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탁류>가 세상에 공개됐네요?
앞으로 9월 26일은 잊을 수 없는 날짜가 될 거예요. <얼루어> 화보 촬영과 <탁류>의 첫 방송 날짜가 같다니 이게 무슨 우연인가 싶어요. 1시간 전부터 온몸이 떨렸는데, 용기를 내서 조금 전 디즈니플러스 앱에 들어가서 공개된 걸 확인했어요. 진짜 공개된 걸 보니 더 떨려요. 로운이가 꼭 어두운 곳에서 보라고 해서 오늘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혼자 보려고요.
지금도 손이 달달 떨리고 있어요. <시맨틱 에러> 이후 2년 반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죠?
맞아요. 그사이 군대도 다녀왔고요. 그래서 누구보다 더 기다렸어요. 지금 이 떨림이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데뷔하는 기분이에요.
지난 9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온 스크린’ 섹션 초청작으로 선정돼 먼저 관객을 만났죠. 그날도 이렇게 떨었어요?
그럼요.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시청하는 걸 보는데 신기하고 울컥하더라고요. 저 역시 한 장면 한 장면 그 시간이 생각나서 현장에 계신 선배님들 얼굴만 봐도 심장이 저릿했어요. GV에 들어갈 때는 레드카펫의 10배는 더 긴장됐고요. 제 옆에 (신)예은이가 앉았는데,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다 들렸다고 하더라고요. GV가 끝날 무렵 감사함을 표하다 펑펑 울었죠. 현장 객석에 있던 왈왈(박정표 분), 말복(안승균 분), 중복(김철윤 분), 개춘(윤대열 분) 등 왈패 형들도 다 우셨대요.
마지막에 어떤 얘기를 했길래 현장의 모두를 울렸어요?
“잘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요.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많았거든요. 그 여운이 다음 날까지 계속되더라고요. 감독님을 뵐 때마다 울컥했어요.
제작 발표회에서 촬영을 하며 ‘많은 아버지를 얻었다’고 했는데, 그 감정의 연장이었나요?
여러 선배님과 감독님 모두가 조건 없이 저를 지지해주는 아버지처럼 느껴졌어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요. 피곤하실 텐데 촬영 없는 날 저를 계속 불러 가르쳐주셨어요. 지환이 형은 저를 책방에 초대해서 ‘대화하자’ ‘공부하자’고 끌어주셨고, 최귀화 선배님은 유명한 짬뽕 맛집에도 데려가 주시고요.
마치 어제 일처럼 함께 먹은 식사 메뉴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네요.
점심을 먹고 개나리가 핀 한강변을 한참 걸었어요.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가, 선배님이 갑자기 촬영할 장면의 대사를 툭 던지시는 거예요. 제가 긴장할까 봐 ‘연습하자’는 말 대신 편한 자리를 만들어주신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사 연습을 할 수 있었어요. 감독님은 현장의 모든 걸 컨트롤해야 하니 회를 거듭할수록 힘드셨을 텐데 촬영 전 늘 저와 1시간가량 산책하셨어요. 촬영장 주변을 돌며 그날 촬영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 일상과 감정, 마음을 들여다보셨어요. 어느 날은 카메라 앞에 서서 대기하는데, “서함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네 편이야!”라고 외치신 한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박혔어요.
현장에서의 시간이 한 편의 영화 같네요. <탁류>가 키운 박서함인가요?
제 육아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제가 누군가와 촬영하고 있으면 모든 선배님이 차에서 대기하지 않고 모니터 앞에 서 계셨어요. 로운이와 예은이는 늘 제 옆에서 몰입하는 걸 도와줬고요. 그 친구들이 뒷모습만 나올지라도 100 이상의 연기를 하고, 제가 위축되어 있으면 스르르 다가와 응원해줘요. “형, 오빠만큼 정천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서함 씨를 응원했네요.
그 사랑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지환이 형은 제게 미션을 주셨어요. 일주일에 세 번, 전화를 걸어라 하고요. 바쁜 스케줄 속에서 이렇게 챙겨주시는 마음이 너무 감사해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매 순간 느꼈어요.
정천은 요즘 말로 ‘육각형 인간’에 가까워요. 정천을 연구하며 가장 큰 숙제는 뭐였나요?
청렴 그 자체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더럽고 탁한 물을 정화하는 필터 같은 사람요.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고, 깨끗한 물만 찾아다니는 사람이죠. ‘이렇게 완벽한 인물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을지’를 가장 고민했어요. 액션 스쿨과 승마, 국궁 같은 기술적인 것도 열심히 배웠지만, 이해되지 않을 때는 감독님께 계속 질문했어요.
혼탁한 세상에 맞서는 세 명의 어벤저스 중 정천은 어떤 존재일까요?
등불 같은 존재요. 두 사람이 세상과 맞서는 인물인 거죠. 정천이 관리가 됨으로써 시율은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정천을 보았고, 최은 역시 부패한 관리들 틈에서 정천을 통해 맑은 물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죠. 두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을 것 같아요.
천성일 작가의 작품에는 유독 짜릿한 대사가 가득하죠. 가장 좋았던 대사는 뭐였나요?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매회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대사 한 줄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됐고요. “생선이야 대가리부터 썩는다지만 사방이 썩어 냄새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라는 정천의 대사, “힘들 때 서로 외면하는 게 왈패다”라는 무덕(박지환 분)의 대사, “눈깔을 튀겨 먹을 놈”이라는 돌개(최귀화 분)의 말은 정말 그 인물 자체라고 생각했어요.
정천 그 자체인 대사를 꼽자면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세상은 언젠가 바뀐다. 그때까지 무조건 살아”라는 말이요. 정천이 시율에게 하는 말인데, 계속해서 그 말을 해요. 살아야 한다고요. 개인적으로도 저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어요.
버티는 게 결국 이기는 거죠. 쉽지 않잖아요.
저도 2016년 데뷔하고 오래 버텼는데, 쉽지 않아요. 저를 비롯해 버티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힘을 주는 대사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버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마음은 뭐라고 생각해요?
주변을 믿는 것요. <탁류>를 하면서 알게 됐어요. 밝아 보이지만 그리 밝은 성격은 아니에요. 생각이 많아서 걱정도 커지는 스타일이거든요. 좋은 말을 10개 들어도 안 좋은 말 하나에 꽂히고요. 선배님들이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해주신 말이 “서함아, 형들이 너를 왜 응원하겠어.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잘하기를 바라는 거야”라는 말씀, 팬들이 늘 해주시는 “우리가 당신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이야기가 더 와닿더라고요.
왜 그렇게 위축됐어요?
촬영 초반, 현장에 갈 때마다 부끄러움이 몰려오더라고요. 올해 서른이 됐고, 이 나이면 이제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든 게 낯설었거든요. 카메라 앞에서 어떤 동선으로 빠져야 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조차 몰랐어요. 이 나이에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게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선배님들이 “나이가 왜? 너 어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이제는 사람이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 배우고 변화한다는 걸 믿죠.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되뇌면서 버티려고 해요. 주변 사람들 덕에 새로운 목표도 생기고요.
어떤 목표가 생겨요?
훗날 선배님들과 감독님을 뵀을 때, “저 이만큼 컸어요!”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자. 그 힘으로 살아가요. 더 잘해서 명절마다 전복 사 들고 찾아뵙고 싶습니다!
모든 걸 처음 경험한, 그야말로 ‘인생작’이 될 수 있겠네요. 지금도 한창 차기작 촬영 중이죠?
tvN 드라마 <우주를 줄게>를 한창 촬영하고 있어요. 여기에서는 현대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모든 순간이 떨렸는데,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나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요.
한창 성장 중인 사춘기 소년을 보는 것 같네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걸 가장 묻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 어때?”라는 근황요. <탁류> 촬영부터 지금까지 1년 반 정도는 제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본 시간이 없었어요.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치는데, 지금 제가 어떤 상태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요.
어떤 답이 돌아올 것 같아요?
음, 조급함요. 그런데 이제 포지티브인! 어릴 때는 어떤 결과나 성과가 잘되길 바랐지만 요즘은 제 실력이 잘 늘어나면 좋겠어요. 빨리 잘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빨리 늘고 싶다가 커요. 어떤 분이 잘 가르치나 탐색하고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어요.
오늘 유독 ‛잘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박서함에게 ‘잘한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언젠가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상대가 몰입해서 연기하는 힘을 주는 배우가 되는 거예요. <탁류>의 선배님들, 로운이와 예은이를 보면서 그걸 가장 크게 느꼈거든요. 제 꿈이 “안녕하세요. 배우 박서함입니다”를 당당하게 소개하는 건데,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죠?
- 포토그래퍼
- 김선혜
- 스타일리스트
- 정윤경
- 헤어&메이크업
- 장해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