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창작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필름메이커 유킴은 자신만의 균형과 행복에 몰두한다.



이틀 전 로스앤젤레스(LA)에서 돌아왔다. 어떻게 시작된 여행인가?
학업과 일 때문에 런던과 베를린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한국에 가족을 만나러 오기 바빴다. 그게 여행이라 생각했고, 제대로 된 휴가를 즐긴 적은 따로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최근 2년 동안은 여행도 잘 안 가고, 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표현하고 싶은 날카로운 감정이 없어지더라. 책으로 모든 경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고. 결국 낯선 공간이나 시간에 놓였을 때 느끼는 약간의 불안이 창작의 기반이 된다는 걸 깨닫고,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컴포트 존(Comfort Zone)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컴포트 존 밖에서의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무엇인가?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지낸 것. 해가 뜨면 일어나고, 외출해서도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해가 지면 숙소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생활을 했다. 6시 반쯤 일어나 근처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공원도 가보고 호수도 지나치고 달리기도 했다. 건강하게 누릴 수 있는 건 전부 한 것 같다. 스크린 타임도 줄어들더라. 일주일 동안 있었는데, 사진도 거의 안 찍었다. 찍는 걸 까먹을 정도로 즐거웠다.
영화 산업이 부흥한 도시에서 필름메이커로서 영감 받은 부분도 있나?
친구를 따라 미국프로농구(NBA) 선수인 스테판 커리가 운영하는 프로덕션 하우스를 방문했다. 할리우드도 힘든 건 마찬가지더라. 팔릴 만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고민, 스튜디오 한편에서 숏폼을 제작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의미 있거나 독특한 콘텐츠를 만드는 건 어딜 가나 어려운 일이다.
첫 영화 <신도시 키드>에 이어 두 번째 영화 <씨티슬래커>도 후반 작업만 남았다고. 그 과정에도 어려움이 있었나?
작년, 영화 촬영을 마치고 1년간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한순간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깊은 고민과 생각에 빠져들었다. 운동도 하고, 파티에도 가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면서 활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스태프를 포함해 작품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정말 많은 상황에 감독으로서 영화를 완성한다는 건 대단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더라. 결국 내가 시작한 일이니 끝맺음도 해야 하는데, 그 고독을 마주할 준비가 안 됐던 것 같다. 잘 해내기 위해 스스로 엄격해지면 때로는 마음이 다치기도 한다.
다친 마음은 어떻게 치유했나?
모든 게 엉망이라는 생각에, 내게 맞는 건강 레벨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칼 융의 정신분석학도 공부하고, 의학의 도움도 받고, 타인에게 기대볼까 싶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 끝에 스스로를 지키는 적정선을 발견했다.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내가 건강하게 깨어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시간, 운동 시간, 듣는 노래 등 모든 것을 정해놓고 반복했다. 붙잡을 게 없을 때 돌아갈 곳은 루틴이다. 몸과 마음이 최상의 균형을 이루는 ‘파인 튜닝(Fine Tuning)’을 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튜닝된 현재 상태는 어떤가?
마음에 드는 상태를 찾은 지 한 달이 좀 넘었다. 좋아하던 술과도 멀어졌다. 특별한 결심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좀 잘하게 되니까 그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러다 술 한잔을 기울이면 그 행복이 줄어든다는 걸 느꼈다. 책을 볼 때도 집중이 잘 안 된다. 감각이 무뎌지고 날카롭지 못한 기분이 싫어서 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는 없다. 고된 시간을 지나고 나면 내 언어가 다른 차원에 도달한 걸 발견할 수 있다. 팔 하나가 더 생긴 느낌이랄까? 새로 생긴 슈퍼 파워가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된다.
<씨티슬래커>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철학적 질문에서 시작됐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정말 도시 깊은 곳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어딘가 안정되지 않고 유영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품을 썼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담겼다. 사람마다 상실이라는 상황을 소화하는 속도와 양상이 다르고,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런 상실이 불러오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삶의 방식도 우리 삶 속 어딘가에 내재해 있으니까.
영상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퍼펙트 데이즈>를 연출한 빔 벤더스 감독은 다작을 한다. 주제가 광범위한 점이 놀라운데, 그 이유는 그가 삶 속 여러 구간에서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창작은 그 질문을 탐구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오래 작업을 이어가는 게 목표다. 그 탐구를 관객에게 아름다운 언어로 환원해 전달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회사를 다니다 모델, 작가, 필름메이커로 활동하기까지 다양한 직업적 역할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지켰나?
잘 모르고 안 해본 일에 흥미를 느낀다. 한 번 해보는 정도로는 어떤 것이라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안 해본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깊이를 경험해보려고 했다. 다만, 모든 일에 비판 의식을 가졌다. 비판 의식을 기반으로 나의 예술을 완성하는 게 늘 중요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문제는 체력이 좋지 않아 새로 시작한 일을 지속하려면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웃음)
최근에 집중하는 건 무엇인가?
건강, 웰니스다. 창작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심취하고 몰입하면 몸과 마음이 다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살아갈 이유를 느끼면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적당한 온도를 찾는 데에 집중한다.
삶의 모든 요소가 창작의 영감이 되나?
취미인 독서도 창작의 일부고, 여행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일과 삶을 분리하지 못했다. 쉬는 방법을 몰랐다. 요즘은 은근한 스트레스조차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행복한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강도 트레이닝인 F45와 달리기, 스케이트보드 같은 활동적 움직임도 휴식하는 방법 중 하나인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모든 운동이 저마다 집중력의 양상과 활성화하는 뇌의 부분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F45가 순간의 폭발적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면, 달리기는 끝이 없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는 힘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 뇌도 다른 궤적으로 활성화될 테고. 그런 차이를 다양하게 마주하는 게 좋다. 최근에 배드민턴을 쳐봤는데 완전히 다른 운동이었다. 눈과 손, 발이 서로 코워킹(Coworking)하면서 뇌를 새롭게 쓴다. 모든 일은 미래에 있을 성취나 보상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운동만큼은 그것에서 완전히 해방될 기회다.
월요일 아침마다 함께 달리는 에브리(@__every___) 크루는 어떻게 시작했나?
에브리 크루는 또래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그전까지는 행사 같은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였지, 자주 만나서 일상을 나누는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알고 보니 각자의 자리에서 달리기를 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그로 인해 일상의 활기를 찾고 있더라. 속도나 거리, 능률 같은 특별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웃으면서 즐겁게 한 주를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달린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종종 초대해 달릴 계획이다.
함께 달리는 일은 혼자 달리는 일과 어떻게 다른가?
함께하면 웃고 떠들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반대로 혼자 달릴 때는 이런저런 사색도 하고 바람과 풍경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느끼기도 한다. 각각의 달리기마다 몸과 환경이 매개하는 방식과 스펙트럼이 다르다. 풍경과 날씨, 컨디션, 코스 등 수많은 요소가 모여 한 번의 달리기를 만들지만, 매 순간이 다채롭다.
풍요로운 삶을 완성하는 유킴만의 방법이 있다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 결국 나와 같은 개인이 모여 인류가 되니까. 전부 그렇게 산다면 이 세상 모두의 삶이 행복해질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인 만큼 나를 비롯한 타인에 대해 더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하면 세상이 무탈하게 흘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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