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역사와 문명의 도시 ‘카이로’ 여행 이야기(1)

2026.03.14김정현

이집트의 고대 도시 카이로 시내를 깊숙이 탐험하며 마주한 공예와 예술의 경지.

돛단배가 고요히 항해하고 있는 나일강의 풍경.
칸 엘칼릴리 재래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텍스타일.
현지인도 사랑하는 마지즈 발라드의 메뉴.

찌그러진 택시 행렬과 쟁반을 머리에 인 채 자전거를 탄 아저씨들이 혼재한 정신없는 거리를 지나자 빨간 재킷과 나비넥타이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쾌한 도어맨이 새로운 부티크 호텔 마지즈 발라드(Mazeej Balad)의 출입구로 안내한다. 도어맨 뒤로 펼쳐진 버건디색 카펫은 고급스러운 대리석 계단까지 이어져 바닥에 쏟아진 와인을 연상시킨다. 한때는 호텔 펜션 라 비엔누아즈(La Viennoise)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카이로 대사관이기도 했던 이 호텔은 무려 129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내부 인테리어는 젊은 이집트 디자이너 말락 오르피(Malak Orfy)의 감각으로 완성됐다. 짙은 청록색 리셉션 데스크 옆에는 싱그러운 나무가 손님을 반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을 올라가면 멋진 루프톱이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신진 작가 카이로 루뭄바(Kairo Lumumba)의 시그너처인 낙서 같은 프레스코화가 다섯 개의 객실까지 쭉 이어진다. 방으로 가는 곳곳에는 지역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샘 셴디(Sam Shendi)의 조각상부터 사반 아담(Sabhan Adam)의 추상화, 춤추는 무용수를 자수로 표현한 알리아 엘 그리디(Aliaa El Greedy)의 자수화까지 눈이 즐겁다.

루프톱 식당에는 화제의 중심이 된 이 공간을 구경하러 온 카이로인들로 북적북적하다. 호텔의 공동 창업자 카림 나빌(Kareem Nabil)과 아흐메드 간주리(Ahmed Ganzoury)는 이집트에서 가장 화려한 호화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집트 북부 해안에는 미코노스(Mykonos)에 버금가는 핫한 비치 클럽을 만들며 화려함의 대명사로 자리했지만, 카이로 마지즈 발라드 호텔을 세우면서 카이로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됐다. “호텔 인테리어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처럼 느껴지길 원했어요.” 코샤리 아란치니와 레몬 피클 후무스를 앞에 두고 앉은 나빌이 말했다. “이미 이 건물 자체가 들려줄 얘기가 너무 많았죠.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답니다.”

10년 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카이로에 처음 홀로 여행을 왔고, 그 즉시 이 도시가 내뿜는 압도적인 에너지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오랜 시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곳을 찾아 헤맸는데 그곳이 바로 카이로였다. 소음과 먼지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거리, 잘 알려지지 않은 외진 뒷골목, 그와 대조적인 멋진 명소, 가슴 아플 정도로 비쩍 마른 고양이와 사람들, 하지만 눈을 마주치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화답하는 따뜻한 얼굴 등 이질적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래서 여행 기간에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하고자 가능한 한 도보로 이동했다.

중세 이슬람 요새였던 시타델(Citadel)에서 나일강 동쪽에 있는 가든 시티(Garden City), 카이로의 부촌 자말렉(Zamalek)부터 이집트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인 칸 엘칼릴리(Khan El-Khalili)까지 끝없이 걸었다. 차도를 건널 때마다 아찔한 순간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경험이 소중하고 즐거웠다. 10년 지나 다시 만난 카이로는 누구나 선망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놀랍도록 많은 부분이 발전했으며, 수도 집중을 해소하고 교통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위성도시가 속속 들어섰다. 마지즈 발라드 같은 고급 부티크 호텔이 세워지며 도시의 5성급 호텔 라인업도 탄탄해졌다. 1940년대 지은 아르데코 양식의 쌍둥이 타워이자 한때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통틀어 가장 높은 고층 빌딩이었던 카이로의 명물 이모빌리아 빌딩(Immobilia Building) 내부도 이런 트렌드에 맞춰 네 개의 호텔식 아파트로 변화했다. 이 아파트는 이집트의 옛 건축물 복원과 보존에 앞장서는 부동산 개발 회사 이집트 비욘드(Egypt Beyond)의 집념이 맺은 결실이다.

이집트 비욘드는 과거에도 현지 장인의 도움을 받아 룩소르(Luxor) 지역의 알 무디라(Al Moudira) 호텔과 90년 전 이집트 왕족을 태우고 나일강을 항해하던 소형 크루즈 보트 세트 네프루(Set Nefru) 등을 복원한 적이 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로비의 LED 간판과 쌓인 먼지를 보면 썩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이모빌리아 빌딩의 오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세심한 감각과 노력이 돋보이는 레지던스가 나타나며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네 개의 객실 모두 고급스러운 기하학 모양의 목재 마루에 야외 테라스가 있고 방 안은 현지 예술가와 공예가의 손길로 완성된 가구와 소품이 멋지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테이블보와 식탁 매트는 이집트 취약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인 스레즈 오브 호프(Threads of Hope, TOH)의 장인들이 수놓아 만든 것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 카이로는 수도 안팎으로 흥미로운 대형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린 프로젝트는 아마 기자(Giza) 지구의 이집트 대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 GEM) 개관 소식이다. 20년간 무려 1조4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이 거대한 박물관은 대피라미드(Great Pyramid)와 멘카우레(Menkaure) 피라미드를 마주한 채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적 유물을 품고 있다. 70만 년 전의 조각상과 왕실 유물 등 각종 고대 이집트 유물 10만여 점이 갤러리 12곳에 전시되었으며, 5000여 점에 달하는 투탕카멘 컬렉션이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현지인 사이에서 이집트의 ‘보석’으로 통하는 대박물관은 지난 몇 달간 조용히 운영됐다. 박학다식한 젊은 큐레이터 아흐메드 모크빌(Ahmed Mokbil)을 따라 거닌 공간은 매끄럽고 세련된 구성을 뽐낸다. 곧 무덤과 신전을 가상으로 체험하는 VR 투어와 인터랙티브 전시도 시작할 예정이며, SNS에서 화제가 된 높이 11m, 무게는 83톤에 달하는 거대한 람세스 2세 조각상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이 화려한 전시품 사이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흰따오기 새 모형의 작은 금색 펜던트였는데, 제작된 지 40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식품은 문자와 기록의 신 토트(Thoth)를 기리는 의미로 만들어져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을 거라고 했다. 레드카펫을 밟아야 할 것 같은 화려한 구슬로 장식된 수의에도 눈길이 갔다. 이 수의는 26왕조의 왕실 함대를 이끌던 선박 장관 헤카엠사프(Hekaemsaf) 미라의 몸을 덮을 때 사용됐을 거라고 했다. 전시장의 큰 창문으로 저 멀리 피라미드가 보이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대박물관 CEO 아흐메드 고네임(Ahmed Ghoneim) 박사는 이곳이 “이집트를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 관람 경험을 재구성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죠”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타흐리르 광장에 있던 이전 박물관과 비교하면 고네임 박사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0년 전 어두컴컴한 전시장의 진열장 안을 보려고 눈을 찡그리고 얼룩진 유리 뒤 미라와 복도에 쌓여 있던 상자를 떠올리며 격세지감을 실감했다. 

마지즈 발라드 호텔 객실 전경.
타마라 하우스에서 제공되는 음료.

상대적으로 덜 화려하지만, 카이로 시내에도 변화의 물결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한때는 아름다웠지만 세월과 함께 초라해진 오래된 건물에서는 현지 예술가와 기업가가 힘을 합쳐 옛 영광을 되찾는 중이다. 낡은 도시에 새로운 숙소와 가게, 식당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며 보존과 혁신이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에 대한 존중과 절제된 젠트리피케이션은 충분히 공존 가능하다는 걸 도시는 몸소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인 나빌은 “무조건 다 말끔하게 정리되고 아름다울 필요는 없어요.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고유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랑과 관심을 받아 마땅한 곳이죠”라고 말했다.

마지즈 발라드가 있는 카이로 시내의 굵직한 건물 상당수는 상업용 부동산 기업 알 이스마엘리아(Al Ismaelia)의 진두지휘하에 새롭게 탄생했다.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건축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재해석하기 위해 2008년 처음 설립된 이 회사는 이집트 시네마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1930년대 지은 시네마 라디오 복합 공간(Cinema Radio Complex)과 타마라(Tamara) 빌딩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 빌딩은 ‘타마라 하우스’로 재탄생했으며, 내년이면 부티크 호텔과 루프톱 식당이 오픈할 예정이다. 이곳의 요리 총괄 디렉터 후리그 메흐티기안(Hourig Mekhtigian)이 건물 안을 소개하며, 수제로 만든 장미 향 초콜릿 샘플을 맛볼 수 있는 티차이(Tchai) 티하우스에 앉았다. 그는 내년이면 바로 위층에 부티크 호텔과 루프톱 식당이 오픈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타마라 하우스의 공간 구성을 완성하는 데 숨은 주역은 건축가 에미 후세인, 모하메드 파레스,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 알케미 익스피어리언스(Alchemy Experience)다. 지하층 아날로그(Analogue) 부티크는 이집트 장인이 만든 현대적인 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는 소품 숍으로, 구리 텀블러와 검정 토기 볼, 전통 이집트 향기가 물씬 나는 디퓨저 및 룸 스프레이 등도 구경할 수 있다. 같은 층에는 고대 이집트 하마 여신 타웨레트(Taweret)에서 영감 받은 귀여운 디히포(D’Hippo) 토이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카임 토이즈(Kyme Toys)도 있다.

1층으로 올라가면 오브젝트 바이 마르모닐(Objects by Marmonil)이 있는데, 대리석을 사용한 고급 가구와 오브제를 전시한 이 콘셉트 숍은 이집트 대리석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입구에는 설치미술가 오마르 샤킬(Omar Chakil)의 항아리 작품이 들어오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얼리 디자이너 아자 파흐미(Azza Fahmy)도 이집트의 전통을 이어받아 재해석하고자 노력해온 선구자 중 한 명이다. 파흐미의 컬렉션은 독수리 여신 네크베트, 호루스의 눈, 테베 신전의 기하학적 문양 등 고대 신화와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단 하나뿐인 보석 작품이다.

“장인정신을 이어가지 않고는 우리의 유산을 제대로 보존할 수 없어요”라고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파흐미의 딸 아미나 갈리가 말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영감 받은 작품을 만들 때 마음가짐은 항상 우리 옛 문화와 전통에 대한 깊은 존중이 바탕을 이룹니다.” 자매 아야(Aya)와 무나즈 압델 라우프(Mounaz Abdel Raouf)가 설립한 가방 브랜드 옥테인(Okhtein) 역시 이집트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 북아프리카 고유의 문화였던 사교 모임이나 이집트의 전통 배 펠루카(Felucca) 등 다양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황동으로 제작한 클러치 백은 과거 이집트 악기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수천 개로 장식되었고, 또 다른 대표 제품인 뱅글 백은 과거 이집트인의 신분을 상징한 뱅글 팔찌에서 시작된 것이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푸르른 도시, 가든 시티에서는 사진가이자 건축가, 발레리나기도 한 넬리 엘 샤르카위(Nelly El Sharkawy)가 설립한 개성 있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카이로폴리탄(Cairopolitan) 매장을 방문했다. 소품 가게인 동시에 아트 갤러리이기도 한 매장 진열대는 소품 제작자이자 전직 광고 회사 대표였던 아흐메드 헤프나위(Ahmed Hefnawy)가 디자인한 독특한 소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고대보다는 비교적 최신 역사에서 영향을 받아 현대적인 이집트의 감성이 돋보이는 유쾌한 소품 중에는 옛날 콘비프 캔 모양의 자석, 철제 추 형태의 캔들 등도 있었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핸드 터프팅 러그와 정육점 칼을 닮은 열쇠고리도 유머 감각이 돋보였다. 매장 내 모든 소품은 지역 장인이 수작업한 것으로 그들의 손길에 헤프나위의 팝아트적인 감각이 더해져 완성된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결합한 포용적이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기념품을 보고 있으니, 카이로 현지인 특유의 유머 감각이 여기서도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번 한 주간 나를 웃게 한 카이로 현지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친구를 보더니 “당신의 아름다움에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라며 너스레를 떨던 칸 엘칼릴리 바자르에 있던 가게 주인의 모습,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는 1980년대 파워 발라드를 찾느라 라디오 채널을 돌리던 흥 넘치는 우버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녁이 되어 마지즈 발라드 루프톱 식당에 앉아 주문할 칵테일을 고르고 있자 민첩한 웨이터가 재빠르게 테이블을 세팅해주었다. 옆 낡은 아파트 건물의 에어컨 실외기 소리와 도로의 경적을 배경음악 삼아 다시 한번 생각한다. 혼돈과 정적, 세속과 신성함, 유머와 진지함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이 도시의 아름다운 불협화음에 대해서. 무질서함 속에서 완벽한 질서를 찾아가는 이 정신없이 아름다운 도시의 매력은 방문할수록 더욱 깊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NICOLA CHILTON
    포토그래퍼
    CONNOR LANG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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