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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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88일 동안 무려 2000km를. 이 순례길을 스페인어로 ‘카미노’라고 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거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거나, 혹은 하이킹을 좋아하는 사람. 세계 각국의 남녀노소가 이 길을 걷는다. 하루에 약 30km씩 한 달을 넘게 걸으니 쉽게 친구가 된다. 길에서 수많은 커플을 마주했다. 피부색은 물론, 서로 쓰는 언어도 다르다.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같이 걷다가 사귀기로 했단다. 사실 거기서는 ‘Love of Camino’라고 부를 정도로 흔한 일이다. 한창 팔팔한 청춘 남녀가 모였으니 만난 지 하루 만에 키스를 하고 둘이서 같은 방을 쓰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청춘처럼 느껴졌다. 나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혹시나’ 싶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물론 ‘인생, 뜻대로 되는 게 없더라’는 교훈만 얻고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진 이야기. 사실 ‘일본 가서 초밥을 먹었다’는 경험담처럼 흔하다. 조선 시대 문헌에도 나와 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표류했을 때도 벨테브레(박연)는 조선인 아내와 사랑에 빠져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 번은 카미노에서 한국을 떠나 3년째 배낭여행 중인 커플을 만났다. 잔뜩 때가 탄 배낭과 밑창이 너덜너덜한 신발에서 여행 고수의 냄새가 풍겼다. 둘은 몽골에서 만났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같이 여행한 지는 7개월째, 직접 만든 팔찌와 세계를 돌며 찍은 사진을 길에서 팔며 여행비를 충당했다. 일주일 중 5일은 텐트에서 잤다. 팔찌를 많이 판 날은 숙소에서 묵으며 따뜻한 식사를 한다고 했다. 기차에 무임승차하고 빵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며 같이 10여 개국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자체가 성혼선언문처럼 들렸다. 이무송과 노사연 부부도 이들 같은 고난과 역경은 못 겪어봤으리라. 꼭 소개를 받거나 어디 근사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야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물며 불금의 이태원에선 하루에도 수백 커플이 탄생하는데 낭만과 외로움이 공존하는 여행지는 오죽할까.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첫 만남에서 운명을 느낀 경험’에 대해 40.6%가 긍정적으로 답했다고 한다. 그중 운명적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로 ‘여행지’가 29.9%로 1위를 차지했다. 여행지에서의 사랑,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는 더 빠르고 가볍다. 1년 전, 대학교 친구가 런던에 놀러 갔을 때 SNS에 사진을 올리며 해시태그로 #England, #London을 썼는데 웬 영국인 남자가 댓글을 달았다고 했다. 꽤나 호의적이어서 다이렉트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같이 피시앤칩스를 먹고 시내 구경을 했다고. 저녁에 와인을 마시며 입술을 맞췄는데 그 어떤 치즈보다 살살 녹았다나 뭐라나. 한국에 와서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휴가 때마다 날아가고 날아오고 하더니 난데없이 올해 9월에 결혼식을 올린단다. 남북정상회담도 아니고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만난 남자는 그놈이 그놈이었는데, 이 사람은 달라”라며 거만한 표정으로 청첩장을 건넸다. 그놈이 그놈이면 차라리 가깝고 말 잘 통하는 놈을 만날 수는 없는 건가.

대체 왜 여행지에서 쉽게 불꽃이 튀는 걸까? 여행지는 설렘을 동반한다. 소매치기는 경계해도 친구가 생기는 것에 선을 긋지는 않는다. 혼자 여행할 때는 더욱 그렇다.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다. 해질녘이 되면 정말 좋은데 마음 한쪽에는 ‘옆에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며 조금만 말이 통해도 쉽게 감정이 생긴다. ‘이런 경험도 여행의 일부니까’라며 대범해진다. 어쩌면 저 문장이 마음을 여는 만능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여행지에서 아무나 만날 수는 없는 법.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조심하라. 갑자기 나타나서 짐을 들어준다든가. 묻지도 않았는데 길을 알려준다거나 비싼 식사를 산다고 하면 경계를 한 단계 높일 필요가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숙소 위치를 묻거나 일행은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도 조심할 것. 만약 불쾌할 정도로 스킨십을 한다면 뺨을 때리거나 낭심을 걷어차거나 신고하라. 그래도 질척인다면 인간의 뼈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쇄골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당겨라. 수수깡처럼 뚝 부러진다. 여행지에서 쓸 수 있는 간단한 호신술이다. 그나저나 대학교 친구에게 축의금은 얼마를 내야 하지? 영국으로 이사하면 왠지 내 결혼식에는 안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