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미뤘다.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믿을 수 없으니 습관을 고칠 수밖에.

 

© SALVADOR DALÍ, FUNDACIÓ GALA-SALVADOR DALÍ, SACK, 2020

나는 미루기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기상을 미루며 자던 5분이 가장 달콤했고 학창 시절에는 신나게 놀다 벼락치기로 얻은 점수가 제일 뿌듯했다. 그것은 나의 즐거움을 최대한 확보하면서도 시간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최상의 결과를 내는 방법 같았다. 그렇게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아슬아슬한 삶에 익숙해졌다. 이대로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 어느새 <얼루어> 편집부의 공식 마감 꼴찌는 내가 되었다. 꼴찌라는 수식어에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지만 나의 마감이 늦어짐으로써 모두가 야근을 더 하게 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다. 마감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가장 훌륭한 에디터는 마감을 지키는 에디터임을 매번 가슴에 새겨도 마감 때마다 상황은 반복된다. 사실 지금의 원고도 몇 차례를 미루다 최후의 순간에 숨차게 쓰고 있다. ‘어제 미루지만 않았으면 할 수 있었을 텐데. 난 대체 왜 이럴까?’라는 허망한 후회와 자책보다 정말로 나는 왜 이러는지, 정확한 분석이 필요한 때다.

 

‘나중에’로의 도피

일을 미루는 사람은 그저 게으른 탓일까? 물론 게으름도 문제지만 미루는 태도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유럽의 동기부여 전문가 페트르 루드비크는 <미루는 습관을 이기는 작은 책>에서 이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게으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도 마음이 한없이 평온하고 태연하다면 이는 게으름에 가깝다. 그러나 미루는 사람의 대부분은 해야 하는 일 외의 다른 일을 한다. 갑자기 안 하던 대청소를 하고 쌓여 있는 SNS 피드를 해치우듯 확인하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걸려 끝없는 추천 동영상의 늪에 빠지기 일쑤다.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죄책감과 무력감이 커지는 것을 느끼지만 도저히 할 일만큼은 하기 싫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떠는 행동이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라면 미루는 사람은 자신이 미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결과가 처참할 것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미루기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이 선택의 근거를 무력화시킬 때 미루는 습관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루는 습관의 원인으로 천성적인 나태함이나 비효율적인 시간관리보다 심리적인 요소를 지목한다. 심리학자들은 미루는 습관을 ‘지연 행동(Procrastination)’이라 부르며 최근까지도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영국 셰필드대학의 심리학자 푸시아 시루아는 미루기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내가 자주 일을 미루는 순간은 섭외 전화를 앞두고서다. 귀찮음의 기저에는 언제나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으니 꽤 일리 있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평소 기분이 울적한 편이거나 마음에 여유가 없고 죄책감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당장의 즐거움’을 원하며, 그것이 미루기로 이어진다고.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 건강에 대해 20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한 윌리엄 너스는 <심리학, 미루는 습관을 바꾸다>에서 미루는 습관을 유지시키는 커다란 요소 중 하나로 ‘회피’를 제시했다. 눈앞에 닥친 상황, 자신이 해야 하는 업무에 대해 압박감을 느껴 비교적 더 안전한 행동으로 도피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심리학자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완벽주의, 자신감 결여 등 다양한 심리적 요소를 꼽았다. 결국 모든 게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구로 연세 봄 정신건강의학과의 박종석 원장은 바로 그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미루는 것의 원인이 불안이나 초조감 때문인지, 확실하게 해내고 싶은 강박관념 때문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우울함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요.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 하고 이는 나의 현재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고,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문제다. 이때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은 언제든 활짝 열려 있으니 심리 상담을 통해 자신을 파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도 병인가요?

검사와 상담을 위해 마인드터치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을 방문했다. 전문의에게 미루는 일을 반복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 뒤 초진 설문지를 받아 작성했다. 우울과 강박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항마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문장을 선택하는 간단한 설문지다. 결과를 살펴본 홍계현 전문의는 운을 뗐다. “지금으로선 ‘병’으로 진단 내리기 어려워요. 완벽주의나 강박적인 성향이 조금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성향일 뿐 치료가 필요한 성격장애와는 엄연히 구분됩니다.” 그는 만약 성격장애에 해당된다면 미루는 것에 한하지 않고 일상의 다른 부분에서도 지장이 생길 확률이 높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계획이 한 치라도 흐트러지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하는 정도의 강박에 시달리거나 극도의 불안감으로 공황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그렇다. 혹시나 느긋한 성정과 올빼미형인 생활습관을 고친다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전문의의 답은 예상과 달랐다. “성격과 생활패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성향이나 체질을 원인으로 삼게 되면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져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노력한다고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자신에게 편안한 환경과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선책을 찾는 게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작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자책과 무기력만큼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도 없으니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있다가는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차적으로 생기는 스트레스와 불안이 누적될 경우 습관이 강화될 뿐 아니라 우울증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니 전문의와의 상담을 추천한다.

천 리 길도 ‘일단 하기’부터

진단이나 처방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미루는 습관이 교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원고 마감일에 늦었고, 편집장의 원고 독촉 리스트에 ‘미루는 습관’ 원고가 떡하니 기재되었으니 말이다. 마음먹기의 문제라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하다. 미루는 습관을 없애는 처방전의 키워드는 꾸준한 성실함보다는 당장의 단순함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의욕이 있어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실제로 독일의 정신의학자 에밀 크레펠린의 ‘작동 흥분 이론’에 따르면 일단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면 의욕은 뒤따라 생긴다.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뇌의 측좌핵 부위가 흥분되기 때문이라고.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많은 심리학자와 시간관리 전문가들이 ‘일단 하기’를 추천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윌리엄 너스의 ‘5분 계획’은 언제 어디서든 바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일단 일을 시작하는 데 처음 5분을 쓴다. 5분이 지나면 다음 5분 동안 계속 그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한다. 그렇게 계속 5분마다 결정을 내리며 중단하기 전까지 일을 계속한다. 별것 아닌 전략이지만 시동을 거는 데에는 효과적이다.

홍계현 전문의는 목표를 세분화하길 제안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보상도 함께 정해놓는 것이다. 미래의 큰 보상보다 현재의 신속한 보상이 동기부여에 더 효과적인 것을 고려해, 목표를 단계별로 나누고 그에 따른 보상을 미리 정해둔다. 보상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일수록 좋다. 예를 들어 이번 주의 목표를 달성하면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가방을 산다거나 오늘의 일을 다 한다면 마카롱을 잔뜩 사 들고 어제 놓친 드라마를 보겠다는 식으로 필요에 따라 기간을 조정해 세우도록 한다. 박종석 전문의는 이러한 계획 세우기가 목표 달성에 효과적일 뿐 아니라 작은 성공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까지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방법들에 따라 일을 당장 시작해서 목표를 단번에 성취하는 날이 생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루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곧 꾸준하게 이런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갑자기 그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와 오직 현재의 즐거움만을 우선순위로 두어서는 안 된다. ‘에라 모르겠다’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윌리엄 너스는 이를 말과 고삐를 잡은 기수에 비유한다. 충동이라는 말이 날뛰려 하면 기수는 말의 방향을 따르기보다 고삐를 잡아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과 함께 날뛰는 즐거움만을 선택해왔다면 훈련이 필요하며, 고삐를 잡을 때마다 불편함이 동행할 것이다. 하지만 미루는 습관을 뿌리 뽑으려면 불편함을 견디는 근육을 길러야 한다.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결국 하지 못하게 된다’라는 스코틀랜드 속담이 있다. 조금 다르게 바꾸어 ‘나중에’라는 환상이 일렁거릴 때마다 곱씹으려 한다.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할 수 있다.’ 그냥 바로 할 일을 하는 것.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