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패션계의 뜨거운 감자, 디자인 표절 논란이 다시 일었다. 누군가는 영감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표절을, 또 스타일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이 혼란 속에서 과연 우리는 카피캣을 찾을 수 있을까?

1 제프리 빈이 2003년에 선보인 울 코트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은 세린느의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2 윤은혜의 표절 논란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아르케의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 3 샤넬을 자신의 이름을 따 ‘브라이어넬’ 이라 패러디한 LA 출신 디자이너 브라이언 리슈텐버그의 스트리트 웨어 컬렉션. 4, 5 꼼 데 가르송을 패러디한 SSUR의 비니와 티셔츠. 6 까르띠에의 로고를 패러디한 SSUR의 모자.

1 제프리 빈이 2003년에 선보인 울 코트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은 세린느의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2 윤은혜의 표절 논란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아르케의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 3 샤넬을 자신의 이름을 따 ‘브라이어넬’ 이라 패러디한 LA 출신 디자이너 브라이언 리슈텐버그의 스트리트 웨어 컬렉션. 4, 5 꼼 데 가르송을 패러디한 SSUR의 비니와 티셔츠. 6 까르띠에의 로고를 패러디한 SSUR의 모자.

 

 

배우 윤은혜가 데뷔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저조해서도 아니요, 불륜 같은 치명적인 스캔들에 얽힌 것도 아니다.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은 뜬금없는 의상 디자인 표절 시비. 최근 중국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 아르케의 프릴 장식 코트와 너무나 유사한 의상을 자신의 디자인이라고 소개해 국내외 패션 관계자들과 팬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자연히 아르케의 디자이너 윤춘호는 SNS를 통해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표했고, 이에 대해 윤은혜의 소속사는 되레 ‘배우의 이름을 이용해 브랜드를 홍보하지 말라’는 강한 반박으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설상가상 그녀가 같은 프로그램에서 앞서 선보인 다른 의상도 돌체앤가바나와 BCBG 막스 아즈리아의 디자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이제는 그녀의 도덕성마저 의심받는 상황. 그렇게 윤은혜의 패션 디자이너 도전기는 순식간에 그녀를 ‘믿고 보는 여배우’에서 ‘뻔뻔하고 필사적인 패셔니스타 워너비’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르케의 디자인을 정말로 표절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창작의 세계에서 결과물의 유사성은 이렇게도 위험하고 예민한 문제라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실과 사후 대처가 안타까울 뿐. 사실 패션계에서 표절시비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지난 9월 뉴욕 패션위크 기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의 슈즈 디자이너 마리엄 자데가 최근 ‘만수르 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브랜드 만수르 가브리엘이 자신의 뮬 슬리퍼를 똑같이 베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상품 구매 기록 등 이를 뒷받침할 증거도 충분했다. 실제로 두 브랜드의 뮬 슬리퍼는 컬러와 소재, 통굽의 두께 등 대부분의 요소에서 유사한 모습을 띠었는데, 만수르 가브리엘 측은 지극히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디자인을 적용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 싸움은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질 기세다. 이렇듯 디자이너들끼리의 신경전 외에도 패션계는 표절과 끝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도대체 어디부터가 표절이고 또 어느 정도 표절까지 우리는 용인할 수 있는 걸까?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과연 스스로 독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오마주와 스타일의 유사성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누가 손해를 보고 누구에게 이득인지 모를 표절 공방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계속 되고 있다.

끊이지 않는 표절의 연결 고리
“레이스 달린 원피스요? 발렌티노예요. 장당 3만8천원요. 그때 보신 겐조 티셔츠까지 각각 일곱 장요? 네, 네.” 발렌티노 드레스가 단돈 3만8천원이라니,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이 정보의 출처는 바로 동대문의 보세 도매 시장이다. 최근 몰려든 중국 관광객과 ‘바이어’들의 방문으로 그야말로 일년 내내 불야성을 이루게 된 동대문은 2만8천원짜리 세린느 셔츠와 5만원짜리 발맹 재킷이 흔히 거래되는 곳. 하지만 제재는 쉽지 않다. 진품과 아예 똑같이 만들어 명품이라고 속여 팔던 모조품은 LVMH 같은 거대 기업들의 견제와 전문감별사를 둔 정부의 단속에 의해 표면적으로 꽤 많이 근절된 상황(하지만 산업이 음지화되고 오히려 더 조직력을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트렌드와 스타일의 유사성을 무기로 해외 디자이너 컬렉션을 물에 탄 듯 희석한 카피 제품은 표절의 기준부터 잡기가 애매하다.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독립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동네북 신세다. 해외 명품 브랜드에 비해 디자인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터라 단속의 범위에서 아예 비껴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브랜드 고엔제이의 유상재 팀장이 호소했다. “동대문은 정말 골칫덩어리죠. 홈페이지에 새 시즌 룩북을 공개하기가 무섭게 카피 제품을 만들어 팔아요. 그리고 거기서 팔린 옷은 전국의 보세옷 가게, 온라인 쇼핑몰에서 다시 팔리고, 이제는 중국으로까지 유입되는 것 같더라고요. 주기적으로 자체 단속도 도는데, 카피 상품이니 진열에서 내려달라 항의해도 그 순간뿐이에요.” 그렇게 디자이너들이 한 시즌 내내 고민하며 애써 고안해낸 상품은 하루아침에 남의 ‘신상’이 되어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표절이 동대문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선보이는 내셔널 브랜드의 룩북에서도 해외 명품은 물론 국내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의 표절 상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소규모 브랜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생산 라인과 유통 체계를 갖춘 터라, 제품이 매장에 깔리는 시기가 오히려 오리지널보다 빠르거나 낮은 단가로 소비자가마저 한참 저렴해지는 억울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혹여나 디자이너들을 언제든 디자인을 도용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로 보고 있지는 않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러니 ‘윤은혜 사태’로 골머리를 앓은 윤춘호 디자이너가 SNS로 표절의 근거를 오목조목 짚어 따진 건 결코 과잉 대응이 아니며, 자신의 디자인과 생업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어찌됐건 듣도 보도 못한 디자이너가 윤은혜 덕에 인지도를 올린 건 사실’이라는 악플러들의 무지함이나, 인지도가 없으니 조금 베끼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일부의 안일하고 비도덕적인 태도는 분명히 반성과 각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또 반전이 있다. 동대문의 카피 상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국내 디자이너들 중 일부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손꼽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새 컬렉션에 대한 보안 유지는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비교적 좁은 시장의 국내 디자이너들끼리마저도 서로 표절을 경계한다는 사실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에디 슬리먼은 생 로랑의 수장으로서 선보인 첫 컬렉션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 시즌 톱숍, 포에버21 등 SPA 브랜드를 역으로 표절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고, 피비 파일로의 저력을 과시한 세린느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소매를 묶은 울 펠트 소재 코트가 2003년 디자이너 제프리 빈의 코트와 거의 동일한 디자인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카피 상품으로 또 한번 재탄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패션계 일부 인사들은 이를 두고 ‘표절이 표절을 낳았다’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몇 년 전에는 크리스찬 루부탱과 이브 생 로랑이 붉은 밑창의 주인을 둘러싸고 법적 공방을 벌인 적도 있었다. 결국 승리는 크리스찬 루부탱에게 돌아갔지만, 붉은 밑창의 디자인적 가치와 소유권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표절의 새로운 국면, 재해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일찍이 한 인터뷰에서 “더 이상 새로운 패션은 없다. 누가 과거의 것을 가장 새롭게, 잘 재해석해내느냐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표절의 정의와 경계는 너무나도 모호하고, 산업은 커질 대로 커져서 디자이너의 유명세나 브랜드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서로 비슷비슷한 디자인을 선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기정 사실. 그래서 무작정 베끼는 표절과 디자인적 요소를 연구한 뒤 재해석해 선보이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패션 콘텐츠 디렉터 연시우도 마크 제이콥스의 말에 한 표를 던졌다. “누가 잘못했냐를 따지는 일은 너무 소모적인 것 같아요. 이제는 과거의 것을 얼마나 제대로 공부했는지, 그리고 창의적으로 응용하는지가 디자인의 관건이 되었으니까요. 특히 요즘은 상품 그 자체보다는 상품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에 사람들이 더욱 흥미를 가져요.” <하퍼스 바자>의 패션 에디터 이지민도 비슷한 듯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자라 같은 일부 SPA 브랜드의 경우 표절이라기보다는 트렌드를 재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얼핏 보기에는 디자이너들의 런웨이 컬렉션을 베낀 것 같지만 사실은 디자이너들의 제안과 의도를 고려해 새로 디자인한 옷이 대부분이거든요. 고민을 거쳤다는 건 단순 표절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코트 한 장에 3백만원을 투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최신 트렌드를 좀 더 저렴한 옵션으로 제안한다는 건 소비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죠.” 그녀의 말대로 표절이 패션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저렴한 표절, 혹은 재해석 상품이 있기에 우리는 각 자의 가계 상황에 맞춰 패션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트렌드가 자연스레 형성되어야만 명품의 가치가 반대로 더 올라가기도 한다. 재해석트렌드에 힘입어 최근에는 명품 브랜드를 아예 대놓고 패러디하는 브랜드도 생겨났다. 꼼 데 가르송의 로고를 ‘Comme des Fuckdown(영어의 Calm the Fuck Down 대신 ‘제발 좀 진정하라’는 의미로 쓰인 은어)’으로 바꿔 프린트한 SSUR의 티셔츠와 비니 시리즈는 지 드래곤 같은 아이돌 스타들의 공항 룩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에르메스 대신 동네 친구를 뜻하는 ‘HOMIES’, 세린느 대신 고양이를 뜻하는 ‘FELINE’을 새겨 넣은 브라이언 리슈텐버그의 스웨트 셔츠는 마일리 사이러스와 카라 델레바인 같은 스타들의 단골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계의 표절 논쟁은 결국 양심의 문제, 도덕의 문제로 돌아온다. 카피캣을 찾아 책임을 묻는 것에 앞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영감이 표절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하고, 소비자들은 표절 상품을 입는 것을 창피해할 줄 알아야 한다. 패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공부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아무리 “진정으로 독창적인 디자이너라면 표절당할 각오를 하라. 어차피 패션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생명을 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지만 이는 세상의 수많은 소규모 브랜드에 게는 너무나 가혹한 이야기다. 무분별하고 비양심적인 표절로 엉뚱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디자이너들은 더욱 부지런하게 고민하고 소비자는 더욱 똑똑하게 패션을 소비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