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하 <건물주>)는 임필성 감독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원래 인연이 있었나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예요. 여러 번 제안을 주셨는데, 그동안 기회가 안 돼서 함께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20년 만에 드디어 드라마로 만나게 된 거죠.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창작자로서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부분에서 더욱 빛나는 것 같아요.
한동안 연출, 각본, 연기를 함께하다 이번에는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한결 가벼웠나요?
그런 부분이 있어요.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넷플릭스 <수리남>을 제외하면 TV 드라마로는 19년 만이죠. 드라마 환경이라는 게 영화보다 조금 녹록지 않잖아요. ‘과연 이 스케줄을 다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을 안고 시작했는데, 굉장히 합리적인 스케줄이었어요. 연속으로 연출과 주연 작품을 계속하다 배우만 하니까 상대적인 수월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을 겸하면 모든 회차에 정말 1분도 쉬지 못하는 시간의 연속인데, 배우만 하면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쉬는 날도 있잖아요.
그렇듯 배우 하정우의 드라마 복귀작으로도 화제를 모으는 작품이죠. 과연 이번에는 어디에 설득이 된 건가요?
인간 임필성의 역할이 가장 컸어요. 그리고 스튜디오329의 윤신애 대표를 같이 보게 됐는데, 신뢰가 갔어요. ‘이 배에 올라타도 무리가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오랜만에 해보니 어땠나요? 드라마만의 매력을 새삼 발견했나요?
시리즈만의 매력이 또 있는 것 같아요. 그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환경, 스피디함에서 오는 재미있는 요소도 많더라고요. 집중력이 그만큼 또 유지된다는 게 장점인 것 같고, 그렇게 또 많은 분량을 찍어내다 보니 그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밀착될 수 있는 기회가 더 쉽게 얻어지는 것 같아요.
스스로는 이 작품의 장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어요?
범죄 드라마. 제 캐릭터인 기수종은 선하지만은 않죠. 점점 흑화되어가는 캐릭터고, 악인이 더한 악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이야기예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 버티면서 누구나 마음 한편에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캐릭터가 아닌가 해요. 그런 모습이 다채롭게 보여지는 캐릭터라서, 그 지점이 굉장히 매력이 있었어요.
워낙 블랙코미디에 일가견이 있죠. 이번에도 기대가 됩니다.
대본 자체에 그런 요소가 있어요. 그것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거나 약화시키거나 하지 않고 그 상황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임필성 감독과는 그런 의견이 잘 맞았나요?
지향하고 있는 부분이 같았어요. ‘오케이’가 나는 좋은 연기가 무엇인지, 좋은 컷이 무엇인지. 취향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같이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또 촬영장에서 그걸 만들어가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중심에 두면서 소통이 굉장히 잘됐어요. 쫓기는 스케줄임에도 그 안에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었어요. 이를 통해 시리즈의 약점과 틀에서 조금 벗어나, 확장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 연기한 ‘수종’은 어떤 인물인가요?
‘건물주 되는 법’이라는 말이 사실은 반어법이에요. 건물주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정말 무리해서 꼬마 빌딩을 사요. 명색이 건물주지만 이자를 갚느라 더 열악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 거예요. 어떻게든 건물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력하다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고, 선택이 하나같이 다 삐뚤어지고 어그러지고. ‘김선(임수정 분)’ 캐릭터와의 협업이 재미있어요. 돈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부 갈등이 유발되는 게 아주 현실적입니다.
배우들의 새로운 연기를 보는 건 <로비>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죠. 동료를 볼 때 연출자의 눈으로도 항상 보게 될 것 같은데, 어떤 팀이 되었나요?
수종은 나머지 네 캐릭터와 다 갈등이 있고 충돌하죠. 각자 한명 한명이 12부 동안 정말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가고, 그것 또한 굉장히 재미있어요. 정말 제격인 배우들이 캐릭터를 맡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제일 파격적인 건 요나, 심은경, 원래 성별이 남자였는데, 감독님이 마지막에 여성 배우가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셨죠. ‘굉장히 하드보일드한 캐릭터인데 할 수 있을까?’ 했는데 1회차 때 그 모든 것이 다 불식됐어요. 개인적으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빌런 캐릭터가 탄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청자분들도 제가 같이 연기하면서, 경험한 것을 느끼면 좋겠어요.
이번에도 건물을 주제로 상당히 고생하는 캐릭터인데, 작품마다 돈키호테처럼 늘 마지막까지 고초를 겪죠. 그런 역할을 좋아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참, 우연이에요.(웃음) 아직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만약 수종이 아니라면 어떤 캐릭터에 끌렸을 것 같나요?
‘요나’요. 원래대로 남자 배우가 했더라면 그 역할을 탐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한 회마다 일어나는 일이 흥미로워요. 갑자기 ‘오?!’ 이런 것들이 좀 있어요. ‘어떻게 이러지?’ 싶어요. 작가님이 원래 소설을 쓰던 분이라, 기존 대본 같지가 않아요.
요즘 모든 사람의 꿈이 유튜버 아니면 건물주라고 하죠. 바로 그 점에서 시작되는 얘기고요. 공감이 되었나요?
하하. 건물주 그렇게 좋진 않아요. ‘하우스푸어’ 같아요. 경험도, 재정적인 여유도 없는데 무턱대고 건물을 산다고 모든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니거든요. 저 역시 부동산을 갖고 있지만, 멋모르고 건물을 소유하게 됐을 때, 고생스러운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이게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도리어 지금 이 시대에 건물을 사서 수익을 얻는다는 것은…. 점점 오프라인 스토어도 없어지고, 중심 상권이라는 것도 계속 옮겨 다니죠. 이 드라마를 통해서 아마 많은 분이, 특히 그것을 동경하는 분들이 다시 한번 고려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건물주는 꿈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겠죠. 꿈을 이룬다고 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래서 삶이 고단하죠. 한때 사람 하정우의 꿈은 뭐였나요?
물질적인 꿈은 아니었어요. 배우, 영화감독, 제작자. 지금도 그 과정에 있어요. 결국 작품을 탄생시켜서 많은 사람과 공감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을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욕망이라면 연출자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배우로 참여해서 그것이 또 좋은 작품이 되는 것. 좋은 작품을 만들거나 참여하는 것이겠네요.
그 꿈은 끝이 없겠네요.
없어요. 평가 또한 나중에 이루어지겠죠. <롤러코스터>가 2013년에 개봉했는데, 당시에는 모든 분이 굉장히 어리둥절하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많은 분이 그 작품을 말씀하세요. 그런 것처럼 영화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알맹이가 탄탄하다면 지금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빛을 보지 않을까? 저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연출자로서, 배우로서 기억에 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게 엄청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끼고,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취미 부자’로 알려져 있어요. 와인, 골프, 걷기 등 영화 <로비>도 그 모든 취미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하. 그렇게 보이는 건 어쩌면 제 일상이 너무 단순해서 그런 것 같아요. 취미가 많은 게 아니라, 오래 쌓이다 보니 결과물이 나오는 거에 가까워요. 와인도 나 혼자만의 평을 계속 쓰다가 협업을 하게 됐고, ‘콜 미 레이터’라는 이름을 짓기까지 3년이 걸렸어요. 와인을 출시하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오래전부터 해오다 ‘이번에는 이런 걸 수확해야겠네’ 같아요. 그 밭에서 나무는 계속 자라고 있는 거고.
요즘은 그 밭에서 또 무엇을 기르고 있나요?
지금은 작품에 아주 ‘올인’하고 있고, 5월부터 윤종빈 감독 신작 <보통사람들> 준비를 슬슬 하고 있고, 극 중에서 부산 사투리를 써야 해서 선생님을 구하고 있어요. 하와이가 제게는 참 많이 위로가 되는데, 그 사이 한 보름 정도 갈 계획이고요.
하와이에서는 어떻게 보내나요? 여전히 걷나요?
단순해요. ‘하루 종일 밖에서 걸어야지’ 최근에 또 새로운 바람이 생겼어요. 미국 서부 종단 트레킹(PCT)에 도전하는 거예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 이어진 길을 걷고 싶어요. 한 6개월 걸린대요.
왜 그 길에 끌려요?
하루 종일 40~50km를 걷고, 텐트 치고 자고의 반복. 그게 너무너무 좋겠더라고요. 다큐멘터리에서 하이커들의 인터뷰를 봤는데,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느꼈대요. 그게 너무 궁금한 거예요. 하얘지든 까매지든 노래지든! 가서 그걸 해봐야겠다. 그런데 그 느낌을 저는 알 것 같아요. 하와이에 가도 하루에 10시간씩 걷거든요. 샤워하고 딱 하루를 끝마쳤을 때, 무념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기분 좋은 피곤함.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맛대가리 없는 소금에 절이지 않은 아몬드도 그렇게 고소해요. 어떤 감각이 살아나는 것. 그걸 정말 잃고 싶지 않더라고요.
임수정
요즘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나요?
<건물주>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다들 정이 많이 들어서 현장에서 틈틈이 수다라도 조금 더 떨려고 하죠. 블랙코미디가 섞인 스릴러 범죄물인데, 제가 시도해보지 않았던 작품이라 제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한 마음도 커요.
김선은 기수종의 아내로 딸 다래를 위해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는 똑 부러지는 인물이에요. 캐릭터의 어떤 부분에 마음이 끌렸나요?
김선은 평범한 주부처럼 보이지만 벌어지는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요. 반전 매력이 있죠. 고등학생 딸을 둔 엄마지만 부부 관계나 모성애가 도드라지는 작품이 아니라서 오히려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 박서경이 딸 다래 역할을 맡았어요. 호흡은 어땠나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판타지 공포물 <두 번째 아이>에서도 10대 배우들과 같이 작업했죠.
다래라는 캐릭터도 사고치는 어른들을 너그럽게 바라봐주는 면이 있는데, 실제로도 선배인 저희를 잘 포용해줬어요. 덕분에 엄마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었죠. <두 번째 아이>의 박소이, 유나 씨는 연기도 잘하지만 보고만 있어도 참 흐뭇했어요. 딸로 만난 배우들의 포용력에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남편인 기수종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거나 연민했나요?
연민? 없어요.(웃음) 이 부부는 그냥 만나면 맨날 친구처럼 투닥거려요. 수종이 사고를 계속 치거든요. 실제로 남편이 있는 시청자분들은 보면서 울화통이 터질 거예요.
극 자체에는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요?
‘건물주’라는 게 대한민국에서 갖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40대쯤 되면 자신의 자산과 경제력을 좀 더 확장하기 위해 누구나 고민하죠. 실제 건물을 둘러싼 이익집단 간 충돌이나 사건을 언론을 통해서 매번 접하기도 하고요. 그런 만큼 그 자체로 공감대가 큰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임수정이 욕심을 부리는 대상은, 역시 연기인가요?
저라고 경제적인 것에 초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건 작품 욕심이긴 해요. 내 작품이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나면 기쁘고 흥분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또 우리는 왜 저런 작품이 안 나오지 우울했다가, 또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면서 혼자 난리거든요.(웃음)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좋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있나 봐요.
2016년부터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을 함께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지금 신나게 이야기해보고 싶은 작품은 뭔가요?
원래대로면 연초인 지금, 오스카 후보에 오른 작품을 한 차례 언급할 타이밍인데, 이런저런 일정 때문에 하지 못해 아쉬워요. 심지어 작년 하반기에는 영화를 거의 보지도 못했어요. 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봤네요! ‘용아맥’에 자리가 하나 났길래 보고 혼자 또 잔뜩 흥분한 기억이 나요.(웃음)
지난해 선보인 <파인: 촌뜨기들> 양정숙은 뜻밖의 선택이자 인물이었어요. 호러, 멜로, 판타지, 오피스물, 범죄 스릴러물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요?
자신감이 있어서 도전하는 건 아니에요. 내 안의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배우로서 몰입했을 때 얼만큼 이런 장르와 어우러질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것 같아요. 우선 장르적으로 내가 매료됐고 재미를 느끼는 걸 따라가자, 그럼 연기도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더라고요. 결과에 대한 기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요.
단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시작해 독립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는가 싶더니, 제작자 겸 배우로 <두 번째 아이>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나요?
결국 이 모든 게 좋은 작품에서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자기 세계관이 분명한, 개성 있고 매력적인 한국의 콘텐츠를 꾸준히 세상에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어요. 그런 멋진 작품이 나오는 데에 제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연기는 물론, 제작이나 연출 등 어떤 방식으로든 돕고 싶어요.
한동안 소속사 없이 2~3년 정도 활동한 게 화제가 되었죠. 다시 소속사가 생기니 어때요?
저와 같은 시선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신중하게 찾을 시간이 필요했나 봐요. 어느덧 20년 훌쩍 넘는 경력이 쌓였잖아요. 배우로서 임수정이 뭐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제가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 꿈을 함께 꿔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되게 신나요.(웃음) 소소하나마 매니지먼트에서 해주던 일들을 직접 해보며, 그동안 저와 함께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깊게 느꼈고요.
오래 봐온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건 관객 입장에서도 굉장히 기쁜 일이죠. 2004년 작품인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지난해 ‘역주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랑받았습니다.
20주년을 맞아 감독판 리마스터링이 웨이브에서 공개됐는데, 너무 많은 ‘젠지’분들의 지지를 받았어요. 특히 그 계기가 된 <뿅뿅 지구오락실3>의 이영지 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시대와 정서가 변해도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요. 특히 제가 ‘배우’라는 타이틀로 활동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준 작품이기에 더욱 행복했어요.
그런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또 한 번 하고 싶은 마음도 있나요?
하고 싶죠. 살면서 사랑을 주고받고, 감정을 나누는 경험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 같아서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난다면 꼭 하고 싶어요. 작품과 배우도 약간 운명 같은 순간이 있다고 믿는데, 그런 순간이 오면 좋겠네요.
나이가 들면서 생긴 새로운 지향점이 있다면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점점 느껴요. 예전에는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게 가장 큰 배려라고 여겼는데, 상대가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걸 받을 줄 아는 것도 필요하더라고요. 소소하더라도 ‘고맙다’ ‘좋다’ 같은 표현도 직간접적으로 많이 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달려온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건 뭔가요?
지금껏 배우로 잘 지내온 것. 사실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결과와 별개로 과정에서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도 많았지만,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싹 다 잊고‘나 재밌는 것 하고 싶어’ 이래요.(웃음) 이번에도 저희끼리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다음에는 완전 범죄물을 해보자’고 하면, 누구는 범죄물 힘들다고 로맨스 하고 싶다고 해요. 그럼 전 생각하죠.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은 배우들이 다 똑같구나. 나도 잘해왔구나’라고요.
김준한
<건물주>의 이야기 주축에 두 부부가 있죠. 인터뷰 전 궁금해서 ‘김준한 결혼’을 검색해보니, <안나> 때 수지 씨와 촬영한 웨딩 사진이 잔뜩 나오던데요.
참 과감하게 작품 홍보를 했던 덕분에 당시 많은 사람에게 원성을 들었죠.(웃음)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깊은 욕망을 전시하듯 표현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표현해주신 감독님에게 지금도 감사하죠. 다만 결혼은, 아직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영화 <살목지>와 <인턴> <파문> 등 차기작도 많아요. 그 사이 예능 <바다 건너 바퀴 달린 집> 출연으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요. <굿파트너>에 함께한 장나라, 지승현, 그리고 배우 성동일, 김희원까지 함께 홋카이도에서 보낸 시간은 어땠나요?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저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어요. 이제 좀 친해졌다, 긴장이 풀렸다 싶으니까 집에 가야 되는 상황이라 아쉬웠지만요. 특히 나라 선배가 직접 해준 요리를 맛보면서 우리만의 늦은 뒤풀이를 한 것 같아 찡하기도 했어요.
작품과 헤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가요?
<굿파트너>라는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커요. 정우진이 사실 제게는 숙제였거든요. 좋은 역할인 만큼 고민도 많이 한 캐릭터인데, 이제 좀 알 것 같을 때 헤어졌죠. 익숙해질 만하면 떠나야 하는 게 여행과 좀 비슷하기도 하네요.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그냥 있어줘야 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자리를 지키며, 그늘이 되어주는 역할인데, 그 사이 악역을 워낙 많이 했고, 보는 분들에게 제가 그런 이미지로 단박에 설득될 것 같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또 뭘 하려고 들면 그건 우진이가 아니고. 방송 직전까지도 혼자 계속 좌절했어요. 그런데 역시 작품은 저 혼자 하는 게 아닌 것이, 작품을 보니 우진이가 있었어요. 다 같이 만들어주신 거죠.
이렇게 마주 앉아 얼굴을 보니 그동안 악역 제안을 많이 받은 게 묘하게 납득이 됩니다.
흔한 말로 ‘얼굴에 선과 악이 다 있다’고 하시는데, 배우로서는 너무 감사한 말이죠. 사실 악역이 마음 편한 부분도 있어요.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기가 더 어렵듯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악한 건 배려나 고민을 내려놓을 때 따라오는 거라서 되게 다양한 길을 가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선한 건 정의로운 척 목소리를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본질이 뭘지를 깊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어요.
민활성은 엘리트지만 거듭 실패를 해요. 부유한 처가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오랜 친구 기수종까지 범죄에 끌어들이는 인물입니다.
항상 인물이 자기를 합리화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해요. 일종의 영역 싸움 중에 민활성의 경우도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데, 그 기준이 좀 ‘골 때리는’ 부분이 있죠. 우리가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을 악역이라고 하잖아요.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임필성 감독과도 역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나요?
감독님 모니터 옆자리가 현장에서 제 공식 지정석일 정도였어요.(웃음) 이미 찍은 촬영분에 대한 토론도 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도 말하고, 감독님에게 넋두리하듯 이야기하면서 계속 찾아갔죠. 감독님도 제가 촬영하고 뒤에서 갸우뚱하고 있으면, ‘네가 이상하다고 한 게 난 다 좋았다’며 계속 안심시켜주시고요. (하)정우 형에게도 많이 배웠어요. 제가 고민이 워낙 많고 연기를 팽팽하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안 해도 된다는 걸 실감했죠.
이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이 어떤 걸 느끼길 기대해요?
<건물주>의 인물들은 다 자기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거든요. 다만 낭떠러지 끝에 몰렸기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과감한 선택을 하고, 그것들이 도미노가 되죠. 그런데 우리도 살다 보면 어떤 상황과 맞닥뜨릴지 모르잖아요. 갑자기 인생의 선로가 바뀌는 드라마틱한 순간을 맞을 수도 있고요.
김준한도 과감한 결정을 내린 적이 있나요?
생각보다 과감한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음악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그렇지만, 또 연기를 위해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기도 했고요. 내가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에 솔직하게 살았구나 싶어요. 운도 좋았죠. 연기 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오디션에 전념하자고 결심한 지 반년도 안 돼서 <박열>을 만났으니까요. 앞으로도 마음이 또 움직이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어요.
여전히 독서가 취미인가요?
독서가 참 신기한 게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제가 읽은 것과 경험이 섞이는 느낌이 있어요. 독서를 흔히 자기 확장이라고 하지만, 저는 연결인 것 같아요.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상상력에서 시작한다’는 말처럼 과학에도 예술적 사고가 필요하고, 연기를 할 때도 다른 관점이 필요하잖아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점도 발견했나요?
전 계속 변할 것 같아요. 겉으로는 큰 차이 없어 보여도 생각의 흐름이 바뀌면서 저는 제가 눈빛이나 몸가짐도 조금은 변한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예전에는 독설가였어요.(웃음) 그런데 날카로운 척했던 지점에 대해 어느 순간 이해도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런 부분이 좀 부드러워졌다고 할 수도 있겠죠. 사람들이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고 사고하다 보면 염세적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유한한 사람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뭐든 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100% 행복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순간은요?
삶이 잔잔하게 흘러갈 때죠. 푹 자고 일어나서, 청소하고, 책 읽고, 운동하고, 그런 평범하면서도 단단한 일상을 스스로 잘 꾸려 나갈 때 행복을 느껴요. 욕심이 많은 편인데, 너무 많은 걸 해내는 게 꼭 삶을 지탱해주는 것 같진 않더라고요.
숙면, 청소, 독서, 운동…. 이 중 하나만 해도 ‘갓생’인데요.
그러니까요. 다들 얼마나 버겁게 살아가고 있으면 푹 자고 일어나 청소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정수정
오늘도 새벽까지 <건물주> 촬영이 있었다면서요?
아침까지 찍고, 예능 하나 찍고, 또 <얼루어> 현장에 와 있네요.
드라마가 드디어 공개되는데요. 어떤 면에서 기대되는 작품인가요?
대본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재미있었어요. ‘그런 점이 어떻게 표현될까?’ ‘시청자분들에게 어떻게 닿을까?’ 이 점이 궁금해요. 저도 아직 본 적이 없거든요. 또 드라마가 한 4년 만이라서 더 기대돼요. 감독님과 배우분들이 대단하시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빵빵’하다!
하하, 오늘 모인 다섯 배우죠. 놀랍습니다.
여기에 제가 껴도 되는지….(웃음)
그렇게 환상의 5인조가 완성된 거죠. 조금 전에 남편 분인 김준한 씨도 만났습니다.
선배가 남편 역할을 많이 하더라고요. 지금도 조금 못된 남편이죠.(웃음)
이번 작품도 수정 씨가 둘입니다. 다 같이 모이면 뭐라고 부르나요?
수정 언니랑 전작 <거미집>을 했을 때는 모두가 저희를 다 그냥 ‘수정’ ‘수정’ 이렇게 불렀어요. 그런데 이 현장은 저를 크리스탈이라고 불러요.(웃음) “크리스탈!”
임필성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감독님도 드라마는 처음 하신다고 하는데, 배우의 입장을 정말 잘 이해하시더라고요. 현장에서뿐 아니라 사적으로 대화할 때도요. 그 사람이 배우든, 누구든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고 싶어 하세요. 또 되게 쿨하세요. 편하게 해주셔서 작업할 때는 부담 없이, 물론 부담은 되지만 현장 자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세요.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해외 행사에서 하정우 선배를 만났는데, “혹시 다음 작품 계획한 거 있느냐”고 하셨어요. “임필성 감독님 작품이 있는데, 마침 정수정을 생각하던 차에, 오늘 너를 만나서 너무 신기하다. 대본 한번 읽어볼래?” 해서 대본을 받았어요. 너무 궁금해서 빨리 읽었고, 특히 에피소드들이 초반에 좀 몰아치거든요.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었어요. 안 할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어요.
‘이경’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뭐였나요?
제 캐릭터가 감정적인 신이 좀 많아요. 그렇게까지 감정 신이 많은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어서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겪는 게 많고 자꾸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서 감정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캐릭터예요.
촬영 전에 임 감독과 이경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나요?
감독님은 “나는 배우를 믿어.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항상 이런 말을 하세요. ‘배우가 맞다고 하면 배우가 맞는 거지’ 하는 스타일이세요. 정우 선배나 수정 언니는 너무 베테랑인데, 저는 그래도 되나 늘 고민됐어요.
건물주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에 공감이 되었나요?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지만, 전 별로 관심이 없어요. 피곤해요.(웃음)
여기 모인 주요 인물 다섯 중 수정 씨가 맡은 ‘이경’은 유일하게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죠.
맞아요. 사실 저는 돈에 그렇게 연연하는 편이 아닌데, 남편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의 경제 수준에 제 생활을 좀 맞춰주는 면이 있어요. 그래도 부유한 역할이다 보니 처음에는 화려하게 입으려고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예쁜 옷을 입을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이경’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사람인 것 같은데, 남편 ‘활성’을 택한 것도 그 사람만 본 것 아니었을까요?
순수한 사람이에요. 안 좋은 일을 겪는 것도 순수하고 순진한 면이 있어서예요. 다들 그랬어요. 사실은 이경이가 제일 착하다고.
이경이 활성에게 갖는 감정은 뭐라고 생각해요?
어릴 적 활성과 결혼해서 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어요. 시간이 흐르며 미운 정도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 중심에는 여전히 사랑이 있어요. 첫사랑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이경이 활성에게 바란 건 뭘까요?
“계속 그냥 그렇게 있어주면 돼.”
그렇지만 활성 때문에 상당한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하. 하지만 저도 다 알고 시작한 거고, 또 현장에서 최대한 배려해주셨어요.
여기 모인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건 또 어떤 즐거움이었나요?
준한 선배, 수정 언니와 붙는 신이 많아요. 수정 언니와 정우 선배는 조언을 정말 잘해줘요. 제 캐릭터를 같이 고민해주고 “이경이라면 어떻게 얘기할까?” “네 생각은 어때?”라고 물으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줬어요. 제가 감정 신을 앞두고 부담감에 자신 없어 할 때면, 정우 선배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현장에 오라’고 말해줬거든요. 감정 신을 미리 계산해서 오지 말라고요.
오히려 가벼워져야 한다는 조언이었나요?
맞아요. ‘오늘 나 여기서 울어야 되는 신이네’ 하는 생각을 갖고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또 다른 신 찍네!’ 이렇게 생각해보라고, 저한테 툭 던지듯이 조언해줬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저는 항상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가벼워지니까 순간적으로 몰입될 때가 있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어요. 그다음부터는 선배님 아니고 ‘하정우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웃음)
<거미집> 이후 기대가 높아졌어요. 부담감도 있었나요?
칭찬을 받는다고 금세 들뜨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감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를 의심하기도 해요. 칭찬을 들었다고 해서 막 ‘내가 진짜 잘했나?’ 하는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고요. 저는 사실 모니터도 잘 못하고요.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남을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이든 기대를 엄청 하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냥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단순한 면도 있어요. 재밌어서, 내가 원해서 하기로 했으니까 했다. “왜 정수정이 여기 나왔어?”라는 말만 안 듣고 싶어요.(웃음) 이번 작품은 특히 진짜 같이 만들어가는 매력이 있었어요. 배운 게 너무 많아요. 이런 시각으로도 보고,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도 생각하는구나. 모두에게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은 잘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엊그제도 촬영하는데 ‘이거 진짜 잘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떠오르더라고요. 다들 디테일이 엄청나요.
그런 사람들이 모일수록 심플한 사람이 필요하다니까요.
임 감독님이 저한테 항상 하던 얘기예요. “크리스탈이 역시 쿨해!” 저는 사실 ‘에이, 몰라!’ 이거거든요. 저 사실 별로 안 쿨해요.(웃음)
심은경
<여행과 나날>로 ‘키네마 준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오늘 촬영장에 오기 전에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셨어요? 이제 거의 상영 막바지인 것 같았거든요.
수상 소식 덕분인지 오히려 지난주보다 상영관이 늘었던데요! 이런 큰 상을 받으면 어떤 감정이 찾아오나요?
워낙 권위 있는 상이다 보니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오히려 조금 차분해졌어요. ‘서툴면 서툰 대로 자기 길을 걸어 나가는 게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작품으로 이렇게 큰 상을 받았다는 것에서 괜히 저 자신도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관객을 만나 소통하고 싶은지도요.
극 중에서 각본가인 주인공 ‘이’가 GV에 참석한 장면이 나오죠. 조금은 어색한 그 분위기를 실제 심은경도 경험한 적 있겠지 싶었어요.
배우가 자기 작품을 소개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또 갑작스럽게 자신의 부족함도 느끼게 되거든요. 그런 미묘함을 캐치하는 장면이라 대본에서 봤을 때 마음이 갔어요. 미야케 쇼 감독님은 항상 동시대 사람들의 초상을 그려내는 분이잖아요. 감독님이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신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다가오기도 했죠.
자기 의심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죠. <건물주> 촬영은 어땠나요? <머니게임> 이후 한국 드라마 촬영장은 꽤 오랜만인데 바뀐 게 있던가요?
제작 환경이 바뀌었다기보다는 현장 분위기 자체가 압도되는 면이 있었어요. 하정우 선배님도 드라마는 굉장히 오랜만이고, 임필성 감독님의 첫 드라마잖아요. 여러모로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한 자극을 주는 현장이었어요. 제 역할도 기존과 많이 달랐고요.
‘드디어’라고 해야 할까요. 악역을 맡았습니다. 리얼 캐피탈 런던 지부에서 일하는 요나는 국적도, 정체성도 모호해요. 그의 어떤 면에 끌렸나요?
‘빌런’을 연기하고 싶다는 오랜 염원을 풀었죠.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열 번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고요.(웃음) 감독님과 촬영 전에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악역이 되면 좋겠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죠. 요나를 키워드로 설명하면 순진무구함, 그리고 성실함 같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괴리감이 느껴질지언정 자기만의 순수함이 있고, 정말로 자기 일을 열심히 수행하거든요.
여러모로 미스터리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 속 요한도 슬쩍 떠올라요.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은 적이 있죠?
요한을 비롯해 여러 인물을 떠올리며 캐릭터를 만들어갔어요. <프라이멀 피어>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이중인격 캐릭터, <향수>의 그르누이를 참고했죠.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는 영화도 영화지만 소설이 1인칭으로 진행되다 보니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한국적인 욕망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요나는 그런 가치에는 초연한가요?
요나가 관심을 갖는 인물은 기수종이에요. 그를 압박하며 대치하는 과정에서 왠지 모를 ‘친근감’과 ‘재밌다’는 감정을 느끼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요나가 악역으로서 한 번씩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만들며 긴장감과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쓰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해외 영화제 참석은 어떤 경험을 남기나요? <더 킬러스>로 뉴욕아시안영화제를 다녀왔던 것에 이어, <여행과 나날>로 로카르노영화제에 참석했어요.
제가 출연한 작품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즐길 때 새삼 영화의 힘을 느껴요. 사실 저도 때때로 궁금하거든요. 왜 나는 영화를 보고 왜 영화관에 갈까, 여기에 직업적인 것 외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 영화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이 로카르노에서 특히 해소됐어요. 영화만의 명백한 에너지와 존재 의의를 느꼈죠.
아역 배우로 아홉 살 때 일을 시작했고, 10대 때 이미 <써니>와 <수상한 그녀> 같은 흥행 영화의 주연을 해냈어요. 이후에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자기만의 활로를 구축했죠. 제일 성장한 구간은 언제인 것 같아요?
올해로 서른셋이 됐는데요. 어떤 특정한 경험이 나를 이끌어줬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심코 지나친 순간순간이 모여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조금 나태했던 20대 초반이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자책한 순간조차 결코 쓸모없지 않았더라고요. 그렇게 따지면 모든 순간이 경험인 거죠.
좋은 방향으로 잘 걸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나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죠.(웃음) 다만 내가 무엇을 향해 가는지, 그 방향만큼은 잃지 않고 계속 생각하려고 해요. 연기를 해내는 것뿐 아니라 연기를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잊지 않고 인생이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죠.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면서요. 왜냐하면 정말 노력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거든요. 부족한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끝없이 찾아가기 위해서는.
늘 노력이라는 단어가 나오네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때도 물론 있겠죠?
한창 ‘노력’을 강조하던 시기에도 말만 그렇게 할 뿐 노력하기 싫었을 수도 있어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저는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요즘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잘해나가려고 하나 봐요. 배우라는 직업을 계속 영위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깨닫기도 했고요.
언젠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을까요?
아직 저는 제 안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저 스스로 이미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보다 여러 이야기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요. 무엇보다 연기를 더 잘하고 싶어요.
나에게 칭찬을 하나 해준다면요?
그래도 헛되게 살지는 않은 것 같아요. 뭐랄까, ‘크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샛길로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지구력 있게 잘 걸어왔구나’라는 걸 문득 느끼고는 해요. 이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걷기왕>의 만복이 같네요. 오늘 이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가서 뭘 하면 행복할까요?
와 퇴근! 이렇게 별 탈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면 마음이 정말 편안해요. 집에 가서 씻고 침대 위에서 요거트를 먹는 것. 정말 제 소소한 행복의 순간입니다.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스타일리스트
- 이현하(하정우), 부지연(임수정), 장지연(김준한), 윤지빈(정수정), 이지민(심은경)
- 헤어
- 임해경(하정우), 손혜진(임수정), 엄정미(김준한), 경민정(정수정), 하영(심은경)
- 메이크업
- 임해경(하정우), 이영(임수정), 전달래(김준한), 이아영(정수정), 임서영(심은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