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극과 극의 인물을 오간 오정세는 다시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스웨터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톱은 코스(Cos). 골드 체인 목걸이는 이에르 로르(Hyeres Lor).

한동안 일주일 내내 당신을 봤어요. 월화에는 <모범형사>를, 주말에는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았죠. 동시에 시청자를 만난다는 게 배우로서 부담스럽나요? 
시청자 입장에서 몰입이 안 되실까봐 많이 걱정이 됐죠. 원래는 <모범형사> 끝나고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시작되어야 했었는데 편성이 밀리면서 조금 겹치게 되었어요. 문상태(<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하얀색이고 오종태(<모범형사>)는 까만색인데 중간에 하얀색에 까만색 한 방울만 떨어져도 색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서요.

그 흑과 백은 명확하게 달랐어요. 하지만 왠지 오정세가 연기를 하면 오종태라는 악인도 그냥 악인만은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더군요. <스토브리그>의 권경민처럼 말이에요. 
그래도 나쁜 놈이죠. 종태도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이라든지, 그런 서사는 있지만 그게 너무 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토브리그>의 권경민에 대해 이 인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공감할 수 있었다면, 종태는 최대한 공감이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청자에게 제공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를 ‘전사’라고 해요. 연기를 할 때마다 인물의 전사에 공을 들이는 편인가요?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종태의 전사는 저만 가지고 있고 싶었던 거죠. 상태는 조금 달랐고요.

1997년 단역으로 데뷔했고, 당시 ‘손님2’를 연기했죠.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어떤가요? 
저한텐 엄청 큰 역할이었어요.(웃음) 그 다음에는 ‘경찰1’을 해서 ‘아! 내가 잘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괜히 ‘1’이 크레딧에서도 먼저 올라가니 더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로부터 많은 작품을 쉬지 않고 해왔어요. 언제부터 대중이 당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느꼈어요? 
수면 아래에서 단역만 하다가 어떤 역할에 이름을 맡게 된 건 <거울 속으로>라는 작품의 박형사 역이에요. 그때 배우로서 <씨네21> 같은 영화잡지에서 첫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거였죠, 다시 가라앉는 데까지는 금방이었지만요…(웃음) 30신 했다가 3신을 했다고, 그게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아니에요. 주요인물을 하기도 하고, 작은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그게 성패의 지표는 아니었어요.

데님 재킷은 산드로 옴므(Sandro Homme). 브라운 팬츠와 블루 패턴 스카프는 에스.티. 듀퐁 파리(S.T. Dupont Paris). 포켓을 장식한 실버 하트 참은 이오공(EOØXØXØ).

안 해본 역할이 없는 것처럼 다양한 역할을 맡았어요. 그만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는 뜻도 될 것 같아요. 
저 안 해본 거 엄청 많은데요. 예를 들면 근육질의 남성미가 흐르는 ‘근철’ 같은 역할도 아직 못 해봤고.(웃음)

근철이라니, 즉흥적 작명이지만 정말 우락부락한 느낌이 드는군요. 많은 작품의 흥망성쇠를 경험했는데, 좋은 작품을 가르는 당신만의 기준이 있나요? 
매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참여하지만 만든 사람만의 만족일 때도 있고 또 다 같이 공감해주실 때도 있어요. 결과는 항상 달라요. 그래도 제가 그 안에서 얻어가는 건 항상 있었어요. 사람을 재산으로 가져갈 때도 있고, 어떨 땐 새로운 연기를 시도해봄으로써 배우로서 배가 채워지는 작품도 있고, 못 오를 산 같은 작품에 도전했는데 결국 못 올라서 그 실패가 또 다른 재산이 되기도 하고요. 어떤 작품이든 제게는 살이 되는 것 같아요. 실패하든, 성공하든, 창피한 작품이든요.

‘배가 채워지는 작품’이라니. 어떤 작품을 하면 배가 부른가요? 
최근 작품으로는 <사이코지만 괜찮아>예요. 참여하면서 작품도 위로가 되었고, 여러 스태프들, 배우들이 모이니까 그냥 평면적이던 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대한 즐거움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들어가면 상태를 처음 준비하면서부터 제가 그리려고 했던 인물이 많이 그려졌을 때 배가 부른 기분이 들죠.

당신의 출연작인 <미씽나인>을 끝까지 보았어요. 말이 많았던 작품이지만 제게는 인상적인 1회와 오정세라는 배우의 매력을 알려준 작품으로 남았죠. 당시 소문으로는 배우의 애드리브 비중이 높았다고 했죠. 그런 작품은 어떤가요? 
우선 감사드리고요.(웃음) 그 작품은 설정과 톤만 조금 주어지고, 경호(정경호)하고 현장에서 만들어간 것이 많았어요. 상황극 같은 느낌의 장면이 많았었죠. 배우로서는 접근 방식이 조금씩 다 달랐던 것 같아요. <동백꽃 필 무렵>은 최대한 대본에 충실하게, 대본을 100퍼센트 구현하는 게 목표였었고. <미씽나인>은 현장에서의 호흡을 중요시했어요. <사이코지만 괜찮아> 같은 경우는 두려웠지만 하면서 조금씩 채워졌던 작품이었어요.

팬츠는 버드 체(Bird Che). 슬리퍼는 버켄스탁 1774× 발렌티노(Birkenstock 1774×Valentino).

코트는 보스 맨(Boss Man). 실버 체인 팔찌는 이에르 로르. 실버 반지는 앵브록스(Engbrox).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일을 계속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계속 하다 보면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라는 인상적인 수상소감이 그래서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시대에, 뭔가를 놓지 않고 꾸준히 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응원은 없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단역 할 때도 되게 행복했었고, 3년 동안 작품이 없을 때 아등바등하면서도 그 기간이 재미있었어요. 속상한 작품, 실망스러운 작품, 시청률이 0퍼센트 나오는 것도 했는데, 요즘은 하는 것마다 사랑받고 있어서 감사하게 즐기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정세라는 배우의 운때가 좋은 것 같아요. 이것도 언젠가는 내려갈 때가 오겠죠.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지치지 않는 배우이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한 말인데, 좋게 봐주시는 분들에 대한 정서가 저도 좋았고,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기도 하고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그저 감사합니다.

‘보상’을 받게 된다고만 하지 않았고, ‘위로’를 받게 된다고 했죠. 위로가 된 작품이었나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작품은 저한테 특별하고 의미가 있어요. 노규태라는 인물에서 얻은 성취감도 있었지만 한 명의 시청자로 작품을 보면서도 제 스스로 위로가 됐거든요.

그만큼 시간이 쌓였다고 해서 누구나 오정세처럼 되지는 않아요. 캐릭터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시청자와 롯데월드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처럼요. 이후 별다른 입장도 밝히지 않았죠. 
그렇게 보낸 하루가 기사화되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 자체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까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끝나고 한동안 인터뷰를 안 했어요. 이게 또 이슈가 되는 게 저와 그 친구, 주변 분들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았거든요.

그 시청자는 자신의 상태를 위로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공감의 감정이 뭉클했습니다. 그만큼 문상태가 당신의 몸을 빌린 것처럼 생생했다는 이야기도 될 거고요. 
그동안 봐왔던 익숙한 자폐인을 그려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자폐인으로 그려야 하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기본적으로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보고 상태 같은 인물을 길에서 만났을 때 ‘상태 같은 사람 도와주고 싶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랑 함께하고 싶다’는 정서를 만들고 싶었어요. 만나면서 저 스스로도 많이 채워진 것 같아요. 준비해간 감정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나오기도 하고요. 머릿속으로 ‘이런 감정이겠지’ 해서 촬영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전혀 다른 감정이 나올 때 배우로서 희열을 느껴요.

니트와 팬츠는 타미힐피거 맨(Tommy Hilfiger Man). 화이트 슬립온은 에스.티. 듀퐁 슈즈(S.T. Dupont Shoes). 실버 체인 팔찌는 앵브록스.

어떤 장면이었죠? 
마지막에 “엄마 나 작가됐어”’라는 대사는 대본에 그렇게 깊은 감정으로 쓰여 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책에 ‘그림 문상태’라고 써 있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저만 느꼈죠. 며칠 후 다음 상황을 촬영할 때 그때 그 감정이 떠올랐고, 대본보다 조금 더 진하게 나오기도 했어요.. “내 동생이 형을 죽였다”라는 대사를 할 때도 준비해간 건 그렇게 오열하는 장면은 아니었어요. 감독님이 같이 터져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바꿨어요. 수현(김수현)이한테 고마운데, 그 친구를 보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그래서 연기하기는 편했던 것 같아요.

배우만 느끼는 신뢰인 건가요? 
저희 다 낯을 많이 가려요. 그래서 처음엔 수현 씨, 예지 씨 하고 있었죠. 드라마 초반에 서점에서 제가 발작을 일으켜 수현이가 옷을 씌워주는 장면이 있는데, 카메라 앵글에는 안 나왔지만 저는 그때 감정이 터졌어요. 마치 엄마가 온 것처럼 안정이 되고, 그때까진 존대하는 사이였지만 그 순간부터 ‘이 친구가 되게 좋다. 동생인데 형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형제의 케미는 그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 순간의 감정은 진짜였다는 거군요. 예전 작품에는 대본에 선을 넘지 말자고 적었다던데요, 이번에는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어요? 
자폐인과 비장애인 남매와 하루를 보낸 적이 있어요. 집에 와서 기억에 남는 건 둘이 신호등에 서 있는 장면이었어요. 그냥 서 있을 뿐인데 그 투샷이 너무 뜨거운 거예요.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게 꽉 차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느낌을 가져왔으면 좋겠다. 제 목표는 그때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랬던 당신은 다시 <모범형사>에서는 악인이 되어 사촌동생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싫은 인물에도 애정을 갖나요. 
촬영은 <모범형사>가 먼저였는데요, <모범형사> 같은 경우는 인물에 대한 애정보다 큰 그림을 보고 들어갔어요. 오종태는 그냥 나쁜 사람.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인데 보다 보니까 종태보다 선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나쁜 주위의 사람들이 있네? 이렇게 접근했어요.

블랙 라이더 재킷은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팬츠는 보스 맨. 블랙 스니커즈는 컨버스(Converse). 사각 프레임 목걸이와 실버 반지는 락킹 에이지(Rocking Age).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필모그래피가 아주 다양하기에 공통점을 찾기는 어려워요. 출연 여부를 결정하는 당신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로그라인이 정확하게 있는, 마음이 끌리는 작품. 항상 작가님이나 감독님에게 이 글을 왜 쓰셨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물어봐요. 실제로 만들어졌을 때 그 마음까지 가지 않는 작품도 있어요. 그런데 최근 것들은 그 마음까지 간 작품이 많아요. 그런 게 있는 시나리오를 좋아해요. <사이코지만 괜찮아는>는 조금 다르게 태어난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메시지였고, <모범형사>는 죄를 마주하는 두 부류에 대한 이야기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요. <모범형사>는 작품 전체를 보고 선택했어요.

드라마가 처음 나올 때 공개되는 ‘기획 의도’를 말하는 거군요. 하지만 기획 의도대로 전달되는 작품이 많지는 않아요. 
투자받기 위해 쓴 기획 의도, 혹은 캐스팅하기 위해 쓴 기획 의도라는 느낌이 든 작품도 있죠. 하지만 저는 조금 진한 작품, 처음의 로그라인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작품에 끌리는 것 같아요.

많은 배우에게 같은 질문을 했지만, 기획 의도를 말하는 배우는 당신이 처음입니다. 결국 작품의 존재 이유에 닿는 얘기네요. 
저도 다른 이유일 때도 있어요. 어떤 감독에게 꽂히면 시나리오도 안 보고 그냥 한다고 해요. <콜> 같은 경우도 이충현 감독님의 <몸값>이라는 단편영화를 보고 너무 매력을 느껴서 ‘이 사람의 장편영화는 할래’ 해서 회사에 SOS를 쳤죠. <몸값>을 거짓말 보태서 200번 정도 본 것 같아요. 14분 정도 되는 짧은 영화라서 누가 안 봤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폰으로 바로 보여줬어요. 한 신 나와도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어요. 감독님의 다음 작품에 담기는 배부름이 있거든요.

어제 머리를 짧게 잘랐다면서요? 새로운 작품이 시작되나요? 
곧 <지리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요.

영화 <콜>은 개봉을 알렸다가 다시 미뤄진 상태지요. 모든 게 예정대로 돌아가지 않는 때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그동안 밖에서 많이 활동했으니까 집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고 있어요. 예전부터 영상을 찍어보고 싶었어요. 크게는 아니라 요즘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사실 기계치인데 앱 받아놓고 이것저것 시도해볼까 하고 있어요.

스티치 장식 블랙 더블 재킷은 버드 체. 화이트 셔츠와 아이보리 데님 팬츠는 가먼트 레이블(Garment Lable). 타이는 에스.티.듀퐁 클래식(S.T. Dupont Classics). 타이를 장식한 실버 참은 이오공. 블랙 블로퍼는 에스.티. 듀퐁 슈즈. 베레모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정세 영상의 ‘기획 의도’는 뭔가요? 
몇 개가 있죠.(웃음) 지금은 어떤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품을 위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어요. 하나는 얘기해드릴 수 없고요,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꿈을 가지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꿈이 없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 더 많거든요. 꿈이 없는 삶이라도 실패한 삶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전시와 공연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요즘 그 두 가지가 쉽지 않죠.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았군요? 
그럼요. 저는 혼자서도 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