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계절에 술병을 꺼낸다. 책에 빠져들고, 술에 취하며 조용히 가을로 녹아들기 위해. 읽고 마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추천한 술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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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앙 비베스의 <염소의 맛>과 부라더 소다.

민트빛 상상 속으로
<염소의 맛>은 수영장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순간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그래픽 노블이다. 척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한 남자가 거기서 여자를 만나 약간의 호감을 갖기 시작하는데, 그 무렵부터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싱거운 줄거리가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부라더 소다와 닮았다. 푸르고 투명한 수영장 장면도 민트빛의 부라더 소다를 연상시킨다. 참고로 애주가라면 보드카를 한 샷 정도 섞어서 마셔도 좋다. 그래도 부라더 소다의 연하고 청순한 맛이 유지된다. – 유대란(매거진 <책> 수석 에디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와 커티삭 위스키. 하이볼을 담은 잔은 아이졸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와 커티삭 위스키. 하이볼을 담은 잔은 아이졸라.

술과 남자, 남자와 술
<1Q84>에서 주인공 아오마메는 바에서 하룻밤을 보낼 남자를 물색한다. 커티삭을 주문하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바에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였으니까. 커티삭은 정말로 무난한 술이다. 상대가 어떤 술을 선택하는지로 성적 취향을 유추하는 그녀의 발상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바에서 커티삭 하이볼을 주문하는 이를 만난다면 그는 하루키를 아는 지적인 남자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 장정진(<그라치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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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과 뷔스넬 파인 칼바도스. 와인잔은 푸에브코 바이 에크루.

따뜻한 고독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술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칼바도스는 사과의 은은한 풍미를 즐길 수 있는 브랜디로, 레마르크가 쓴 <개선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틈만 나면 마셔 유명세를 탔다. <개선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운이 감돌던 파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고독한 순간이 오면 주인공들은 칼바도스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니 칼바도스와 함께 이번 가을의 고독을 온전히 누려보자. – 정인성(<책바> 대표)

 

디미트리 베르휠스트의 과 스텔라 아르투아.

디미트리 베르휠스트의 <사물의 안타까움성>과 스텔라 아르투아.

벨기에 맥주라면
“술꾼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다. 술을 사는(Living) 것이다.” 이 작품은 술꾼 집안에서 자란 소년의 자전적 성장 소설로, ‘술을 풂’으로서 ‘슬픔’을 이겨내는 밑바닥 인생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담았다. 이 집의 가족 구성원들은 내로라하는 애주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술꾼이라 해도 맛없는 맥주로 몇날 며칠을 버틸 순 없지 않나. 답은 소설의 배경이 벨기에라는 데 있다. 스텔라 아르투아라면 얼마든지
수긍할 만하니까. 때론 맛있는 술이 뛰어난 문학의 토대가 된다. – 정동욱(<시바펍> 대표)

 

나쓰메 소세키의 와 화요 25.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와 화요 25.

맑고 여린 술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문학가이자 영어교사이기도 했던 나쓰메 소세키. 그가 자신이 번역을 맡았던 책에서 ‘I Love You’를 ‘달이 참 밝군요’라고 에둘러 번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산시로>는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조차 수줍어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당시 일본 청춘 남녀의 감정을 그린 소설이다. 때때로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순수하고 연약한, 그 애처로운 마음들. 화요처럼 맑은 소주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드러운 25도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 – 이마루(<얼루어> 피처 에디터)

 

셸리 킹의 소설 와 로버트 몬다비 우드브리지 브뤼. 샴페인잔은 푸에브코 바이 에크루.

셸리 킹의 소설 <모든 일이 드래건플라이 헌책방에서 시작되었다>와 로버트 몬다비 우드브리지 브뤼. 샴페인잔은 푸에브코 바이 에크루.

새콤달콤한 사랑
이 생생한 책은 서점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독특한 연애소설일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동시대성을 포착해낸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실리콘 밸리를 아이싱처럼 얹어 전 지구 젊은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다 읽고 나면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온 기분이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로버트 몬다비 우드브리지 브뤼만큼 어울리는 술은 없을 것이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과 그린 애플, 그리고 레몬의 맛이 기포와 잘
어우러지는 스파클링 와인으로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맛과 비슷하다. -정세령(소설가)

 

하노 에이타로가 쓴 와 산토리 가쿠빈. 하이볼을 담은 잔은 아이졸라.

하노 에이타로가 쓴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와 산토리 가쿠빈. 하이볼을 담은 잔은 아이졸라.

술 한잔으로 대리만족
하이볼은 간단한 칵테일이다. 얼음을 가득 채운 잔에 위스키와 탄산수를 취향껏 넣은 다음 휘휘 저으면 끝이다. 위스키는 산토리 가쿠빈으로 정하고 각자의 입맛에 따라 탄산수 대신 진저에일을 넣거나 레몬이나 라임 혹은 민트 잎 몇 장을 띄워도 좋다. 베이스는 독한 위스키지만 제조된 하이볼은 탄산음료처럼 가볍다. 회사 생활도 이렇게 쉽기만 하면 좋겠는데, 현실은 부장님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떼지 못한다. 그냥 시원한 하이볼이나 마시며 책으로나마 간접체험해야지. – 김용현(<싱글즈> 피처 디렉터)

 

제임스 조이스의 과 글렌피딕 오리지널 싱글 몰트 위스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과 글렌피딕 오리지널 싱글 몰트 위스키.

향기롭고 쓸쓸한, 인생의 맛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있노라면 ‘아, 술 같은 거 정말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다 읽고 나면 또 술이 당기고 그 술이 하필이면 독한 위스키고 그렇다. 비록 태생은 다르지만 최초로 싱글 몰트 위스키를 생산한 스코틀랜드의 글렌피딕 위스키가 생각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싱글 몰트의 풍미는 깊어가는 가을밤과도 어울린다. 그러니 서서히 올라오는 취기에 책을 읽는 건지 마는 건지 헷갈리는 상태마저 좋다. – 서효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