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폴이 첫 소설집 <무국적 요리>를 냈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 이렇게 발칙한 세계가 숨어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작품 속의 이름은 국적이나 성별, 나이 등을 일부러 모호하게 썼어요. 그래야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라고 말하는 소설가 루시드폴과의 인터뷰.

소설가로 데뷔한 루시드폴

소설가로 데뷔한 루시드폴

루시드폴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동화적인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내 노래들이 늘 그런 건 아니었다. ‘레미제라블’이나 ‘평범한 사람’ 혹은 ‘사람이었네’도 그렇고. 인디밴드 미선이 시절 노래인 ‘치질’은 제목부터 그리 동화적이진 않지 않나.

작가의 글에서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어떤가?
무엇을 결정할 때 직관에 의지하는 편이다. 소설도 그냥 ‛써야 할 때’가 왔던 것 같다. 요즘은 하나씩 정리가 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추려보면 내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본능이 있다고 보고, 그 이야기를 구현하기에 노래라는 틀이 너무 좁다는 인식을 했다. 그래서 픽션이라는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루시드폴의 ‘약력’으로는 잘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생활상이 많이 등장한다.
어차피 약력이란 게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소설 중 <추구> 속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약력이란 건 ‛끈빤스’ 같은 것이지요. “다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건 전혀 안보여주는.”

그 <추구>의 피날레는 미스터리하기까지 했다. 당신만 아는 이야기가 더 있나?
읽는 분들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여줄 만한 이야기는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글을 표현하는 형식도 흥미롭다. ‘그라믄(–_)’ 처럼 사투리의 높낮이를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나 ‘위이이이잉’처럼. 편집자의 반응은 어땠나?
사투리 억양표시는 처음부터 편집자도 동의했고, 작아지는 글자는 반반이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글이 글씨며 색깔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원고를 계속 검토하면서 줄었다. 하나 남은 것이 ‘위이이이잉’이다. 그리고 나는 맥 컴퓨터에서 지금도 셰어웨어를 쓰는데, 아래한글을 쓰는 편집자들과 호환이 잘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좀 귀찮아졌다!

출간 후 들은 가장 최고의 찬사는 뭐였나.
어떤 후배 뮤지션에게 온 문자. “형 재밌어요.”

가장 유쾌하게 읽은 건 <똥>이다. 친칠라 토끼에게 닥친 고난이란! 정치인에 대한 풍자였나?
교훈을 담은 이야기는 아니고, 말 그대로 정치인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언론인과 언론도 마찬가지고.

“이거 소설이야 소설.” “그것도 음악 하는 애가 쓰는 소설.” 이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독자에게 어떤 기대가 있나?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 어떤 기대나 바람이 전혀 없다. 마음이 통한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두 편 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음악 활동과 문학 활동을 별개라고 생각하나?
가사는 멜로디의 지배를 받고, 소재의 지배도 받고, 운문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함축적이고 비유나 상징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오독이나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도 많다. 소설은 직접적이다. 노래를 만드는 것이 각종 장비와 시약으로 하는 실험같은 거라면, 소설은 순수 수학이다. 종이 한 장, 펜 하나면 되는.

작품 속에는 희극과 비극, 파국과 희망이 공존한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세상은 어느 쪽인가?
드러나는 세상은 언제나 비극이다. 그럼에도 세상과 인간의 본성 혹은 실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우선은 사람과 사람의 말을 믿는다. 그 밑바탕은 ‘연민’이고.

주로 어디에서 썼나?
집. 카페나 이런 곳에선 못하겠더라. 이상한 음악이 나오거나 하면 방해가 된다.

작품이 안 풀릴 땐 뭘 했나?
인터넷. 음주. 흡연. 대화. 산책. 산책. 여행. 산책. 독서. 산책. 독서. 음악듣기!

언젠가 인생의 목표 중 하나를 ‘Knowing’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소설을 쓰면서 또 무엇을 알았나?
살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이구나. 참 의미 있는 일이구나. 그런 걸 느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앞으로는 당신이 쓴 중편이나 장편도 보게 될까?
단편을 쓰기 전에 장편 시놉시스를 짜서 쓰고 있던 중이었다. 한동안 놓고 있었는데 다시 들춰볼 생각이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지만, 당분간은 계속 쓸 것 같다. 쓸 이야기들이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