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하는 건 명백하게 다른 일이다.

한 권에 도서관과 갤러리가 함께 존재하는 예술만화. 위부터 , , , ,

한 권에 도서관과 갤러리가 함께 존재하는 예술만화. 위부터 <아스테리오스 폴립>, <캔서 앤더 시티>, <바느질 수다>, <에식스 카운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하는 건 명백하게 다른 일이다. 책을 그럭저럭 읽는다는사람이 자신이 읽는 책을 모두 산다는 건, 어디 로열패밀리의 후손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 많은 책을 어디에 보관한담? 그래서 책벌레의 싹이 보이는 아이를 둔 어머니는 일찌감치 교육시킨다“. 책은 빌려 보는 거야.” 그리고 맹모삼천지교의 마음으로 좋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그런 맹모조차 포기해야 할 책이 있다. 일명‘ 예술 만화’로불리는 장르다. 한 권에 도서관과 갤러리가 함께 있는 셈인데, 누가 만류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신기한 책이다. 문학을 만화로 옮겼음에도 걸작으로 손꼽는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책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전의 문학은 이 책으로 끝났고, 이후의 문학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 읽어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책이다. 홍차에 적셔 먹는 마들렌의 맛 덕분에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프루스트 효과’를 만들어낸 이 일화 외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없다(마들렌 이야기는 23페이지에 나온다). 모두 7부작, 총 4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복잡한 구성은 그 어느 책도 따라갈 수가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유복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지 못했고, 몸이 병약하여 바깥 출입보다 집에서 있어야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면 절대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카투니스트 스테판 외에가 이 책을 각색해 만화책으로 옮기자 사람들이 뛸 뜻이 기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그림과 원작에 충실한 각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 큰 선물이었고, 원작과 별개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이 책은 1년 혹은 2년마다 한 권씩 나오고 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완결되지 않았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막 출간한 <바느질 수다>는 한마디로 도발적인 책이다. 차도르 속에 감춰진 이슬람 여인들의 솔직한 성적 수다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궁극적인 여성의 삶이다. 사랑과 섹스, 배신과 절망, 찌질한 남자들에 대한 원망. 폐쇄적인 이슬람 사회 속에서도 여성은 여성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막말하는 할머니, 금욕적인 어머니, 매력적인 사차원 이모, 그리고 이웃들과 양탄자를 만드는 동안 나누는 수다는 비슷한 형식을 가진 영화 <아메리칸 퀼트>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더 가깝다.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이 수여하는 알프-아르상(Prix Alph-Art) 등을 수상한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는 이란 태생으로, 이슬람 사회에 대한 세계의 오해를 풀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과감한 표현과 생략된 배경, 흑백의 강렬한 인물의 이미지가 시선을 잡는다. 같은 문화권에서 날아온 그래픽 노블인 <엑시트 운즈>는‘분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텔아비브젊은이들의 자화상’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이나 정치색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폭탄 테러가 빈번한 도시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는 주인공의 여정 속에서 시대의 젊음을 보여줄 뿐이다. 거리의 무덤에 꽃과 마음에 드는 여자와의 섹스가동일한 무게를 갖는다. 젊음은 그런 것이다. 루트 모단(Rutu Modan)의 간결한 듯해도 볼수록 섬세한 그림과 함축적인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책이다.

예술적인 만화에 본격적으로 입문할 생각이라면, 예술만화 출판으로 쌍벽을 이루는 민음사의 임프린트 세미콜론, 열린책들의 임프린트 미메시스의 발간 목록을 살펴보길. 세미콜론은 <해적 이삭> 등의 뛰어난 예술만화와 <스콧 필그림>, <배트맨> 등의 그래픽 노블을 출간해 마니아층이 두텁다. <캔서 앤더 시티> 같은 재기발랄한 카툰북도 함께 출간하고 있다. 특히 에이즈에 걸린 사람과의 실제 사랑을 담담하게 그려낸 프레데릭 페트르스의 <푸른 알약>은 명불허전. 미메시스의예술만화는 보다 문학적인데 한 마을의 구성원들의 인생 하나하나를 조명한 제프 르미어의 <에식스 카운티>와 유명 건축가에게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그린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대서사시라고 해도 될 정도의 깊은 스토리로 감동을 준다. 수영장에서 사랑에 빠진사춘기를 그린 <염소의 맛>은 책 한 권이 마치 단편 영화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다워서, 만화라는 예술 장르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이런 예술 만화를 컬렉팅하기 시작했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일단 책장에 들인 후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말 것. 빌려준 책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러 번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