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복판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질까? 여기 여섯 명의 젊은 디자이너가 보내온 답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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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전>의 행사 의도와 캐릭터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 스티커, 배지, 컬러링 북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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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우사단로에 자리한 워크스. 커튼 뒤편이 작업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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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겸한 매장에는 다양한 독립출판 서적과 다른 디자이너의 제품이 진열돼 있다.

워크스 | 이연정×이하림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숍인 워크스가 기획한 <과자전>은 소규모 디저트 플리마켓에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 행사가 확장됐다. 기획력과 디자인이 만났을 때 생기는 시너지를 명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워크스의 시작 대학 동기로 만나서 함께 작업실을 겸한 매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5월부터다. 지금은 디자이너들이 작업실을 카페나 제품을 위탁 판매하는 공간으로 확장하는 추세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낯선 개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홍보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워크숍을 열거나 작업 기술을 공유하는 등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워크스의 방향성 기본적으로 디자이너 스튜디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과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의 접점을 찾아 작업하는 것이 중요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의 방향성이 성립된 것 같다. 아무래도 <과자전>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인지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작업을 많이 하는 곳으로 기억하곤 한다. 새로운 브랜드의 브랜딩이나, 기존 브랜드와의 작업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 삼청점 매장의 제품 패키징 작업도 그중 하나다.
과자전 <과자전>은 아마추어 파티시에들이 참여하는 디저트 플리마켓이다. 처음에는 고작 다섯 팀이 참여했던 소규모 행사가 점차 소문이 나며 일산 킨텍스,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릴 정도로 거대해졌다. <과자전>을 처음 기획할 때는 행사가 일회성으로 그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들었던 로고와 식빵, 쿠키 캐릭터들을 발전시키며 다양한 콘셉트의 아트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감의 근원 영감을 주는 요소가 그때그때 바뀌기 때문에 하나를 꼽긴 어렵다. ‘귀여운 것을 향한 열망’이 젊은층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것 같긴 하다. 의도적으로 귀엽게 연출했던 <과자전> 역시 반응이 좋았던 걸 보면 말이다. 가장 최근의 <과자전>은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행사를 열었는데, ‘서울과자올림픽’이라는 올림픽 콘셉트에서 88서울올림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글링’을 하며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많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다양한 공간이 늘어나는 것을 응원한다. 수요가 생긴다는 건 그만큼 취향이 세분화되는 과정인데, 사람들이 찾고, 또 디자이너들이 자신있게 작업물을 내놓는 순환이 이뤄지면 좋겠다. 최근 브랜드들이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와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흐름을 느낀다. 예산이 큰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하다. 서울에서 존재감을 가지려면 우리도 더 노력해야 한다. 워크스 공간을 찾아온 이들을 위한 볼거리를 계속 생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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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복고’라는 콘셉트에 맞게 제작한 은혜직물의 제품들. 동백꽃, 해녀, 돌하르방 등 제주를 모티브로 삼은 제품들도 눈에 띈다.

은혜직물 | 조은혜×강정주
영화를 만들던 남자와 옷을 만들던 여자의 공통의 관심사가 ‘직물’에서 마주쳤다. 정체 모호의 아름다움과 한국적인 미를 동시에 가진 은혜직물은 그렇게 탄생했다.
은혜직물의 시작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삼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우리만의 스타일을 찾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함께 침구회사에 입사해 1년간 일하기도 했다. 은혜직물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달고 활동한 것은 2015년 3월부터다.
영감의 근원 오래된 상점이나 동네를 걸어 다니면서 의외의 패턴을 발견하곤 한다. 시골 가게의 커튼처럼 촌스럽지만 재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1930~40년대 풍경을 담은 사진이나 일본의 오래된 광고 사진도 좋은 참고가 된다.
작업의 방향 ‘규방문화’처럼 전통적인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흉내 내기에는 이미 진지하게 작업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꼭 한국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감성을 가진 다른 나라의 문화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아시아 복고’라는 정의가 우리 작업에 걸맞을 것 같다.
작업의 범위 쿠션과 파우치 위주로 제작하고 있다. 제주를 주제로 삼아 해녀, 돌하르방, 유채꽃을 소재로 한 양말과 손수건, 가방, 쿠션을 제주의 소규모 잡화점과 카페에서 판매 중이다.
고민 어떤 패턴을 작업해야 할지, 반응이 어떨지, 수량은 얼마나 제작해야 할지가 가장 고민스럽다. 그래서 대구의 방직 공장을 다니면서 시장 조사를 하고, 소량으로 수입해서 판매하는 원단도 꼼꼼히 살피며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느낌과 근접한 것을 찾는 데 힘썼다. 이렇게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디자인한 패턴을 이용한 작업도 곧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직물 시장은 최근 가장 치열해진 시장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에서 치열하지 않은 게 있나? 다른 창작자들을 신경 쓰지 않고, 우리 걸 확고하게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고 지켜내는 게 가장 큰 숙제다. 그것만 지킨다면, 견디고 노력하다 보면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 지금까지는 인스타그램(@eunhyefabric) 계정뿐이었는데 곧 온라인 쇼핑몰(www.eunhyefabric.com) 개장을 앞두고 있다. 직물은 직접 촉감을 만져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실과 겸할 수 있는 쇼룸도 열 예정이다. 가장 기대되는 건 곧 선보일 리리키친과 소소문구와의 협업 제품 출시로, 파인 아트 작가와의 패턴 아트워크도 준비 중이다. 지금 은혜직물의 심벌로 사용하고 있는 제비 외에도 십장생 등 좋은 의미를 가진 옛 소재를 작업에 접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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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 Hyang- Graphic Symphonia>.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작품. 한국 전통색을 조화롭게 반복시켜 한자 ‘교(交)’자 형태로 타이포그래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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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하장 및 크리스마스카드 기획 전시회의 메인 포스터. 계사년 뱀의 형상을 ‘복(福)’으로 문자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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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의 요청으로 작업했던 포스터. 백두대간과 탄광마을로서 태백의 정취와, 새롭게 산소도시로 도약하는 도시의 힘을 ‘太’, ‘白’ 문자로 표현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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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가루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물들여 만든 전통 사탕인 옥춘당을 ‘축’ 자로 형상화했다. 한국 잔칫상에 놓이는 고임 음식의 형태를 빌려 반복과 쌓임의 구조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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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색인 색동을 이용해 한글 ‘복’의 리듬감을 살려 표현했다.

CBR Graphic | 채병록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의 접점에 있는 작업을 채병록은 한 장의 포스터에 담아낸다. 획과 색, 패턴을 자유롭게 섞어내는 채병록은 가장 한국적인 그래픽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 중 하나다.
작업의 시작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원래부터 타이포 그래피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편집 디자이너 일을 했는데 잡지나 책처럼 여러 페이지를 만드는 것보다 효과적인 한 장을 만드는 게 즐거웠다. 드라마와 CF의 차이라고나 할까? 타이포그래피는 학문적으로 접근해야한는 부담이 있었다. 내 색깔을 가진 ‘ 개인(Player)’이 되고 싶어서 일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작업의 방향성 동양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 문자도 그림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형태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를 이미지화하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지향한다. 기본적으로는 낙관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 ‘축’, ‘복’을 매년 다른 느낌으로 작업하고 있는데 내게도 복이 들어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 보는 사람도 즐거워지는 메시지이지 않나?
영감의 근원 백자, 단청 같은 것보다는 기억 속에 있는 한국적인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할머니가 명절 때 준 형광빛 박하사탕, 제사상에 올리는 사탕인 옥춘당처럼 전통적이면서도 ‘팝’적인 요소들이 있다. 스승님인 사토 고이치 역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불가게에서 본 색동이불에서 신선함을 느꼈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그래픽 디자인 서적을 보고 남의 작업을 감상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래시장, 청계천의 공구상가를 지나며 본 사각 철골이 포개져 있는 이미지들에서 영감을 받곤 한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하다 보니 사회의 전반적인 디자인 수준과는 동떨어진, 독립적인 디자인 수준만 높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서로 비슷해 보이는 인상도 받는다. 기술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원래 사용하던 프로그램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이 생기는 등 매체가 계속 바뀔 게 분명하니까. 때로 ‘어떤 프로그램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그걸 알려주는 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 나는 또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 사상과 스타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 세계 수출 1위인 국산 헬멧 회사 HJC와 함께 타이포그래피가 도드라지는 헬멧 디자인에 도전하려한다. 포스터와 달리 실제로 기능이 있는, 물성이 있는 제품을 만드는 데에서 새롭게 보람을 느낀다. ‘복’을 모티브로 한 오피스 용품을 비롯해서 제2 롯데월드와 DDP에 들어갈 기념상품 등도 제작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