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가 100미터 달리기라면 백스테이지는 릴레이 계주다. 30분의 쇼를 위해 수많은 스태프가 바통 터치를 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달린다. 후끈한 열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2011 디올 크루즈 컬렉션의 무대 뒤 이야기.

1 백스테이지 메이크업을 책임진 디올 인터내셔널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승원. 2, 4, 5 발랄하고 섹시한 복고풍 스타일이 잘 어울렸던 모델 이솜. 3 화사한 파스텔톤 아이섀도를 비롯한 메이크업 제품이 놓인 메이크업 스탠드. 6 칵테일 드레스부터 스트랩 슈즈까지 실버로 매치한 룩을 선보인 이현이.

매년 컬렉션 출장을 떠나는 패션에디터에게는 프런트로에 앉아 패션쇼를 본다는 게 특별할 것이 없겠지만, 피처에디터인 내게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런웨이와 백스테이지에 대해 아는 정보 역시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평소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나 <도전! 슈퍼모델>을 보면서 백스테이지의 후끈한 열기와 쇼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모델과 스태프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이 전부다. 한번쯤 그 분주하고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신혼여행을 떠난 패션에디터 대신 패션쇼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디올의 ‘2011 크루즈 컬렉션’의 백스테이지 취재로! 반나절 동안 백스테이지와 런웨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쇼의 모든 준비 과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금세 들뜬 기분이 되어 디올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펼쳤다.

초대장에는 ‘2011 크루즈 컬렉션’과 ‘디올 헤리티지 전시회’ 소식이 함께 적혀 있었다. ‘디올의 유산’을 전시한다니 황금으로 만든 드레스라도 전시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올해가 디올 브랜드가탄생한 지 64주년이 되는 해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삶을 서서히 되찾아가던 1947년 당시, 무슈 디올(Monsieur Dior)은 여성스럽고 우아한 의상으로 가득한, 그녀의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 디올이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로서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패션쇼에 선보인 의상 가운데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밝은 회색 실크 재킷에검은색 플레어스커트를 매치한‘바’를 비롯해 총 여덟 벌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가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패션쇼 당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10월의 마지막을 하루 앞둔 지난 30일, 아침부터 서둘러 패션쇼가 열리는 갤러리아 EAST를 찾았다. 패션쇼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패션쇼장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로 북적였다. 다행히 런웨이는 아직까지 텅 비어 있었다. 캄캄한 무대에 파란 조명이 켜지는 순간,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계단, 그리고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1950년대 파리의 풍경을 흑백의 일러스트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검은색 판이 깔린 런웨이는 금방 덮개를 걷어낸 듯 반질반질 윤이 났다. 몇 시간 뒤면 대저택의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치장한 모델들이 하나둘 걸어나올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막함마저 감도는 런웨이와 달리 무대 뒤편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수많은 스태프와 모델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메이크업을 위해 켜둔 강렬한 조명과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탓에 백스테이지 안은 한여름 날의 오후처럼 후텁지근했다. 메이크업스탠드에는 블루, 핑크, 퍼플, 라벤더, 그린 등 선명한 색상의 파스텔톤 아이섀도를 비롯한메이크업 제품과 도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오늘 패션쇼의 메이크업 룩은 봄꽃처럼 화사할 것 같다고 추측하는 사이 거울에 붙어 있는 크루즈 컬렉션 사진을 발견했다. 정수리부터 부풀린 과장된 밝은 갈색 머리와 짙은 눈썹, 길게 꼬리를 뺀 아이라인까지, 이 모든 것이1950~6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섹시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브리지트 바르도의 섹시하고 세련된 복고풍 스타일은 패션화보와 광고 콘셉트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마침 디올의 인터내셔널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승원 차장이 모델 이솜의 메이크업을 하는 중이라 메이크업 과정을 보며 메이크업 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 패션쇼에서 선보일 크루즈 컬렉션은 1950~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와 당대를 풍미했던 브리지트 바르도, 로미 슈나이더, 잔 모로 같은 여배우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어요. 막 사교계에 데뷔한 발랄하고사교적인 파리의 말괄량이 여성을 떠올리면 되요. 컬렉션의 전체적인 색채가 핑크, 민트, 살구빛, 민트 컬러처럼 화사하고 발발하기 때문에 메이크업 역시 퍼플, 그린, 블루 등 파스텔 톤의 아이섀도와 핑크 블러셔로 화사하게 연출할 생각이에요.”

7, 8 지적이고 섹시한 프랑스 여배우를 떠오르게 한 모델 이현이. 9,10 쇼가 시작되기 전 최종 점검을 하는 모습. 모델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돈다. 11 크루즈 컬렉션 의상에 매치할 카나주 패턴의 레이디 디올 백과 액세서리. 화이트와 핑크 컬러가 주를 이뤄 화사하고 발랄한 룩을 연출했다. 12,13,14 디올 헤리티지 전시장. 무슈 디올과 존 갈리아노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 8벌과 대형 모형으로 제작한 쟈도르 향수, 카나주 패턴이 새겨진 디올 콤팩트, 전자책 등이 전시됐다. 그중에서도 무슈 디올과 존 갈리아노가 발표한 컬렉션 사진과 그들이 남긴 무수한 어록을 연도별로 기록한 전자책은 디올의 64년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줬다.

모델의 얼굴에 기초 제품을 꼼꼼히 바른 후에 본격적인 메이크업이 시작됐다. 먼저 리퀴드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톤을 빛나고 윤기 있게 표현한 다음, 퍼플 계열의 섀도 여러 개를 눈두덩 전체에 부분부분 덧발라 자연스러운 음영을 연출했다. 거기에 눈썹까지 아치형으로 두껍게 그리자 생기 있고 발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이라인은 리퀴드 아이라이너를 사용해 속눈썹 라인을 따라 좁게 그린 다음 눈꼬리 쪽을 살짝 올려 빼 섹시한 눈매를 연출했다. 핑크 블러셔와 핑크와 오렌지 레드 컬러의 루즈 디올로 볼과 입술을 한껏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길고 숱이 많은 인조 속눈썹을 붙이자 살아 있는 바비인형을 보는 듯한 메이크업 룩이 완성됐다. 이솜에게 메이크업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특유의 사랑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피부 톤이 두껍지 않고 산뜻해 마음에 들어요. 평소에는 위쪽 아이라인만 그려서 자연스럽게 표현한 메이크업을 좋아하지만, 비슷한 계열의 컬러 섀도로 음영을 준 오늘 아이메이크업도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속눈썹을 붙이면 자꾸 잠이 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옆에서 메이크업을 받던 모델 이현이는 오늘 메이크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으로 눈썹을 꼽았다.“눈썹을 진하고 두껍게 그렸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게 빼서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메이크업을 모두 끝낸 그녀를 따라 헤어스타일링을 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밝은 갈색 계열의 헤어피스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발랄한 느낌을 살리고, 그루브를 사용해 자연스러운 컬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촘촘한 빗으로 과장되게 부풀린 ‘미스코리아’ 스타일을 완성했다. 미스코리아 출신 여배우들의 대회 당시의 자료화면을 보면 지금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아 보이는데, 이날 모델들은 헤어와 메이크업 컬러가 전체적으로 밝은 톤이어서 그런지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느낌이었다. 모델들은 리허설을 하기 전에 패션쇼의상으로 갈아입고 백스테이지 안을 뛰어다니는데, 그 안에 함께 있던 나는 살아 움직이는 바비인형들 틈에 있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첫 번째 리허설이 시작되고, 허리선이 잘록하게 들어간 분홍색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한혜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톤 온 톤으로 매치한 카나주 패턴의진분홍 레이디 디올 백이 드레스와 근사하게 어울렸다. 플로럴 패턴의 슬리브리스 칵테일드레스를 이솜은 발랄하고 섹시한 매력을 폴폴 풍겼다. 이현이는 민소매 칵테일 드레스부터스트랩 슈즈까지 실버로 매치한 룩을 선보였다. 그렇게 총 26벌의 의상을 보여주는 리허설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최종 리허설을 하기 전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아침부터 시작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은 쇼가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 계속됐다.

디올 헤리티지 전시회 패션쇼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디올의 기프트 박스를 100배 확대해놓은 듯한 전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장 안은 디올의 정체성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상징물과 창작물로 꾸며져, 전시회라기보다 박물관에 가까웠다. 존 갈리아노가 ‘오트 쿠튀르는 디올의 심장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디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오트 쿠튀르 드레스여덟 벌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무슈 디올이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바(1947)’와 실크와 새틴 소재의 레드 미니 드레스인‘코티용(1956)’은 1950~60년 전에 디자인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디자인과 컬러가 현대적이고 세련돼 런웨이에 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반면 존 갈리아노의 드레스인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한 새틴 코트(2005)와 금실로 수놓은 레드 코트(2007)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모습이 연상될 만큼 우아하고 기품이 가득했다. 지난 64년 동안 무슈 디올과 존 갈리아노가 발표한 컬렉션 사진과 그들이 남긴 무수한 어록을 연도별로 기록한 전자책은 디올의 역사서와 마찬가지였다. 책장을 넘기는 족족주옥같은 명언이 쏟아져 쉴 새 없이 수첩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