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만큼 뜨거운 기억, 이나영의 <네 멋대로 해라> 시절 소환.
2002 <네 멋대로 해라>
2002년 하면 월드컵? 월드컵도 있었지만, <네 멋대로 해라>가 있었다. 월드컵의 열기가 식지 않은 7월에 시작한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불치병이라는 뻔하디 뻔한 소재를 멋대로 비틀어 보는 사람 심장을 팔딱팔딱 뛰게 만들었다. 그 시절 우리는 ‘네멋 폐인’이었다.
뇌종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복수(양동근)에게 “황당한 맛”의 밥상을 차려주고, 멜로디언으로 연주까지 해주던 전경(이나영)의 엉뚱한 간호를 어떻게 잊을까? “사는 게 좋으면 좋을수록 수술하기가 싫어지네”라고 말하는 복수에게, “나는 조금이라도 더 살게 하고 싶은데”라며 그의 발에 입 맞추던 경. 키스 장면 한 번 없이, 발가락 끝까지 전기가 찌릿찌릿, 살아 있는 것이 참 좋다고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전경(25세)
힘 없이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며 남의 일에 신경 안 쓴다. 의자에 앉으면 늘 한쪽 턱을 받치고 앉는다. 멍해 보인다. 그러다 한 번 화가 나면 독사다. 한두 명 호되게 당하게 될 거다. 고복수와 한동진을 만나기 전까지 연애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 <네 멋대로 해라> 등장인물 소개 중
극중 인디 밴드 키보디스트였던 이나영의 모습은 그 시절 자유로운 홍대 패션 그 자체였다. 바람 머리, 꽃무늬 셔츠와 청바지, 가죽 끈 목걸이와 컨버스. 음반 가게에서 한동진(이동건)의 뺨을 갈기던 세팅펌에 실키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옆에서 CD를 고르던 경을 오해하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얘 옷 꼴 좀 봐라, 강아지랑 세트로 묶냐? 네 수준도 참 그렇다. 어디서 이렇게 촌닭 같은 애를 골랐니?” 그 시절 홍대 패션을 바라보는 부모님들 반응이 딱 그랬다.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그 시절엔 홍대 패션이 제일 힙했거든요?
2004 <아일랜드>

이중아(27세)
지적이다. 팔다리에 힘이 없다. 히피적 기질이 있다. 하는 짓이나 정신 상태나 다소 맛이 갔다. 뜨개질을 잘 한다. 기분 나쁘면 아일랜드 요리 하고 기분 좋으면 한국 요리 한다. – <아일랜드> 등장인물 소개 중
네멋 폐인들이 오매불망 기다린 인정옥 작가의 차기작 역시 주인공이 이나영이었다. 아일랜드에서 가족을 잃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 입양아 ‘이중아’. 알록달록 치렁치렁 자유분방한 패션에 흰 눈이 내린 듯 흰 실로 땋은 머리가 시선을 강탈했다.
어쩌다 범상치 않은 중아 옆에 앉은 건 “우리 국이”, ‘강국’, 현빈. 믿음직한 국은 불쌍해서 좋았다가 좋으니까 불쌍해진 중아를 성실히 돌보지만, 둘의 관계는 어딘가 쓸쓸하다. 중아는 반복되는 우연 속에 본능처럼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이재복(김민준)을 사랑하게 되고, 재복의 연인 한시연(김민정)은 강국을 사랑하게 된다.
얽히고 설키지만 누구 하나 머리채를 잡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묘한 사각 관계. 요즘도 두번째달의 연주곡 ‘서쪽 하늘에’를 들으면 <아일랜드>의 명장면들이 떠오른다.
2004 <아는 여자>
이나영은 은근 웃긴 배우다. 영화 <영어 완전 정복>(2003)과 <아는 여자>(2004), 그리고 필모에 포함시켜 마땅한 <무한도전> MT 에피소드를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이나영의 코믹 캐릭터를 꼽는다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는 여자> ‘한이연’이다. 남자 주인공은 병원에서 바뀐 차트 때문에 남은 시간이 3개월이라는 잘못된 불치병 진단을 받은 동치성(정재영). 그가 툭하면 코피가 나고 쓰러지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이어진 코 파는 버릇 때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옆집에 사는 ‘아는 여자’ 한이연 뿐이다.
어느 날 코 파는 동치성을 눈 앞에서 본 한이연은 절망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외친다. “코 파지 마요! 안 돼요, 더 이상 코 파면 안 돼요.” 보고 또 봐도 웃음이 터지는 21세기 한국 코미디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이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이나영은 불치병이거나 불치병인 줄 알거나 불구가 된 남자들과 “함께 불행해도 좋을”, “영원할 거란 믿음보다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한” 사랑을 했다. 살아 있으니까 사랑하는, 막가파 순애보 말이다.
2025 <아너: 그녀들의 법정>
이나영이 돌아온다. 여성 대상 범죄 피해자 전문 로펌 L&J를 둘러싼 이야기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 2월 방영을 앞두고 있다. 세 주인공 윤라영(이나영), 강신재(정은채), 황현진(이청아)은 20년 전, 한 가지 사건에 얽혀 있는 친한 친구들 사이.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 돌아온 과거에 맞서는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1998년 ‘잠뱅이’ 광고로 데뷔 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혼자 세월 U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이나영. 출산 후 유니클로 광고에 등장했을 때 주변 친구들은 “애는 우리만 낳았구나!” 한탄했지만, 이나영의 컴백은 자주 볼 수 없는 만큼 더 반갑다. 게다가 이번 드라마는 멋쁜 언니 옆에 멋쁜 언니, 여성들의 뭉클한 연대기 아닌가.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2023)의 명대사로 ‘잠뱅이’ 언니의 신작을 기다려 본다. “우리 자주는 못 봐도 오래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