도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30여 년 전 칠레에서 일어난 쿠데타의 암호다.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은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학장인 대니얼 애버릿이 아마존 정글에서 생활하면서 기록한 모험은 원숭이 뇌만 안 먹을 뿐, 인디아나 존스가 따로 없으며 진정한 야생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남미 여행의 바이블과 같은 책을 빼놓아선 안 되겠다. 그 책은 물론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체 게바라’가 되기 전 전도유망한 젊은 의대생인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 쿠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거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 9개월간의 긴 여행은 많은 사람의 심장을 뛰게 했다.

아시아, 아름다운 나의 대륙
우리는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으로서 보편타당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쌀을 먹는다거나, 젓가락을 쓴다거나, 예의를 차리는 일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세심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일본에 대한 책은 비엔나 소시지처럼 끝도 없이 나왔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도쿄3S>, <도쿄를 부탁해>, <일본 겨울 여행>, <비욘드 오사카 고베 그리고 교토>. <도쿄3S>의 3S는 일본 음식 문화의 큰 축을 담당하는 사케, 스시, 소바를 테마로 일본을 여행하는데 페이지마다 침이 고인다. <도쿄를 부탁해>는 평범하고 알찬 도쿄 여행을 구현한 책이며 <비욘드 오사카 교토 고베>는 여행자의 시선과 현지인의 생활을 교차시키며 균형을 잡아준다.

<일본 겨울 여행>은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일본에서 대표적인 겨울의 고장으로 손꼽히는 추부, 도호쿠, 홋카이도 등을 여행한 책이다. 어른 키만큼 쌓이는 눈, 그사이를 달리는 기차, 따스한 온천, 오래된 료칸의 이야기는 여행 로망 리스트에 ‘겨울의 일본’을 한 줄 더 적게 만든다. 카투니스트 이우일과 현태준이 공동작업한 <현태준 이우일의 도쿄 여행기>는 지극히 유쾌하다. 게다가 오타쿠들의 남다른 여행도 엿볼 수 있다.

인기도 면에서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 홍콩에서 특별히 권하고 싶은 책은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홍콩, 영화처럼 여행하기>이다. ‘홍콩 영화 키드’이자 <키노>,<필름2.0>,<씨네21>의 영화 기자인 주성철이 홍콩 영화의 명장면과 여행을 끝말잇기 하듯 쓰며 홍콩의 장소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계단이 장국영이 울던 곳이라니. 홍콩의 어디가 맛있는지, 어디가 좋은지에 대한 책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사람들에게 홍콩을 또 여행해야 할 이유를 준다.어디가 맛있는지, 어디가 좋은지, 뭘 해야 하는지 아직 감이 안 오는 초보 여행자라면 <홍콩을 걷다>로 홍콩을 점령할 수 있다.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대한 서양인의 시각이 궁금할 땐 <마이클 크라이튼의 여행>을 읽어보길. 젊은 시절 여행깨나 다닌 스릴러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주창한 ‘체험적 여행’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외의 지역을 발견한 책도 있다. <바닐라향 마닐라> 같은 책인데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면서 마닐라라는 도시에 대한 은근한 고백이다. 사진작가 오철만의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만난다면>은 인도 중에서도 가장 인도적인 바라나시의 숨은 매력을 털어놓는다.

미국에 빌 브라이슨이 있다면 동양에는 후지와라 신야가 있다.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동양 기행> 등 동양 여행을 꽉 잡고 있는 그다. 특히 두 권으로 출간된 <동양 기행>은 1980년에서 1981년 사이 4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이스탄불, 시리아, 파키스탄, 캘커타, 티베트, 미얀마, 태국, 상하이, 홍콩, 서울, 일본 등 동양의 구불거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수많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썼다. 신기하게도 터키 여행을 쓴 책치곤 재미없는 책이 없다.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처럼 이곳에는 수상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는 미노가,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는 일본인 작가인 시부사와 사치코가 썼다. ‘나는 왕복 택시비 2백만 리라를 과감하게 지불하고 그곳에 갔다. 산 위에 카페가 하나 있을 뿐 아무것도 없고 바람이 무척 강하게 불었지만, ‘악마의 식탁’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아름다운 에게 해의 풍경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나는 악마 몇 명이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풍을 즐기고 있는 만화 같은 광경을 상상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문체와 상상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치코의 책은 터키 여행이 조금 두려운 사람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치코는 여자 몸으로 혼자서, 그것도 버스만 타고 터키를 일주했으니 말이다. 여행 책은 아니지만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이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쓴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을 매혹적으로 그리고 있다.

유럽의 많은 이름
유럽 여행은 보통 프랑스와 런던에서 시작하기 마련. <마크 트웨인의 여행기> 속 유럽 여행도 그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한 건 유럽인들의 여유였다. 특히 밥을 몇 시간씩 먹는다는 것. 그리고 금세 동화된다. ‘우리 일행에 일어난 변화는 놀랍다. 점차로 우리의 성급함을 잃어버리고 주위의 고요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태도에 깃들인 평온함에 빠져들어간다’. 그러곤 여행을 통해서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인문학자 정수복은 늘 가장 멋진 프랑스를 기록한다. <파리의 장소들>에 이어 지난달에 출간한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을 냈다. 젊은 감성으로 여행하는 에릭 메이슬의 또 다른 책 <보헤미안의 파리>는 여행자의 새로운 파리 여행법을 제안한다. 소설가 신이현이 쓴 <알자스>는 거듭된 전쟁으로 프랑스령이면서도 독일의 영향을 받은 목가적인 지방 알자스에 대한 충실한 책이다. 알자스는 그녀의 시댁이다. 피터 메일이 <프로방스에서의 1년><언제나 프로방스>를 쓴 후, 세계의 독자들이 피터 메일이 사는 뤼베롱 지방의 집을 그렇게 와서 구경했다고 한다. 그 기분을 <알자스>를 읽으면서 느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키스키가 여행기를 남겼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의 전집이 출간되면서 뒤늦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이 <영국 기행>이다. ‘런던의 안개는 한바탕 짙은 꿈과도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 바람과 비와 서리로 <운명>을 개조하기에 딱 좋다. 눅눅하고 노르스름한 안개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담을 핥고, 사람들과 나무를 감싸고, 그들의 폐로 침투한다. 안개는 서서히 솟아오르며 넬슨 동상을 지워버린다.’ 작가는 뛰어난 문장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영국을 여행하지만 그 여행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그 시기가 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아주 특별한 여행기 한 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영국 여행의 진짜 매력은 시골에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맨입으로 떠나는 일러스트 여행 : 영국> 은 두 일본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리며 유럽을 여행하는 책인데, 그 시리즈 중 가장 훌륭한 것이 바로 영국이다. 작가들은 영국의 구전 동화집인 ‘마더 구스’를 테마로 영국의 작은 마을을 여행한다. 읽다 보면 이건 정말 완벽한 여행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영국 시골 여행은 무조건 B&B에 묵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노하우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곳곳이 매력적인 곳이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보다 훨씬 먼저 출간되었고, 콘셉트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훨씬 나은 <이탈리안 조이>는 이탈리아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 불을 지피고, <비바 베네치아>는 숙박비가 비싸 길어야 하루 머물고 마는 베네치아를 돈 걱정 없이 머물게 해준다. 이탈리아에서 머물면서 여행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과 행복을 약속하는지 궁금하다면 김영주의 <토스카나>를 보면 된다. <이탈리아의 꽃 피렌체>를 봤을 땐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이 도시가 둥그런 지붕의 두오모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책이 있다는 게 너무 다행스러워서였다. 그리스에 관한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굴라쉬 브런치>는 동유럽이 단지 예쁘고, 물가가 싼 곳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유럽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행지라고 생각하는 크로아티아에 대해선, <크로아티아 블루>뿐.

여행에는 늘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곳을 원한다. 유럽 여행의 바람이 이제 북쪽으로 불고 있다. 어느 어느 작가가 북유럽에 다녀와 책을 쓰고 있다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작년에 출간된 <나만 위로할 것><노르딕 라운지>는 북유럽을 미리 여행하기 좋다. <나만 위로할 것>은 글로 북유럽을 적어 내리고, <노르딕 라운지>와 <윈터 홀릭>은 사진과 디자인으로 겨울이 긴 그곳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멀고, 위험할 수도 있고, 온 지구에서 가장 야생이 살아 있는 곳이기에 여전히 특별한 여행지다. 그건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라서, <페스의 집>을 쓴 부부가 호주를 떠나 이곳에 집을 사서 정착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다 미쳤다고 한다. 아름다운 중세 도시 페스에서 정원에 라임나무가 자라는 전통적 양식의 집인 리아드를 사고 개조해서 정착하는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이국적이다. 번역가와 작가로 유명한 김화영이 쓴 <알제리 여행>은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정면 충돌한 알제리를 말해준다. <이방인>의 카뮈가 태어나고 앙드레 지드가 영향 받은 알제리의 곳곳을 찾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 나라를 이해하게 된다. 작가는 여행을 하며 깊게 묻는다. “보다, 라는 동사. 이 동사의 중요함을 우리는 정말 충분히 실감하고 있는 걸까?”

<앙드레 지드의 콩고> 여행은 거의 100년 전에 썼지만, 지금의 우리가 보고 기대하는 아프리카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순수하고 웅장한 원시의 모습과 그 대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파괴하는 사람들의 인간 군상도 그대로다. 아프리카 전체를 개괄하듯 읽고 싶다면 <아프리카 트랙>만한 책을 찾기는 힘들다. 알렉상드르와 소냐 푸생 부부는 두 발로 걸어서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했다. 무려 3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전쟁과 기아, 에이즈로만 대변되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아프리카를 체험하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과 동아프리카 대지구대를 따라 걸으며 최초 인류의 여정을 좇는 인류에 대한 근원적 호기심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이 책은 아프리카에 관한 가장 정직한 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이집트를 안 들를 수도 없는 일. ‘카이로는 유럽처럼 구시가지를 격리 보호하고 박제화하지 않는다. 카이로의 구시가지는 과시와 전시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카이로를 헤매 다니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의 유물을 맞닥뜨리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거리를 걷다 난데없이 발 밑에 14세기 아미르 야시바크의 궁전 폐허가 밟히는 식이다. 궁전 지하에는 대체 어쩌다 그곳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모를 낡은 포드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카이로: 람세스·살라딘·나폴레옹이 사랑한 도시>,<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은 모두 비밀을 간직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 아낌없이 적고 있다. 카투니스트 이우일이 아내 선현경과 결혼해서 303일간의 신혼 여행을 떠나고 쓴 책의 제목은 원래 <도날드 닭 피라미드에서 롤러스케이트 타다><도날드 닭 에펠탑에서 번지점프 하다>였다. 제목처럼 책 속에 이집트 이야기를 아낌없이 할애하고 있는데, 나중에 딸이 제법 크자 다시 <이우일, 카리브 해에 누워 데낄라를 마시다>도 냈다.

축구 대륙으로 따지면 우리와 한 몸인 오세아니아를 돌아야 비로소 세계 여행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다. 아쉽게도 뉴질랜드와 피지는 아예 여행 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누구든 어서 써주길 바란다. 꼭 피지와 뉴질랜드를 읽어야 한다면 여행 잡지 <오프>의 과월호를 구입하는 게 최선이다). 시드니는 <휴가지의 진실>, <서니사이드 시드니>를 들고 여행하면 된다. <휴가지의 진실>은 작가와 도시 시리즈의 중 하나로 시드니에서 오래 산 작가가 경험하고 꿰뚫어본 시드니가 담겨 있고, <서니사이드 시드니>는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시드니가 담겨 있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 Jung 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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