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착 감기는 맥시 드레스와 점프슈트, 스웨트 팬츠와 스웨트 셔츠. 요즘 유난히 에디터의 눈길을 끄는 이 ‘잠옷 같은’ 옷을 입고 집 밖을 나와봤다. 과연 이 옷들은 모델이나 알렉사 청 같은 옷 잘 입은 스타들이나 소화할 수 있을까?

매 시즌 디자이너의 컬렉션이 패션 사이트에 올라올 때면 일단 마음에 드는 착장의 모델 사진을 컴퓨터에 죄다 끌어다 놓기 바쁘다. 내 컴퓨터에 포획되는 단골 손님은 마가렛 하울과 이자벨 마랑, 스텔라 맥카트니, 다미르 도마, 필립 림 정도. 물론 이번 시즌 컬렉션의 사진들도 이미 컴퓨터에 넉넉히 저장되어 있는데, 하릴없이 그 폴더를 뒤지다가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소파에 기대서 책을 보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잘 때 입어도 될 ‘잠옷’의 모습 같기도 하다는 것. 이런 스타일이 컬렉션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몇 시즌 전, 그러니까 스키니 팬츠 대신 몸을 따라 여유 있게 흘러내리는 실루엣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70년대 풍의 길고 가는 실루엣이 다시 돌아온 이번 시즌에는 이런 잠옷 같은 옷들이 더욱 풍성해졌다. 누구는 별 희한한 트렌드가 다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이 잠옷 같은 옷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이런 옷들을 입어보기로 했다. 옷장을 열었다. 다행히도 내 옷장에는 이미 잠옷 같은 옷 입기에 활용할 만한 것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홈 드레스 같은 롱 드레스 몇 벌과, 꽃무늬 점프슈트,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 흐물거리는 시스루 원피스와 진짜 잠옷 같은 팬츠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난 원래부터 이런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어쨌든 모두 꺼내서 옷장 맨 앞줄에 쭉 걸어두고 차례차례 입기 시작했다.

우아한 홈 드레스 입고 외출하기레이튼 미스터와 클로에 셰비니는 이런 홈 드레스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에까지 등장했다. 이런 롱 드레스는 소재가 하늘하늘한 데다 주로 꽃무늬 같은 화려한 프린트까지 있어서 매니시한 아우터를 매치하는 것이 현명하다.

1단계. 난이도 하, 우아한 홈 드레스 스타일

유치원에 다닐 때는 화려한 프린트(주로 꽃무늬)가 있는 홈 드레스를 입고 싶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항상 홈 드레스를 입고 있던 이모네로 놀러 가는 게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키의 두 배쯤 되는 치렁치렁한 이모의 홈 드레스 자락을 끌고 온 집안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도 그 홈 드레스에 집착한다. 그렇다고 진짜로 집에서 홈 드레스를 입는다는 건 아니고, 홈 드레스 같이 몸을 따라 하늘하늘하게 흘러내리는 롱 드레스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런 롱 드레스는 보헤미안 스타일이 유행할 때마다 다시 등장하곤 하는데,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이 유행은 겨울을 지나 이번 봄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마크 제이콥스도, 소니아 리키엘도, 돌체앤가바나도, 모두 이 롱스레스의 매력에 푹 빠진 디자이너들.

물론 나도 푹 빠졌다. 내 옷장에 있는 홈 드레스 스타일의 옷은 총 7개. 제일 많은 꽃무늬가 네 개, 줄무늬 하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나머지 두 개다. 어느 날 갑자기 집 앞 카페에 와 있다는 친구의 전화가 왔다. 재빠르게 꽃무늬 롱 드레스 중 하나를 골라 입고 트렌치코트를 걸쳐 입었다. 참고로 이런 여성스러운 드레스에는 매니시한 트렌치코트나 재킷을 입어야 더 예쁘다. 카페에 도착해서 코트를 벗고, 커다란 가죽 소파에 몸을 푹 묻자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기 시작한다. “그 옷 입고 그렇게 소파에 앉아 있으니까 여기가 너희 집 같잖아. 사람들이 보면 이 카페 주인으로 알겠다.” 종종 얼굴을 보는 그 카페의 주인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옷이 참 독특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말은 듣기 좋게 둘러댄 매우 완곡한 표현이고, 그 숨은 뜻은 아마도 ‘그런 잠옷 같은 옷을 입고 카페에 오시다니 용기가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옷, 진짜 잠옷은 아니겠죠?’ 정도였겠지. 하지만 그들이 모른다. 레이튼 미스터나 클로에 셰비니는 집 앞 카페 정도가 아니라, 가장 차려입어야 하는 레드 카펫 위에서도 이런 잠옷 같은 롱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을. 친구도, 자주가는 카페 주인도 이해해 주지 않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 홈 드레스 같은 롱 드레스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롱스커트나 실크 블라우스 같은 여성스러운 제품과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를 매치하면 신선한 스타일링을 연출할 수 있다. 마이클 코어스나 앤 발레리 하쉬가 그랬던 것처럼.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알렉사 청처럼 쇼츠와 함께 보이시한 실루엣을 연출해도 좋고, 애슐리 올슨처럼 클래식한 제품을 매치해서 단정한 스타일을 연출해도 좋다.

2단계. 난이도 중,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 활용하기

스웨트 셔츠, 일명 맨투맨 티셔츠는 홈 웨어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스웨트 셔츠를 입은 남자에 대한 환상도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서 비누 냄새를 폴폴 풍기며 앉아 있는 소년의 이미지 같은. 바로 그 소년들의 스웨트 셔츠가 언젠가부터 디자이너의 패션쇼에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극히 여성스러운 스커트와의 아이러니한 매치라니! 지난 시즌 하늘하늘한 꽃무늬 드레스 위에 스웨트 셔츠를 매치한 드리스 반 노튼의 스타일링 이후로 나는 이 묘한 매력에 중독되었다. 여기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스웨트 셔츠의 사이즈는 넉넉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 우아한 롱스커트나 시폰과 실크 소재 같은 여성스러운 옷을 좋아하면서 너무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보이기 싫어하는 모순적인 취향 때문에 아침마다 고민에 휩싸이는데, 이럴 때 스웨트 셔츠의 선택은 언제나 만족스럽다. 도대체 커다란 스웨트 셔츠를 어떻게 차려입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여성스러움을 스웨트 셔츠로 적당히 중화한 마이클 코어스나 앤 발레리 하쉬의 컬렉션을 참고하면 된다. 물론 꼭 이렇게 여성스러움을 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죽 팬츠를 매치한 알렉사 청의 보이시한 스웨트 셔츠 스타일이나 스트레이트 팬츠를 매치한 애슐리 올슨의 클래식한 스웨트 셔츠 스타일도 나름의 멋이 있다.

이처럼 스웨트 셔츠와는 이미 너무 익숙하기에 이번에는 스웨트 팬츠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 대상은 얼마 전 디자이너 친구가 선물해준 레깅스 스타일의 스웨트 팬츠. 사실 선물 받은 지 좀 오래되었지만 속옷인지 겉옷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옷장 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것이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치마를 입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던 어느 날 아침, 그 스웨트 팬츠를 꺼내 입었다. 물론 엉덩이에서 한참 내려오는 길이의 박시한 셔츠, 스니커즈와 함께. 자신 있게 집에서 나왔지만 영화관까지 가는 채 20분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릎 나온 내복 바지를 입은 어느 개그맨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부끄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서 바꿔 입을까? 수십 번 고민했다. 물론 스웨트 팬츠도 얼마든지 훌륭한 외출복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스웨트 팬츠보다는 스웨트 셔츠와 더 친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잠옷입고 외출하지 맙시다아크네,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 보테가 베네타에서 선보인 진짜 잠옷 같은 옷들. 아무리 트렌드라지만 이런 옷을 입고 외출하기란 쉽지 않다. 알렉사 청과 제시카 알바도 이 트렌드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3단계. 난이도 상, 진짜 잠옷 같은 외출복

어느덧 잠옷 같은 옷 입기의 마지막 단계다. 홈 드레스 스타일의 롱 드레스는 내가 편애하는 것 중 하나고, 스웨트 셔츠도 종종 입던 것이라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스웨트 팬츠 입기도 난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좀 난감하다. 롱 드레스와 스웨트 셔츠가 잠옷인지 아닌지 살짝 헷갈리는 정도라면, 흐느적거리는 슬리브리스 원피스나 잔잔한 무늬가 있는 시스루 팬츠는 진짜 잠옷 같아 보일 것이 분명하니까. 이런 옷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샀을까 싶지만, 막상 하나씩 보면 분명 예쁜 옷이다. 이번 시즌 보테가 베네타 컬렉션이 바로 이런 트렌드의 정점을 보여줬다. 우아한 실크 잠옷 차림을 한 모델들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게다가 머리까지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가 선보인 가녀린 소녀의 파자마 스타일은 또 어떻고. 이런 옷을 실제로 입으면 어떨까? 고맙게도 제시카 알바와 알렉사 청이 먼저 시도했다. 파자마 스타일의 점프슈트를 입은 제시카 알바는 파자마 파티에 참석한 철없는 여자애처럼 보였고, 나이트 가운 같은 원피스를 입은 알렉사 청은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집 앞 정원에 산책 나온 소녀처럼 보였다.

결국 둘 다 진짜 잠옷 같아 보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특별한 장치를 하기로 했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독특한 플랫폼 슈즈 화려한 스트랩 슈즈를 신거나. 내 옷을 볼 때마다 혀를 차는 엄마는 이 날도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런 옷이 왜 유행하는 거야? 아무리 유행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입고 나가면 부끄럽지 않아? 패션 에디터들은 다 그러고 다닌다니?” 질문을 쏟아내는 엄마에게 “엄마는 트렌드를 몰라!”라고 외치고 나왔지만, 막상 집 밖으로 나오니 진짜 잠옷을 입고 외출한 것처럼 기분이 머쓱했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거리를 걸으려니 코트 안의 종잇장 같은 옷 사이로 한기가 밀려들어왔다. ‘잠옷 입고 외출하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계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다. 걸어서 가려던 계획을 수정, 급하게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갔다. 1여 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도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내 옷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무원 친구가 말했다. “이런 옷 입고 출근하면 바로 부장님한테 불려갈 거야. 그러고는 물으시겠지. 아침에 늦잠 잤어요?” 역시 이 옷을 그냥 잠옷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난 ‘복장 불량’으로 징계받을지도 몰라.” 이 친구의 직업은 대기업 임원 비서. 결국 난 슬그머니 코트를 다시 입었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코트를 벗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나는 잠옷을 입고 집 밖으로 단 한걸음도 나온 적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