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섭과 송승헌 사이, 야노 시호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패션 넘버 292513의 기억.

얘들아 잘 봐, 언니 리즈다

또 스톰(STORM)이다. 90년대에 데뷔한 스타들의 사진을 찾다 보면 자꾸만 걸리는 스톰 화보.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오빠 김성재부터 김성재와 촬영하고 싶어 오디션에 지원한 ‘소간지’ 소지섭, 지금도 <가을동화> 때처럼 두 눈이 촉촉한 송승헌,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김하늘, ‘90년대 올데프’ 샵의 서지영…
그 중에는 야노 시호도 있었다. 가슴에 ‘2=S’ 로고가 크게 들어간 블랙 니트를 입고 헤드밴드를 한 보브컷 모델이 바로 그다. 벌써 30년 전. 송승헌, 소지섭과 함께 찍은 카탈로그를 찾아 보는데 질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292513이 무슨 뜻이죠?”
오빠는 1010235, 옷은 292513

아마도 ‘38317’과 ‘48658’의 의미를 모르는 세대인 듯했다.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제목 겸 발신자 정보처럼 ‘찍었던’ 숫자 암호. 독일어로 ‘사랑해’를 의미하는 LIEBE를 뒤집으면 38317, ‘사랑해’의 글자 획수 486에 오빠의 발음을 옮긴 58을 합쳐 ‘사랑해 오빠’. 친구 사이(7942)보다는 열렬히 사모(1010235)하는 오빠가 우선이던 친구에게는 일부러 48658에 828282까지 붙여 보내기도 했다(그러다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추억에 젖어 설명이 길어졌는데, 292513은 ‘이것이 옷일세’란 의미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가 S자가 박힌 검정 비니를 쓰고 나왔을 때부터 스톰은 우리들의 가슴에 폭풍을 일으켰다. ‘난 나야!’ 리바이스가 청바지를 청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면, 스톰은 숫자 암호로 사랑을 전하는 세대의 패션을 선언했다.
화이트 셔츠와 블랙 니트 같은 90년대 미니멀리즘 스타일에 잔뜩 내려 입은 와이드 팬츠나 체크 무늬 스키니 팬츠, 헤드밴드와 빵모자를 더한 세기말 믹스매치. 여기에 X세대 브랜드다운 킥은 하의 지퍼 부분에 박은 브랜드 로고였다. 유교걸 교육에 진심이던 부모님들은 그런 선정적인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못 했고, 발각된 10대 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는 일도 벌어졌다(내 이야기다).
어쨌거나 당시 멋 좀 부린다는 ‘요즘 것들’의 옷장에 스톰은 필수였다. 부모 세대의 나이키처럼 동네방네 보여주고 싶었던 스톰.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옷이 없으면 (보세 옷가게에서 산) ‘배지’라도 재킷과 가방에 달았다.
돌아오라, 나의 스톰!

오버핏 블랙 니트에 블랙 헤드밴드, 언더라인을 그린 스모키 메이크업. 얼마 전 야노 시호는 30년 전 스톰 화보 속 스타일로 일본 로컬 분위기가 강한 코엔지 거리를 걸었다. 그 모습을 필름 카메라에 담은 사람은 아일릿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사진 작가 김채무. 촬영 초반 “상큼하게”라는 디렉션에 주춤했던 것도 잠시, 거리에서 하이틴 패션지 촬영을 하던 10대 시절을 소환했다. 그야말로 소녀의 표정. 스톰 카탈로그를 뜯어 베프에게 편지를 쓰던 80년대생의 마음도 몽글몽글해졌다.

전 국민이 마음으로 업어 키운 ‘사랑이’의 엄마이기 전에, 모델로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야노 시호. 그는 꿈을 위해 도쿄로 상경한 10대 시절 자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날 거야, 기대해.”
나는 거기에 한 문장을 보태고 싶다. 그 시작은 스톰이 될 거야. 292513=STOR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