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도 진보하는지 궁금하다면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재의 의상들이 컬렉션을 채워가고 있으니까. 가까이서 보고 만져보면 더 멋진 의상에 대하여.

1 아름다운 균열

발렌시아가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선보인 알렉산더 왕이 데뷔 컬렉션을 위해 선보인 것은 특수 가공기법을 동원한 소재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을 연상시키는 니트 의상들. 가까이서 보면 마치 석고를 바른 것 같은 거친 질감이 특징인데, 골 지게 짠 니트 스웨터 위에 페인트를 두껍게 바르고 굳힌 후 당겨서 자연스러운 주름을 완성했다. 거칠어 보이지만 실제로 만져보면 무척 부드럽고 포근하다.

2 원단과 원단이 만났을 때

건축적인 실루엣과 장인의 손맛으로 완성되는 보테가 베네타 스타일을 창조하는 토마스 마이어는소재와 장식 개발에 특히 공을 기울인다. 매 시즌 새로운 기법을 적용해 선보이는 의상들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가 가을/겨울 컬렉션을 위해 시도한 실험은 바로 원단과 원단의 충돌이다. 물감을 물들인 듯한 우아한 드레스는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의상이다. 울 소재 드레스에 실크 오간자와 플란넬 등의 소재를 단단히 붙여 입체감을 더한 것이다. 가위로 투박하게 잘라내 방치한 끝단 처리도 인상적이다.

3 겨울에 입는 여름 소재

토마스 마이어의 또 다른 작품 하나. 가죽을 얇게 잘라 붙인 것 같은 구조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다. 가죽 또는 고무처럼 보이는 가늘고 긴 검은색 라인의 정체는 여름철 의상과 액세서리에 주로 쓰이는 라피아 소재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라피아 소재를 정교하게 엮어서 드레스에 그림을 그리듯 표현한 드레스는 하나의 작품이라 할 만하다.

4 프린트 쿠튀르

후세인 샬라얀이 패션계에 남긴 업적 중 하나는 하이테크를 접목하는 실험적인 아이디어다. 그가 가을/겨울 컬렉션을 위해 숙고한 결과는? 전자파의 사이키델릭한 색감과 무늬를 프린트한 뒤 이를 레이저 커팅하고 재조합한 3D 프린트다. 얼핏 보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붙인 듯한 형태가 흥미로운 드레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5 서로 다른 소재의 만남

혁신적인 소재를 즐겨 선보이는 에르뎀.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네온 색상의 PVC와 모헤어, 울 소재로 격자무늬 패턴을 만들고 여기에 타조 깃털을 입체적으로 장식해 재킷과 스커트를 완성했다. 색다른 소재의 유행에 동참하고 싶다면, 미묘하게 소재에 변화를 준 에르뎀의 의상을 추천한다.

6 가죽으로 말해요

모피를 잘 다루는 펜디는 멀리서 봤을 때 거친 모피처럼 보이는 가죽 의상을 대거 선보였다. 팔 부분의 디테일은 가늘게 자른 수천 개의 가죽을 정교하게 붙인 것이고, 양털처럼 보이는 앞 부분은 가죽을 말아서 장식한 결과물이다. 철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묵직한 무게가 아쉽지만, 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훌륭한 겨울 의상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7 꽃이 된 깃털

드리스 반 노튼, 프로엔자 스쿨러, 에르뎀 등이 이번 시즌 주목한 소재는 깃털이다. 평범한 기본아이템에 깃털 장식 의상을 더해 색다른 옷 입기를 제안한 이들과 달리,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는 깃털을 꽃무늬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창의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깃털을 도안에 맞춰 일일이 손으로 자르고 시폰 위에 하나하나 붙인 드레스가 그것. 덕분에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꽃무늬를 한층 진화된 방식으로 즐길 수 있게 됐다.

8 그냥 트위드가 아닙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평범한 트위드 소재를 비범하게 탈바꿈시켰다. 기존의 트위드 소재에 비해 광택이 없어 빈티지한 느낌을 선사하는 이 트위드의 이름은 ‘펠티드 트위드(Felted Tweed)’. 트위드를 느슨하게 직조한 후 뜨거운 비눗물에 넣고 짜서 바짝 말리고, 다시 물에 넣은 후 꺼내 높은 열과 힘을 가해 압축하는 작업 과정이 펠트를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9 네오프렌 레이스

현재 가장 ‘뜨거운’ 소재 중 하나인 네오프렌. 프로엔자 스쿨러의 두 디자이너는 잠수부나 해녀의유니폼에서 벗어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네오프렌 소재에 주목했다. 독특한 양감의 네오프렌 소재를 레이저 커팅한 후, 여러 장을 겹치고 새틴 소재로 마무리해 구멍 난 레이스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 구김이 가지 않아 맘놓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가볍고 따뜻한 겨울레이스가 탄생했다.

10 털실로 그린 추상화 한 점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붓 자국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옷은 ‘상식의 파괴’를 일삼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작품이다. 얇고 투명한 메시 소재에 알록달록한 털실을 불규칙하게 얽히고설키게 교차해 완성한 것인데, 컬렉션처럼 담백한 화이트 셔츠 위에 입으면 디테일을 더욱 부각할 수 있다. 어린이가 멋대로 낙서를 한 것 같은 인상을 덜어내고 싶다면 크고 넉넉한 코트로 디테일을 살짝 가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