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모양과 용도와 법칙에 상관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써먹고 싶을 때가 있다.

 

먹빛 품은 달

(위에서부터) 18세기 조선 왕실 가마의 영향을 받은 제작 기법을 이어받아 완성했다. 기술은 옛것이지만 모던한 형태와 은은한 광은 음식을 돋보이게 하니 양식이든 한식이든 일식이든 자유롭게 펼쳐내기 좋은 캔버스가 된다. 연꽃잎의 디테일이 오밀조밀 에지 있는 접시는 3만원, 아이스크림, 떡, 푸딩, 간단한 스타터를 담아내기에 딱 좋지만, 통이 큰 사람은 술잔으로 써도 좋을 고배형 볼은 4만2천원, 모두 광주요(Kwangjuyo).

 

투박한 맛

(앞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도톰하고 까슬까슬한 질감이 돌에 낀 이끼인 양 자연스럽다. 특유의 불규칙한 유약 마감은 서툴다기보다 듬직하다. 국이든 라면이든 막걸리든 샐러드든 다 담아도 이상하지 않은 스톤웨어 볼은 1만2천9백원. H&M. 얇고 투명한 호리병과 술잔은 하나하나 입으로 불어서 만든다. 얇으면 얇을수록 입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우니 술의 맛도 좋아진다. 호리병은 술의 향을 오래도록 잡아두니 독한 술을 담아 나눠 마시기에 좋다. 호리병과 잔 두 개 세트에 12만원. 박선민. 죽은 나무 기둥을 툭툭 깎아서 만든 건지 거칠고 투박하지만 좋다. 단지로 쓰든 컵으로 쓰든 생각보다 속이 아주 깊어서 뭐든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다. 1만7천9백원. H&M.

 

풍요로운 문어

유리가 그림을 품었다. 푸른 물감으로 초승달을 그린 종이 위에 투명한 유리를 덮어쓰기 하는 기법으로 만들었다. 원래 케이크 스탠드인데 홀케이크 한 판을 버틸 크기는 또 아니다. 제례를 위해 사용하는 제기라고 해도 썩 그럴듯하다. 경상북도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건 단연 통문어다. 가격미정, 존데리안 바이 분더샵(John Derian by Boontheshop).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시칠리아의 태양 아래 빼곡하게 차려진 해산물을 다 먹어 삼키기 전까지 새빨간 접시 위에 어떤 메시지가 적혀 있는지 알 길 없다. 힌트, 존데리안은 지속해서 호텔 이름이 적힌 시리즈를 만든다. 한낮의 열기를 다 흡수한 듯 이글거리는 타원형의 유리 접시에 적힌 호텔이 과연 어디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가격미정. 존데리안 바이 분더샵.

 

도자기 로드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양의 도자기는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의 왕실로 흘렀다. 긴 시간 서로 다른 임무를 맡은 동서양의 도자기는 어떻게 나아가고 변화했을까. 그걸 한데 모았다. 꽃잎 모양의 양각이 리듬감 있게 흐르는 연청 접시는 2만2천원. 광주요. 클래식하면서 모던한 꽃과 이파리가 온몸을 타고 도는 키가 크고 속이 깊은 화병은 23만원.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막걸리든 소주든 보드카든 와인이든 따라 마시기 좋은 소리잔을 기울일 때면 내내 기분 좋은 구슬 소리가 맑게도 흐른다. 5만5천원. 광주요. 사발은 모든 게 다 가능한 그릇이다. 큼직한 포용성을 가진 푸른 소나무 색의 사발은 3만원. 광주요. 버터 한 덩이가 통째로 담기는 대범함과 우아한 장식이 대비를 이루는 유럽 도자기의 영원한 클래식, 블루 플레인 빈티지 버터 디시는 25만원. 로얄 코펜하겐.

 

유리병의 속내

물을 담아도 좋고 술을 담아도 좋고 꽃을 담아도 좋다. 대파 값이 비싸 직접 길러 먹는 파테크가 유행이라던데, 올록볼록한 주둥이가 손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는 초록빛 유리병에 수경으로 대파를 재배해도 좋겠다. 1만2천9백원, H&M.

 

공든 그릇 탑

(위에서부터) 그릇으로 탑을 쌓을 땐 조마조마하고 간절해진다. 탑의 맨 위 구멍이 숭숭 뚫린 세라믹 바스켓은 지중해의 쨍한 햇살과 선명한 채도의 영향 아래에 있다. 메이드 인 스페인. 각각 7만4천원. 옥타에보 바이 박국이(Octaevo by Pakkookii). 블랙 앤 화이트의 모던한 페도라를 연상시키는 ‘설후 통형합’은 음식을 담아 보관하는 뚜껑이 있는 합이다. 가격미정. 광주요. 막사발은 틀렸고 찻사발이 맞다. 막사발은 일제가 남긴 잔재다. 도자기 대신 고운 색유리로 만든 찻사발에 차를 받아 마시니 차가 다른 색으로 물든다. 차의 온기도 더 잘 와 닿는다. 각각 40만원. 이지은.

 

백자와 에르메스

(왼쪽부터) 백자는 원래 두고 보는 대신 만지고 쓰는 일상의 그릇이다. 이동식 작가의 그 유명한 달항아리를 일상에서 쓸 수 있도록 작게 만들었다. 유려한 선과 소박한 조형미 덕분에 봐도 봐도, 써도 써도 질릴 줄 모른다. 30만원. 이동식. 생김새는 익숙한 달항아리인데 소재가 남다르다. 유리와 왁스 캐스팅 기법을 써서 바깥의 빛을 머금은 채 다시 발산한다. 비정형의 은은한 매력이 돋보이는 달항아리는 50만원. 이지은. 유광도 아니고 무광도 아닌 것이 오묘하게 반짝거린다. 굴라시나 수프 같은 양식 국물 요리를 담아내기에도 좋은 미니 달항아리 띠는 가격미정. 광주요. 묵직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이 춤을 추듯 잘 빠진 실버 디저트 나이프는 가격미정. 에르메스(Her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