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영화 창고를 열었다. 무엇보다 생생한 맛으로 눈과 혀끝을 두드린 음식이 떠올랐다. 음식은 접시 위에서 영화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곤 했다. 아름다운 영화 속에 존재한, 가장 선명한 맛은 무엇일까?

1 줄리&줄리아 | 2009  

실존 인물인 전설의 프렌치 셰프 줄리아 차일드.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이주한 프랑스에서 르 코르동 블루의 유일한 미국인 학생이  되어 프렌치 음식 만들기에 몰두하고, 나중에 주방의 성전이 된 책을 쓴다. 그리고 현재의 뉴욕에서는 평범한 직장을 다니며 요리 블로그를 연 줄리가 있다. 그녀는 셰프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을 보며 365일 동안 총 524개의 레시피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영화는 과거의 파리와 현재의 뉴욕을 교차하며 두 사람의 요리 열정을 보여준다. 

 

뵈프 부르기뇽 뵈프 부르기뇽은 줄리아와 줄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음식이다. 줄리아는 뵈프 부르기뇽을 계기로 책을 내게 된다. 편집자가 그녀의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어보고 출판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줄리에게 뵈프 부르기뇽은 최고의 도전이다. 이 음식을 자주 망치는 데다가, 그녀의 블로그가 화제가 되면서 줄리아의 책을 펴낸 편집자 주디스 존스에게 이 음식을 대접하려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폭설이 내려 기다리던 손님은 오지 않고, 남편과는 말다툼을 한다. 뵈프 부르기뇽은 부르고뉴 지방의 소고기 스튜를 말한다. 안심을 지지고, 버터에 채소를 볶고 육수와 레드 와인을 더해 오븐에 익힌다. 그러나 가장 까다로운 과정은 이 스튜를 걸쭉하게 하는 ‘루’를 만드는 것인데, 줄리도 이 과정에서 실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책과 영화는 모두 성공했고, 실제 작가이며 블로그를 연 줄리 포웰은 줄리아 차일드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했지만 줄리아 차일드는 정작 이 책과 영화를 모두 못마땅해했다고.     

2 세렌디피티 | 2001

운명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연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크리스마스이브 백화점. 첫눈에 소울 메이트라는 걸 느꼈지만 각자 연인이 있었던 조나단과 사라는 앞으로의 운명을 정말 운명에 맡겨보자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아무리 영화라도 여자에게 꿈 깨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어쨌거나 영화는 아주 낭만적으로 흘러간다. 고서적에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후 헌책방에 팔아 조나단에게 찾으라고 하고, 조나단의 연락처가 적힌 5달러 지폐로 솜사탕을 사 먹고는 그 돈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7년이 흐른다. 

 

프로즌 핫 초콜릿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음식은 단 두 가지다. 솜사탕과 프로즌 핫 초콜릿. 두 사람은 뉴욕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마지막 남은 장갑을 동시에 집으면서 만난다. 조나단은 사라에게 이 장갑을 양보하고, 사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프로즌 핫 초콜릿을 산다. 그리고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조나단의 연락처를 적은 5달러로 솜사탕을 사서 나눠 먹는다. 이 달콤한 음식이 해피엔딩을 예고한 것일까. 영화에 등장한 프로즌 핫 초콜릿은 실제 ‘세렌디피티3’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레스토랑의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조명이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에서 한겨울에 먹는 프로즌 핫 초콜릿이란. 기라델리, 허쉬 등 네 가지 코코아 파우더와 그래뉴당, 소금, 우유, 얼음를 갈아서 잔에 붓는다. 생크림을 얹어 초콜릿 가루를 뿌리면 완성.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영화 속 프로즌 핫 초콜릿을 맛보기 위해 찾아온다.   

3 스팽글리쉬 | 2004

스팽글리쉬는 스페인식 영어, ‘콩글리쉬’의 스페인 버전이다. 12살 딸과 플로르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에 불법 입국해 클래스키  부부의 LA저택에 가정부로 고용된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지만 일은 참 잘한다. 클래스키 부부는 플로르의 딸 크리스티나의 영리함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자식들과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플로르는 자신에게 전부인 딸이 미국 중산층 사회에 물드는 과정을 보는 것이 편치 않다. 가족의 사랑과 가족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유쾌하고 진하게 그려진다. 

 

세계 최고의 샌드위치 클래스키 가족의 가장인 존 클래스키는 미국에서 인정받는 요리사다. 그는 매일 아침 심혈을 기울여 ‘세계 최고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 식사를 한다. 존 역을 맡은 애덤 샌들러는 이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실제 셰프에게 사사했다. 샌드위치 만드는 법은 DVD의 스페셜 코멘터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반전은 이 샌드위치의 이름이 실제로 ‘세계 최고의 샌드위치(The World's Greatest Sandwich)’라는 것. 이 샌드위치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서니사이드업으로 만든 달걀 프라이다. 샌드위치를 잘랐을 때 주르륵 흘러내리는 달걀 노른자가 일품. 샌드위치 빵에 파스트라미햄 또는 베이컨과 토마토, 마요네즈, 양상추, 몬테레이 잭 치즈, 이 달걀 프라이를 넣는다. 반으로 잘라서 먹은 뒤, 마지막엔 접시 위의 노른자까지 싹싹 닦아 먹는다.

4 런치박스 | 2013

인도에는 ‘도시락 배달’이라는 엄연한 직업이 있다. 남편이 일찍 출근하고 나면 부인은  점심 도시락을 만들고, 그것을 대신 배달하는 직업이다. 뭄바이에서만 5천 명의 도시락 배달원이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회사로 배달해준다. 주부 일라 역시 남편을 위한 도시락을 정성껏 만든다. 이 도시락 배달 직업은 겉으로는 우스워 보이지만 매우 정확한 수학적 시스템에 기반해, 잘못 배달될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런치박스>는 이 도시락 배달이 잘못되면서 생기는 미묘한 감정을 다룬다. 남편에게 가야 할 도시락이 아내와 사별한 사잔에게 배달된 것이다. 정성껏 만든 도시락을 오랜만에 먹어본 그는 도시락에 편지를 넣고,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된다.

 

커리 부엌에서 홀로 도시락을 만드는 일라. 매번 도시락을 정성껏 만드는 장면이 나오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고, 다른 여자가 있는 듯하다.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갓 만든 커리가 끓고 있다. 이 커리는 사잔이 먹게 된다. 인도 커리는 일본식 카레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카레와는 굉장히 다른 음식이다. 건더기가 적고 걸쭉하며, 커리 페이스트가 아닌 다양한 향신료를 직접 혼합해 쓴다. 즉 우리나라 집집마다 된장찌개의 맛이 다른 것처럼 인도 커리 역시 그렇다. 정통 인도 커리를 만들고 싶다면 커리 페이스트 대신 다양한 향식료를 구입해 직접 만들어야 한다. 일라는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하게 될까?  

5 사랑의 레시피 | 2007

캐서린 제타 존스가 연기한 캐서린은 아마도 영화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셰프임이 틀림없다. 캐서린은 뉴욕의 고급 프렌치 식당의 총주방장으로 승승장구 중이지만 언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조카 조이를 맡게 된다. 일과 조이밖에 모르는 캐서린의 주방에 부주방장 닉이 등장한다. 원칙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인 캐서린과 달리 닉은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는 즉흥적인 남자다. 둘은 티격태격하지만 로맨틱 영화의 문법대로 서로 끌리게 된다. 

 

피자 아비게일 브레슬린이 맡은 조카 조이는 뻔한 로맨스 영화의 문법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늘 정크 푸드만 먹고 자란 조이는 요리다운 요리는 죄다 거부한다. 그런 조이가 처음으로 맛본 게 주방 뒷방에서 닉이 만든 파스타다. 이 파스타는 캐서린이 닉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가장 흡족한 장면은, 캐서린이 조이의 소원대로 닉을 집에 초대해 함께 만든 음식이다. 세 사람은 함께 피자를 만들어 식탁 대신 거실에 쳐놓은 텐트에 둘러앉아 집 안에서 피자 캠핑을 즐긴다. 밀가루로 반죽한 도우에 토핑을 올린 피자는 이탈리아식과 미국식으로 발전했는데, 도우가 얇고 토핑이 적은 것이 이탈리아식이다. 오븐이 있으면 집에서도 피자를  구울 수 있지만 도우는 사는 것을 추천한다.    

6 라따뚜이 | 2007  

이제 애니메이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어른 관객들도 이 영화만큼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영화 주인공은 셰프를 꿈꾸는 레미. 다만 그는 인간이 아닌 쥐다. 열정은 물론 절대미각, 빠른 손놀림, 먹는 사람에 대한 애정까지 갖췄다. 어느 날 파리의 별 다섯 개짜리 최고급 레스토랑에 침투한 그는 재능 없는 견습생 링귀니와 친구가 되고, 링귀니의 모자 속에 숨어 그를 아바타로 조종하는 레미와 둘은 까다로운 손님과 무시무시한 요리평론가 사로잡기에 나선다. 

 

라따뚜이 레미가 비평가를 위해 준비한 음식은 라타투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호박나물, 된장찌개처럼 프랑스에서는 아주 평범한 가정 음식이다. 모두 의아해했지만, 평론가는 이 라타투이 한술에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긴다. 그러므로 라타투이는 재료만 있으면 뚝딱 만들 정도로 쉬운 음식이다. 호박과 가지, 토마토를 얇게 썰거나 대충 깍뚝 썰어도 된다. 올리브유에 재료를 넣고 볶다가 파슬리, 오레가노 등 허브를 넣고 토마토소스를 넣어 푹 익힌다. 오븐에서 익히거나 프라이팬에서 익히면 완성이다. 비평가는 링귀니가 만든 음식이 레미(쥐!)의 것이라는 음식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다음 날 신문에 이렇게 적는다. ‘상상도 못할 만큼 출신이 소박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요리계 최고의 천재다.’ 링귀니와 레미는 ‘라타투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낸다. 레스토랑은 늘 문전성시고 평론가는 최고의 단골이다. 인간 손님은 모르지만 레스토랑의 비밀 구역에서는 쥐를 위한 레스토랑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