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라도 받으면 좋겠다는 게 그토록 큰 바람인 걸까? 왜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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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을 넘나드는 TV 시청과 다년간의 연구로 드디어 나는 공적 영역에서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연구가 앞으로의 공식입장발표, 기자회견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유병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그리고 그의 연구결과는 꽤 그럴싸하다.
‘많은 고민 끝에 용기를 냈습니다(까먹을 줄 알았더니,)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내가 한 짓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사실이다)’, ‘경솔하게 행동한 점(치밀하지 못한 점)’ 등등. 명확하게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공적 언어를 재치 있게 비꼰 거다. 인터넷에 공유되는 ‘제대로 사과문 작성하는 법’이 사과문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표현으로 꼽은 것들 역시 유병재의 지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의 아니게, ’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앞으로는 신중하게’ 같은 표현은 인정에 호소할 뿐 아니라 피해자와 오해가 있었다는 뉘앙스마저 준다. 모욕적인 조건부 사과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부터 어느덧 1년, 논란의 중심에 섰던 대한항공 측의 사과문 같지 않은 사과문을 보며, 우리는 ‘올바른 사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제대로 된 사과는 보기 힘들었다. 삼풍 백화점 사고 피해자와 여성들을 향한 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옹달샘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사과문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라는 말로 사과 대상을 뭉뚱그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누락해 정황을 모른다면 어떤 일 때문에 사과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왜? 과거의 잘못을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볼드모트의 저주에라도 걸렸나? 우리는 제대로 사과받지 못하는 것에 지쳐버렸다. 아베 일본 정부에게, 각종 논란에 휩싸인 기업에게, 연예인에게,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게 올바른 사과일까?
리더십과 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 컨설팅 기관인 더 랩에이치의 김호 대표와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함께 펴낸 책 <쿨하게 사과하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임을 강조한다. 사과를 들으려는 상대방은 미안하다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상대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과의 핵심도 ‘미안하다’가 아니라 ‘내가 틀렸다, 잘못했다’가 되어야 한다.
진심을 느끼기 힘든 사과의 잘못된 유형 중 하나가 ‘본의는 아니었다’, ‘실수였다’는 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납작’ 엎드려야 한다. 이건 비굴한 게 아니다. ‘사과하는 사람이 패자가 아니라 사과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패자다’ ‘실수를 5만큼 저질렀으면 사과는 그 두 배인 10만큼 해야 한다’는 게 김호 대표의 주장이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10분 늦는다. 더없이 사소한 사건이지만 ‘늦어서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면 마음이 상한다. 하지만 친구가 달려 오며 몇 번이고 사과를 한다면? ‘별로 늦지도 않았는데 뭐’라고 말할 여유가 생긴다. 때론 과장되게 미안해하는 것도 괜찮다!
사람들이 사과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정말 ‘잘못한 것’이 되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블랙박스를 증거물로 들이밀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고 싶어 하는 운전자의 심리와 같다. 그러나 인정하자. 당신은 이미 잘못을 저질렀다 .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가장 신속하고 깔끔한 방법은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명확하게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사건을 종결 짓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과’를 ‘수리(Repair)’ 과정에 빗대기도 한다. 사과와 용서를 둘러싼 연구를 꾸준히 해온 학자 히로시 와가츠마와 아더 로제트는 학술 논문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고쳐지는 것이 있는 반면, 정중한 사과를 통해서만 고쳐지는 일도 있다”고 밝히면서, 사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함으로써 오히려 박수를 받기도 한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던 지난여름,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한 뒤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좋은 예다. 첫 문장부터 ‘저희 삼성서울병원이’라고 주체를 정확히 한 뒤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했다’고 사건을 짚고, ‘환자분들은 저희가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하겠다’며 앞으로의 계획도 명시했다. 동시에 ‘의료진은 벌써 한 달 이상 밤낮없이 치료와 간호에 헌신하고 있다’며 직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즐겨 찾는 인터넷 사이트를 묻는 질문에 ‘소라넷’이라고 답한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된 박준우 셰프도 제대로 사과한 덕분에 오히려 이미지가 회복된 경우다. ‘그 사이트는 간단히 화제 삼을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매일 성인사이트에 들어갈 만큼 찌질하다는 일종의 자학 개그 정도로 썼다’는 사실을 밝히며 ‘머리가 핑글 돌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 안의 몰카, 강간, 보복영상 등은 물론이고 일련의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너무 늦게 알아서 죄송하고 민망하다’며 긴 글을 남겼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사과문 이후,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의 고문 사실이 밝혀진 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국가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과거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래서 더더욱 제대로 사과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은 물론, 스스로를 위해서도.

 

사과문에 꼭 넣어야 할 것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언제 어디서 무슨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가
⇢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는가
⇢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내용은 무엇인가
⇢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가
⇢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책임질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