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고요 속에 자리한 브랜드 ‘제이든 초’. 조성민이 잡으려고 하는 찰나의 행복.


2021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복 브랜드 ‘제이든 초(Jaden Cho)’를 론칭해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해 주목받은 디자이너. 이와 동시에 전통 원단과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브랜드, ‘엄버 포스트파스트(Umber Postpast, 이하 ‘엄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장인들과 경계 없는 협업 또한 이어가고 있다. 북촌에 자리한 매장에서 2막을 꿈꾸는 조성민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2026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나? 새해 계획은.
작년 11월 SFDF 우승을 계기로 하나의 챕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는 느낌이다. 올해는 새로운 브랜드의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해로 삼고자 한다. 다가오는 밀란과 파리 패션위크에는 제이든 초 단독으로 참가할 예정이고, 올해부터는 옷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이야기하는 브랜드로 확장할 계획이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의 확장을 꿈꾸는 건가?
나를 소개할 때 항상 “‘제이든 초’를 운영하는 조성민입니다”라고 말한다. 패션 디자이너로 소개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옷 만드는 사람으로만 한정 짓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기에는 워낙 대단한 CD가 많고, ‘내가 정말 디렉션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항상 고군분투 중이다.(웃음) 제이든 초의 라이프스타일 제품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정말 좋아할 것들로 만들고 싶다. 그런 요소가 느껴져야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로서의 지속 가능성도 생기지 않을까. 예를 들어 취미로 해온 도자기 작업은 유약 개발을 마무리하고, 서울의 도자기 스튜디오 CIR에 제작을 부탁해 컵과 화병 등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쇼룸의 테이블과 의자부터 범상치 않다.
프랑스의 가구 디자이너 피에르 샤포(Pierre Chapo)가 생전에 직접 만든 빈티지 피스다. 세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로따로 구입했다. 느릅나무를 통째로 깎아내고 붙이는 방식을 고수했는데, 이로 인해 재료의 물성이 잘 보이고 나무끼리 엮여 부피감이 드러나는 게 매력적이다. 실크처럼 예전부터 존재한 소재를 활용하는 제이든 초의 지향과 닮은 점도 있는 것 같다.
말한 것처럼 제이든 초와 엄버 모두 고유의 소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특징은 계획 중인 새로운 라인에 어떻게 반영될까?
제이든 초의 의상 디테일에서 돋보이는 컷아웃 기법이나 비즈 장식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브랜드가 사용하는 원단 중에는 소파나 쿠션에 쓸 수 있을 만큼 좋은 원단도 있다. 실제로 쇼룸의 소파를 감싸는 데 사용된 데이지 패턴의 울 자카드 원단은 방염 처리까지 되어 있다. 이런 원단은 조명 갓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일 때 압박감이 자연스레 수반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위로를 얻나?
오래 알고 지낸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한다. 마음을 나누다 보면 내 기분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받는 피드백만으로도 웬만한 걱정은 거의 해결된다. 인간관계에서 지키는 내 원칙은 ‘받은 만큼 주자’는 것이다. 내가 뭔가 잃더라도 이용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가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게 우선이다.
운동이나 식단, 명상과 같은 건강하고 규칙적인 삶의 방식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지키려고 고수하는 루틴은 무엇인가?
출근 후 거울 한 번 보지 않고 집에 오는 날이 많다는 걸 깨달은 이후, 의도적으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무조건 지키는 건 점심시간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 먹기 전까지는 개인적인 일을 무조건 끝낸다는 마음이다. 이후부터는 회사 일, 컨펌, 미팅 등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한다. 이 기점이 중요한데, 이상하게 해가 없으면 힘이 빠진다. 자연광이 있을 때 일하자는 주의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매장이든 무의식적으로 가장 먼저 창문과 빛부터 찾게 되더라. 그래서 겨울에는 일을 좀 빨리 마친다. 대신 여름에는 좀 늦게까지 하고.(웃음)
빛이 삶에 정말 중요한 요소인가 보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건 자연에서 오는 것들이구나 싶다. 합성섬유는 쓰지 않고 실크와 면 같은 천연섬유를 선호하고, 꽃을 가까이 두거나 가구도 목재의 묵직한 질감과 결이 살아 있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내 의도나 통제하에 있지 않은 자연물이 주는 독특한 질감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빛도 포함된 것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변치 않는 취향이 있나?
내 취향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명확하다. 게임이나 가상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앞으로도 실질적으로 만지고, 체험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다. 옷은 공예는 아니지만, 사실 비즈를 붙이고 자수를 놓는 것만이 손으로 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셔츠 하나도 손으로 자르고, 봉제하는 과정이 모두 들어간다. 심지어 기계를 사용하더라도, 결국 그 기계를 움직이는 손의 감각과 의도가 결과물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런 수작업에 대한 존중을 담아 2023년 컬렉션을 ‘Palms and Fingers’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원단 수입 일을 오래 하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나?
어릴 적부터 집에 원단이 너무 많았다. 특히 어머니가 집에 가져오는 재고는 비싸서 안 팔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웃음) 중고등학생 때부터는 어머니가 서울이나 런던으로 출장을 가실 때마다 자발적으로 매번 따라다녔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색, 실제 원단의 짜임과 재질이 만들어내는 색의 깊이, 새로운 도시의 빛이 스며드는 순간이 어린 시절 내게 강렬한 자극이 됐다. 20년 전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커다란 튤립을 비롯해 다양한 꽃과 색을 본 것이다.



제이든 초를 소개할 때 낭만, 행복, 여유라는 단어를 항상 사용하더라. 이 단어들이 선사하는 감정을 최근 발견한 순간은?
처음 브랜드를 론칭할 때, 내가 뭘 제일 좋아하고 원하는지 생각했다. 가까운 이들에게 ‘내가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뭐냐’고 물었더니 “항상 행복하자” “낭만 있다” “여유롭게 살고 싶다”라고 하더라. 세 가지의 공통점은 바라고 지향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찾아오더라도 결국 짧은 순간만 머무는 감정들이다. 그래서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이 제이든 초를 구입한 순간, 그 찰나만이라도 낭만이나 행복, 여유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브랜드의 형태를 계속 가꿔온 것 같다.
꽃꽂이나 도예 같은 취미에 이어 요즘 제이든 초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을 바쳐 자신만의 작업을 해온 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의 내면은 비로소 풍요로워진다. 예를 들어 제주에서만 자라는 풀인 정동을 키우고 말려 정동벌립 모자를 만드는 홍양숙 작가님은 정말 문화재급 귀한 기술을 지켜온 분이다. 오는 3월에는 선생님의 평생 작업물을 모아 선보일 계획이다. 제주 태생으로 제주 옹기를 빚는 담화헌 정미선 작가님의 작품은 이미 한 차례 소개한 바 있고, 70대 노부부가 운영하는 자연 염색 공방 느티나무는 5년간 협업해온 곳으로 2월 28일까지 엄버 매장 지하 1층 공간에서 전시가 열린다. 이런 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힘든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래서 그게 개인의 삶과 작업 방식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그런 대화를 즐긴다.
북촌 스토어의 손잡이 또한 ‘거믄목기’로 잘 알려진 김전욱 목공가의 작품이다. 이런 장인과의 만남에서 공통적으로 얻어지는 진리가 있을까?
혼자 작업하는 분들이 거의 없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혹은 팀원과 평생을 함께했고 그 관계가 실로 끈끈하다. 제이든 초의 작품도 손으로 하는 작업이 많고, 쿠튀르적인 요소가 있어서인지 장인정신에 대해 종종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우정’이라고 답하곤 한다. 결과물과 금전이 오가더라도 결국엔 서로에게 계속 신뢰를 쌓는 과정이 오랜 친구 관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패션을 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하고 소비적인 일이라고 평가절하당하기 쉬운 분야니까. 그런데 오히려 패션이라는, 내가 상대적으로 잘 아는 산업을 통해 그분들의 작업과 엮일 수 있다는 걸 설명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공예를 하는 분들이 이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함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에서 스스로 치유받기도 했다.
10대 시절 어머니를 따라간 런던에서 마주한 커다란 패턴과 화려한 색에 매료됐고,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여성복 석사를 마쳤다. 이 시기와 한국 전통 작품의 매력에 빠진 지금은 간극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영국에 머문 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딱 3년 정도다. 그 시기에 오히려 내가 그동안 바라고 쌓아온 것들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건 무엇일까 돌아보니 결국 전통과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창작자라면 공통으로 느끼는 숙제 아닐까 싶다. 전통의 재정립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제. 이 세대가 그걸 외면하면 이것들이 영원히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랄까? 실제로 미래로 가져갈 수 있는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지금 세대가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고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평생 서울에 살고 싶고, 한국 사람인 게 나쁘지 않다. 그러려면 한국 것을 지켜내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2025년은 한국적인 미가 특히 주목받은 한 해였다. 그걸 제이든 초의 방식으로 소화한다면?
작년만 해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작품이나 민화의 강렬한 시각적 파급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면, 이제는 그 너머로 나아가고 싶다. 우리 삶에 이미 자연스럽게 스며든 한국적인 특성 자체를 논의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리의 키워드 중에 ‘자연스러움’이 분명 있다. 한국의 실크 공장과 협업해서 옷을 만들고, 국내에서 이미 생산되는 원단을 활용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엄버가 과거로부터 이어온 이야기를 전한다면, 제이든 초는 지금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아직 정의되지 않았지만, 명확히 존재하는 무형의 에너지를 반영하려고 한다. 그게 브랜드의 방향이 되어야 할 테고.
올해, 나의 웰니스를 위해 하나만은 계속하기로 다짐한 것이 있다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 옷 만들기다. 두 브랜드를 동시에 시작하고, 옷뿐 아니라 신발과 가방까지 만들고, 매장이 생기고, 4년 넘게 치열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너무 많은 옷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당연한 행위를 어느 순간부터 기피하게 되더라.(웃음) 그런데 결국 내게 압도적인 행복감을 주는 건 옷이다. 피팅 룸에서 모델이 옷을 입고 나오는 순간, 그 3초 정도의 찰나가 어떤 행복보다 최고치여서 이후 실망할 걸 알면서도 계속 해나가려고 한다.
- 포토그래퍼
- 김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