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환상, 번뜩이는 아이디어 그리고 지속가능한 이슈로 채워진 2024 F/W 패션위크. 그 열정적 현장에서.

INSIDE ART

패션위크의 별미라면 예술로 펼쳐낸 디자이너의 무수한 영감을 눈 앞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놓은 무대를 목도할 때도 그렇다. 새로운 시즌도 뉴욕, 런던, 밀란, 파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하우스에서 예술적 영감을 한껏 펼쳐냈다. 그중 고대 황제의 비밀스러운 아지트로 순간 이동한 듯 웅장한 존재감으로 현장의 모든 이들을 압도시킨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모셔온 샤쿤탈라 쿨카르니의 작품. 디올 쇼장 한가운데 들어선 정교한 케인(속이 빈 나무줄기) 갑옷 여러 벌, 내부 공간을 둘러싼 신비로운 벽화를 런웨이 시작 전까지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비현실적 풍요로움에 깊이 젖어들 즈음 슈퍼스타 지수가 등장했다. 이윽고 그와 작품을 동시에 보호하기 위한 경호원들의 필사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됐고, 그로 말미암아 잠시 아비규환이 됐던 그 현장 역시 작품만큼이나 강렬하게 남았다.

 

PHOTO ZONE 

흔히 패션쇼가 끝나면 출구를 찾아 빠르게 전진한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발이 묶이면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 하지만 아크네 스튜디오에서만큼은 쇼가 모두 끝났음에도 ‘인증샷’을 찍기 위해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장면은 런웨이에 전시된 빌루 야아니소 작가의 리사이클 타이어 의자에서 이뤄졌다. 처치 곤란 덩어리인 타이어를 거대하게 빚어낸 작품 위에 올라타 그것이 의도인 듯 자유롭게 방치했고 사람들은 새 시대를 정복한 듯 멋진 쇼를 직접 본 영광을 너도나도 SNS에 인증했다는 후문. 

 

THE PRECIOUS MOMENT 

사람들이 걷고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상의 찰나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패션 하우스가 지속가능한 내일을 꾸릴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 바이커 재킷을 입고, 튼튼한 부츠를 신고 물웅덩이를 ‘풀쩍’ 뛰어넘다가 또 ‘풍덩’ 물을 튀기는. 누구나 경험한 비 오는 어느 날의 낭만을 포착한 에르메스는 특별한 날만 입는 것이 아닌 매일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을 제안했다. 천장에서 비처럼 물이 쏟아내렸던 쇼가 끝나고 나가는 길, 귀여운 금발 꼬마가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혀로 날름거리며 까르르 웃던 순간이 아직도 생각난다. 

 

SPECIAL MODEL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도발적 뒤태로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장을 누빈 샘 스미스부터 루이 비통 앰배서더이자 모델로 박진감 넘치는 워킹을 선보인 스트레이 키즈 필릭스, 소녀들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미우미우를 완벽하게 낚아챈 70세 유명 의사 친후이란 그리고 남자친구인 호날두의 친필 사인을 새긴 드레스를 입고 베트멍 런웨이에 등장한 조지나 로드리게스까지. 두 눈을 ‘번뜩’이게 만든 런웨이 위의 신선한 얼굴들. 

 

DIRECTOR’S SPIRIT

다가올 시즌의 컬렉션을 처음 공개하는 패션위크에서 하우스 DNA를 기반으로 미래를 탐구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막중해진다. 특히 알렉산더 맥퀸의 션 맥기르, 끌로에의 셰미나 카말리, 라코스테의 펠라지아 콜로투호스는 올해 데뷔 쇼를 치렀다. 세 디렉터의 컬렉션을 볼 때 전임자의 짙은 컬러와 각각의 고유한 개성, 그 간극을 어떻게 잘 풀어냈는지 살피는 것도 쇼를 즐기는 쏠쏠한 재미. 한편 루이 비통의 여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메종과 함께한 지 1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를 맞이했다. 10년 전 그날과 마찬가지로 3월 5일, 첨단 기술로 구현한 샹들리에 13개를 설치한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쿠르 카레에서 패션위크 대장정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상적 이슈는 디렉터의 부재에도 메종의 근본, 오트 쿠튀르의 기본으로 돌아가 훌륭한 쇼를 펼친 지방시 메종이다. 3번가 조지 5세 거리에 위치한 살롱에서 스튜디오 프레타 포르테 팜므는 프라이빗하게 진행된 패션쇼를 통해 위베르 드 지방시의 유산과 그에게 영감을 준 뮤즈를 새롭게 그려냈다.

 

DANCING TIME

빙글빙글 현란하게 돌아가는 옵티컬 아트 장식 무대에서 신나게 고고 댄스를 추고 싶었던 로저 비비에 프레젠테이션 현장. 18세기 호텔 파티큘리에를 기하학적 디자인, 미묘한 색채 관계를 활용한 비현실적인 1960년대풍 살롱으로 깜짝 변신시켰다. 특히 새 시즌부터는 슈즈와 백뿐 아니라 모자, 웨이스트 코트, 주얼리까지 풍성하게 구성한 토털 액세서리 메종으로 진화했으니. 판타지한 스타일을 즐기는 이들이여 ‘많관부!’

 

FOR THE EARTH

“여러분 지구를 구할 시간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따사롭고 웅장한 온실 안, 환경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운드트랙을 따라 펼쳐진 파격적인 ‘About F…ing Time’ 쇼. 스텔라 매카트니는 사과 가죽 트렌치코트와 재활용 스팽글로 반짝이는 메시 수영복을 소개했다. 한편 코페르니는 99%의 공기와 1%의 유리로 만든 놀라운 디자인을 공개해 온오프라인을 발칵 뒤집었다. 나사(Nasa)에서 별 먼지를 수집할때 사용하는 나노 소재 실리카 에어로겔로 구현한 ‘에어 스와이프’ 백은 구름이 얼어붙은 듯 신비한 형상을 띤다. 게다가 최대 1200℃의 열과 무게 대비 4000배의 압력도 견딘다. 공기로 만들어 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 실험적인 아이템이 널리 상용화하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CHA BA DA BA DA

브래드 피트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그린 짧은 영화 한 편으로 시작된 샤넬의 쇼. 둘은 1966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를 재현했다. 1분 남짓한 길이의 영상인데, “죄송하지만 예약 가능한 방이 있나요?”란 마지막 대사 후 도빌 해안가를 걷는 두 남녀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스치고, 유명한 ‘차바다바다 차바다바다’ 선율이 흐를 때는 사랑이 싹트는 순간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발끝부터 전율에 휩싸였다. 혹시 샤넬의 새 컬렉션을 안 본 이가 있다면 이 멋진 단편영화부터 감상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