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가 사랑하는 90년대 발라드 이야기

1990년대 발라드가 우리의 귀와 마음을 다시 사로잡은 이유. 지금 우리에게 다시 필요한 건 ‘서정’의 회복일지도 모른다.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를 보며 ‘아, 이 노래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 제가 추구해온 사운드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됐죠. 비록 경연에서 부르지는 않았지만, 전람회의 ‘꿈 속에서’도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음악을 포기할지 깊이 고민할 때 가사가 마음에 닿아 자주 들은 곡이에요.” 2025년 연말을 잔잔하게 물들이며 지난 12월 종영한 SBS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우리들의 발라드> 우승자 이예지는 제주 출신이다. 뮤지션을 꿈꾸며 상경한 출연 당시 19세였던 소녀 이예지의 노래를 한층 아름답고 힘 있게 만든 것은 그 뒤에 놓인 이야기였다. 택배 기사인 아버지의 트럭에서 함께 자주 듣던 임재범의 ‘너를 위해’는 물론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짙은 어둠을 헤매고 있어(이승철-‘말리꽃’)”나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윤종신-‘오르막길’)”처럼 익히 잘 안다고 생각한 곡들도 이예지의 목소리와 서사를 만나면 완전히 다른 의미와 풍경으로 재탄생했다.

모든 경연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서사는 중요한 요소지만, 과감한 편곡이나 과장된 연출 없이도 이토록 풍부한 감정이 전해질 수 있었던 건 발라드라는 장르의 본질 덕분이다. <흑백요리사> 모은설 작가의 기획안에서 시작해 <K팝스타>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온 박성훈 CP와 정익승 PD가 의기투합한 <우리들의 발라드>의 심사위원들은 스스로 ‘탑백귀(Top 100 취향의 귀)’를 자처하며 대중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총 9인의 심사위원이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를 부르며 각자의 추억을 공유한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백미였다. 발라드가 더할 나위 없이 대중적인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각자의 삶과 맥락 속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장르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낸 셈이다. 

지난 연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故) 김영대 평론가는 지난해 11월 한국 발라드 117곡을 368페이지에 걸쳐 망라한 저서 <더 송 라이터스>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발라드를 ‘이야기의 힘으로 전개되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발라드는 남녀노소 누구나 노래방 가서 한 번쯤 부르잖아요. 다른 장르의 곡들이 특정 시대의 이미지 속에 화석처럼 박제되는 것과 달리, 발라드는 생명력이 길죠. 곡이 만들어질 때는 이소라 씨의 사랑 이야기이고, 윤종신 씨의 개인사일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원곡도 큰 의미가 없어지고 노래방에서 부른 ‘내 버전’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런 장르는 우리나라에서 발라드가 유일하지 않나 싶어요.” 생전 마지막 만남에서 그에게 한국 발라드에 대해 집필한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발라드는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음악이라 평론가들이 깊게 파고드는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통속적이라고 해서 음악성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발라드와 얽힌 추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기에, 발라드를 정리하는 작업이 곧 한국 대중음악사의 근간을 정리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발라드를 향한 그의 ‘덕력’은 또 다른 곳에서도 발휘되었다. 책 집필 중 SBS로부터 연락을 받고 <우리들의 발라드> 경연 후보곡 200여 곡을 추천하기도 했던 것. 마침 2025년 하반기에는 K-팝 아이돌들의 곡에서도 90년대 발라드 정서가 짙게 묻어났다. 보이넥스트도어의 ‘있잖아’나, 앤팀의 ’MISMATCH’가 대표적이다. 두 곡 모두 타이틀곡이 아님에도 팬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연말 시상식 등 특별 무대에도 소환됐다. <리무진 서비스> 같은 가창 중심 프로그램에서 아이돌이 이문세, 유재하, 이소라의 곡을 부르는 모습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흐름은 어떻게 생긴 걸까? 갑자기 다들 90년대를 그리워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걸까? 김영대 평론가는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봤다. “최근 몇 년간 주류 음악의 키워드는 힐링과 연대, 진정성이나 나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렇다면 그 상위 개념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걸 그룹은 뉴진스를 기점으로 이미 서정적인 면을 이어왔고, 올해 나온 라이즈의 신곡이나, 신인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곡들도 감정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거든요.” 

‘서정성’과 ‘정서’는 발라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다. 이는 ‘발라드(Ballad)’라는 단어의 기원과도 맥을 같이한다. 중세 음유시인의 서사시에서 유래한 발라드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사랑 이야기와 치정, 비극에 얽힌 소재를 다뤄왔다. 매스미디어의 발달 이전에는 ‘브로드사이드 발라드(Broadside Ballad)’라는 인쇄물로 퍼져 나갔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느리고 감성적인 운율에 실리며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한편 현대의 발라드는 포크, 록, R&B, 미디엄 템포 등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되었다. 이 모든 역사와 장르를 발라드로 포괄하는 동시에, 구분 짓는 결정적 요소는 바로 ‘정서’다.  

CBS에서 운영하는 음악 유튜브 채널 <라디오가가>의 ‘발라드 대책회의’ 편에 출연한 가수 별이 “발라드는 책이랑 비슷하다.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처럼 발라드는 그런 서사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라드가 어떤 기술적인 설명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정서에 기댄 장르이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프로그램의 후속편에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심현보도 발라드를 ‘예쁨의 정서’라고 표현했다. 김영대 평론가가 한국 발라드의 원년을 이문세와 작사가 이영훈 콤비가 처음으로 함께하며 ‘소녀’ ‘그대와 영원히’ 등의 명곡을 담아낸 이문세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발매된 1985년으로 정의한 것도 그런 이유다. 멜로디와 가사가 만나, ‘아련함’이라는 어떤 정서를 탄생시킨 상징적인 순간을 꼽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가요 시대의 서정성은 오늘날 K-팝의 거센 물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많은 사람이 K-팝 신에서 발라드가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예전처럼 애절한 사랑의 정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서로의 마음을 메시지로 즉각 공유할 수 있고, 헤어지더라도 SNS를 통해 상대방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연애’나 ‘결혼’이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 된 지금 예전 발라드의 애끓고, 때로는 ‘찌질한’ 정서는 더 이상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곡 탄생의 과정 역시 근본적으로 변했다. 작곡가와 가창자의 호흡이 정서를 온전히 끌고 가던 예전과 달리, 아이돌 그룹의 곡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창작자의 크레딧도 파트별로 쪼개진다. 쉽게 내 이야기와 연결할 수 있었던 한글 가사의 비중이 줄고, 짧은 호흡의 캐치한 후렴구가 강조되는 환경에서, 서사적인 발라드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일까? 돌아보면 형태만 조금 달라졌을 뿐, 대중이 사랑 노래를 외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드라마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몰입하게 하는 OST는 발라드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한다. 엑소의 ‘첫 눈’이나, 뉴진스의 ‘Ditto’가 품은 정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의 겨울을 대변하며 해마다 차트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폭발적인 가창력 대신 최유리나 한로로의 곡들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마음을 간지럽혔고, 2019년 곡인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나,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는 여전히 차트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권진아의 ‘운이 좋았지’나 데이식스의 ‘예뻤어’가 주는 깊은 여운은 또 어떤가? 특히 악기 연주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비롯해 전통적인 발라드 전개를 따른 화사의 ‘Good Goodbye’의 완벽한 역주행은 곡이 발굴되는 순간, 그 곡을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기존 발라드의 서사를 따르는 곡들 외에, 현재 음악 시장의 주류인 K-팝 아이돌 음악이 콘셉트와 퍼포먼스를 넘어 고유의 정서와 이야기를 환기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볼 만하다. 지난해 4월 데뷔 이후 발매한 앨범 세 장이 누적 1백20만 장의 판매를 기록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1집 발표 당시 문학 소년 콘셉트를 내세웠다. ‘내 안의 모든 시와 소설은’ ‘사과가 하늘로 떨어진 날’ 같은 곡들의 제목부터 시적이지만, 대다수의 곡 가사를 한두 명의 작사가가 써 내려간 것도 특징이다. 엔시티 드림의 ‘숨(Breathing)’ 작사가 우승연이 쓴 ‘ㅠ’는 “웃는 게 예쁘단 생각은 전혀 안 했어/ 너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하지 않았어/ 한 번도 바란 적 없지 둘이서 추는 춤/ 오늘도 내가 날 속이는 거짓말”이라며 짝사랑을 부인하는 소년의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런 곡들이 좀 더 많이 들리고,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아티스트의 곡을 찾아 들으려는 리스너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이토록 곡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의 어떤 시간을 돌아봤을 때 알고리즘에 기댄 차트 인기곡이나 틱톡 챌린지의 하이라이트만 남아 있다면 그건 조금 아쉬운 일일 테니까. 그러니 나만의 서정을 찾아보길, 그것이 꼭 발라드가 아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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