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시작할 때, 그 눈부신 날들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헤어짐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잘 헤어질 수 있을까?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 앞으로의 인생을 여자로 살고 싶은 남자 로렌스와 그를 사랑하는 프레드의 12년에 걸친 만남과 사랑, 이별을 담았다. 배우 겸 감독 자비에 돌란이 연출했다.

시작할 때도 늘 끝이 두려웠다. 어떤 사람들은 매번 연애할 때마다 영원을 꿈꾸기도 하던데, 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언젠가 내게 다가올 이별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보다는 ‘두 사람은 열정도 시들고 서로에 대한 실망감이 깊어져 헤어졌습니다’ 쪽이 더 현실성이 있었다. 그가 떠나는 건 무서웠다. 내가 떠나는 건 끔찍했다. 실제로 마주한 이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별은, 적어도 어느 한쪽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수많은 이별을 목도했다. 이별의 얼굴은 모두 달랐다. 먼저 ‘싸움’이 있었다. 이별은 두 사람이 뛰어드는 감정의 전장이 되곤 했다. 그곳에서는 사소한 실수도 칼이 되었다. 각자 칼과 창으로 서로를 찔렀다. 가끔은 말을 더 잘해서, 덜 잘못해서 승자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을 것도 없었다. 친구들의 이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뺨을 맞거나 전화기를 부수고, 분노한 남자친구 차에 억지로 태워져 몇 시간 동안 원치 않는 드라이브를 하는 일도 생겨난다. 어느 뒷골목에서 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한 시간 내내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뭐가 그렇게 억울했던 걸까? ‘싸움’은 나 자신과 상대의 밑바닥을 낱낱이 드러낸다.
어떤 이별은 ‘침묵’으로 온다. ‘침묵’은 겉보기엔 평온하다. 하지만 만약 한쪽이 일방적으로 ‘침묵’을 선택한다면, 다른 한쪽이 그 침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별의 방법으로 침묵을 선택한다. 시쳇말로 ‘잠수’다. 당하는 입장은 어느 날 갑자기 문자도, 전화도 없고, 연락이 되지 않는 연인에게 당혹스러울 뿐이다. 이별의 신호를 되새겨보며 올 것이 왔을지도 모른다고 여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인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그에 준하는 큰일이 생겼을 거라며 걱정한다. ‘차마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침묵을 택한다고 하지만 이건 상대방을 기만하고, 감정적으로 서서히 매장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차라리 어느 미드에서처럼 ‘포스트잇’ 이
별을 하거나, 메신저 속 몇 마디라도 건네는 게 낫다. 요즘은 ‘카톡’으로도 한다더라.
이별을 계속하면, 여린 심장에도 굳은 살이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이별에 대한 경험’이 쌓여갔다. 좋은 이별의 전제는 어쨌든 연애의 두 주인공이 ‘합의’를 보는 것이다. ‘헤어지자’로 시작해서, ‘그래 헤어지자’까지, 그게 합의다. 그 합의는 단 몇 분 만에 끝나기도 하고, 며칠이 걸리고 또 몇 번을 반복하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이별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이라면 온 맘을 다해 잡아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 한다. 언젠가 헤어진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헤어졌을 때 나는 미칠 것 같았지. 그래서 헤어지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 네가 안 받을 줄 알았어. 그런데 넌 늘 받더라. 그러고선 내 맘 안다고,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지. 그때는 그 말도 미웠는데, 괜찮아지더라고.”
서툴렀던 20대를 지나 30대의 연애를 하면서, 이별 장면은 좀 더 평화로워졌고, 점차 간단해졌다.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순정, 네가 아니면 죽겠다는 치기도 대부분 사라졌고, 이제는 그런 이별쯤은 다 아는 사람끼리 연애의 끝을 가다듬는다. 추가 실점을 허락할 수 없는 마무리 투수처럼 말이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에는, 가장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이 등장한다. 서른다섯 생일을 맞으며 남은 생을 ‘여자’로 살기를 결심한 로렌스. 그런 그를 계속 사랑하기로 결심한 프레드. 그러나 여자와 여장남자가 된 그들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녹록할 리 없었고, 소울메이트였지만 끝내 헤어진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등에 새긴다. ‘건강을 지킬 것. 위험을 피할 것. 과거를 잊고 희망을 가지겠다고 당신 이름으로 맹세해.’ 요컨대 프레드와 로렌스는, 뼈를 깎는 슬픔을 참으며 마지막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으로 채우는 데 쓴다. 하지만 이들의 이별은 이상적일 따름이다. 충만함으로 이들의 아름다운 이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공통적이었다. ‘오그라든다’는 거였다. 이들처럼 이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한때 우리가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예의는 다할 수 있다. 고마웠다고 말할 수도 있고, 잘 지내라고 말할 수도 있다(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은 하지 말자. 분노만 높일 뿐이다). 사귈 때 서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존재한다면,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연애의 종말을 고한 후, 우리는 또 한번의 연애를, 지난 연애를 보관하는 서랍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든, 쓸쓸함이든, 후련함이든 각자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