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곳곳에 배어든 친절과 환대에 마음 설레 매일 밤 잠 못 이루던 시애틀에서의 시간.

“음악 소리를 키우고 싶지만,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I would like to turn the music up, but I don’t want to disturb everyone).” 케리 파크(Kerry Park)에서 음악을 틀던 청년이 말했다. 디제잉을 하면서도 공원을 찾은 이들의 시간을 존중하는 따뜻한 배려심! 흐린 날이 많아 회색빛을 띠는 하늘과 짙은 커피 향, 그리고 언제나 물결이 가까이 흐르는 이 도시는 머무는 내내 온기로 가득했다.

로컬의 도시
시애틀은 처음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뉴욕의 마천루와 샌프란시스코의 여유를 동시에 품은 ‘중간계’ 같달까? 엘리엇 베이(Elliott Bay)의 반짝이는 윤슬을 뒤로하고 향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은 시애틀의 상징과도 같다. 1907년, 시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주민들이 물건을 쉽게 사고팔도록 지어진 이곳은 줄곧 지역민에 의해 관리되고 유지돼왔다. 마켓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거나 보수가 필요할 때마다 모금 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온 이 시장의 옥상에는 지역 시니어 센터 회원들이 가꾸는 작은 정원도 마련되어 있다. 광활한 규모의 마켓 투어가 고민이라면 ‘세이버 시애틀(Savor Seattle)’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신선한 생선을 던지는 상인들과 세계 각국의 향신료, 싱싱한 제철 과일과 아침 대용으로 먹는 타코까지 맛보고 나면 로컬의 위대한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거다.


로컬의 삶을 자세히 뜯어봤으니 도시 전체를 조망할 차례.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에서는 시애틀의 스카이라인을 360도 파노라마 뷰로 감상할 수 있다. 좀 더 역동적인 경험을 원한다면 켄모어 에어(Kenmore Air) 수상비행기에 올라타보길. 물살을 가르며 이륙하는 순간, 해안을 감싼 퓨젯 사운드(Puget Sound)와 웅장한 캐스케이드(Cascades), 올림픽(Olympics) 산맥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꼭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새가 된 기분!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치훌리 가든 앤 글라스(Chihuly Garden & Glass)가 제격이다. 8개의 갤러리와 3개의 드로잉 월을 따라 걷다 보면 시애틀 출신 작가 데일 치훌리(Dale Chihuly)의 화려한 작품 세계에 흠뻑 빠질지도. 석양이 지는 시간, 옛 가스 공장을 그대로 보존한 가스웍스 파크(Gasworks Park)에서 붉게 물든 시애틀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해보자.

오감을 깨우는 곳
커피의 도시답게 시애틀 곳곳에는 개성 넘치는 커피숍이 즐비하다. ‘워킹 시애틀 커피 컬처 투어’ 가이드와 함께하면 카운터컬처(반문화)의 힙한 감성이 응집된 캐피톨 힐(Capitol Hill)의 숨은 명소를 모조리 만날 수 있다. 버섯을 인퓨징한 머슈룸 커피부터 오렌지 필링이 들어간 달큼 상콤한 오렌지 커피까지.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지?’라는 놀라움에 커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혀끝의 감각을 깨우는 이곳은 스타벅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스타벅스 1호점과 캐피톨 힐에 우뚝 선 최초의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는 커피 애호가의 성지순례 스폿이다(아쉽게도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는 현재 폐업 상태다).
커피보다 와인에 애정이 크다면 로컬 와이너리로 향하자. 도심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우든빌의 샤토 생 미셸(Chateau Ste. Michelle) 와이너리는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나를 반겼다. 탐스러운 장미가 활짝 핀 가든에서의 와인 테이스팅과 피크닉은 그 어떤 기억보다 강렬하다. 노벨티 힐/자닉(Novelty Hill/Januik) 와이너리에서는 와인 제조 과정을 직접 살피는 소중한 경험도 쌓았다.

시애틀 근교 도시의 매력을 아는지. 시애틀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스노호미시(Snohomish) 다운타운은 앤티크 숍과 독립 서점이 늘어선 작은 마을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장난감 가게에서 선물을 잔뜩 사게 되는 신기한 곳이다. 살짝 출출하던 차, 갓 구워 따뜻하고 달콤한 스노호미시 파이 컴퍼니(Snohomish Pie Company)의 파이 한 조각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세계적인 항공기 제조사 보잉 역시 이 지역에서 만날 수 있다. 항공기 제작 과정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보잉 퓨처 오브 플라이트 뮤지엄(Boeing Future of Flight Museum)은 비행과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장소일 것. 좀 더 멀리 떠나고 싶다면 차나 페리로 입도할 수 있는 위드비 아일랜드(Whidbey Island)로!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선과 푸른 숲은 저절로 여유를 장착하게 한다. 랭글리(Langley) 지역의 컴포트 오브 위드비(Comforts of Whidbey) 와이너리에서 풍미 좋은 와인을 한 병 사고, 프리마 비스트로(Prima Bistro)에서 케이퍼와 레몬 소스를 곁들인 농어구이를 맛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길, 디셉션 패스 브리지(Deception Pass Bridge) 위에서 자연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품은 바다를 한참 바라봤다. 오감을 깨우는 시애틀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곳’이 됐다. 시애틀을 향한 강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 이번 여행의 추억을 꺼내볼 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