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미식가라면 중국 ‘원난’으로 떠나야 합니다

2025.07.10이재윤

호수와 바다를 품은 칠레 남부에는 풍미 있는 식재료와 와인이 가득하다. 변화하는 기후와 시련 속에서 발견한 그들만의 미식 세계. 

350년 된 동죽림사 밖에서 기도하는 여성.
리장 구시가지 가게 앞.
윈난성 위후 마을에서 짐을 나르는 말.
벤질란 전통 예복 특유의 선명한 색상과 화려한 무늬.
저물녘 럭스 차마고도 다주 빌리지의 식당.
리장의 럭스 차마고도 다주 빌리지의 깔끔한 객실 내부. 

OLD TRADE TOWN 

“저쪽에서 왔을 겁니다.” 칭라오(Qing Lao)가 거친 손으로 상인들이 나타나던 눈 덮인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중국 남서부 윈난 북부 산맥의 작은 마을 니딩(Niding)에 자리한 라오의 부엌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야크 버터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라오가 더 깊은 기억 속으로 빠져들도록 계속 그를 부추겼다. 그는 1960~70년대, 나귀에 짐을 실은 차 상인들이 옛 무역로를 오가던 시절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계곡 전체에는 나귀의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고, 상인이 도착하면 그와 이웃들은 나귀와 짐꾼들이 짊어진 흑설탕, 나무 그릇, 그리고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벽돌처럼 단단히 압축된 보이차를 대신 내려주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물집 잡힌 피부와 동상에 걸린 손가락을 치료하고, 동물에게 먹이를 주며 앞으로 한 달 넘게 이어질 라싸(Lhasa)까지의 고된 여정을 위한 휴식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모두 티베트인이고 산골 사람입니다. 그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죠.” 라오가 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말했다.

니딩은 1200년 넘게 중국 남부 여러 지방과 티베트를 느슨하게 이어온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길의 마지막 보급소 중 하나였다. 남부의 무더운 차 생산 계곡부터 티베트의 황량한 고원까지, 강과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이 교역로는 도자기나 비단보다 더 귀한 보이차와 강인한 말, 사향, 약초 등의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개척된 곳이다. 하지만 1980년대 기계식 운송이 더욱 경제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라졌다. 나는 티베트 차 상인이 윈난의 거리를 가득 메운 시절의 흔적을 찾아 중국어를 구사하는 아내, 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 윈난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 북서부와 티베트에서 이주한 소수민족인 나시(Naxi)족을 비롯해 중국 내 소수민족 중 거의 절반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곳이다. 이들은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20여 년 전, 중국 정부는 여행객 유치를 위해 윈난성의 작은 마을 중뎬(Zhongdian)의 이름을 샹그릴라(Shangri-La)로 바꿨다. 이는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의 1933년 판타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등장하는 가상의 티베트 마을에서 따온 명칭이다. 최근에는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존중을 표방하는 고급 인프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럭스 호텔(Lux Hotels)은 남쪽의 북적이는 마을 리장(Lijiang)에서 벤질란(Benzilan)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 이야기를 새로운 여행 코스로 소개한다. 수많은 윈난 방언이 뒤섞여 울려 퍼지는 리장의 아침 시장은 버섯과 차, 약초를 사라고 외치는 상인과 덜컹거리는 오토바이로 아수라장이었다. 우리는 새콤한 오디와 짭짤한 매실장아찌를 산 뒤 북쪽으로 향했다. 도시와 점차 멀어지자 소나무 숲과 넓은 계곡이 나타났고, 험준한 언덕 너머로는 옥룡설산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의 끝은 바오산 석두성에 닿았다. 나시족 양식으로 지은 넓은 마당과 기와지붕의 집들이 양쯔강 상류 경사진 언덕을 따라 켜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귀에 짐을 묶어둔 채, 수 세기에 걸쳐 매끄럽게 다듬어진 계단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중국의 현대화 흐름에도 1300년 전 당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 없어 보였다. 무너져가는 안마당 사이로 아기 돼지들이 뛰어놀았고, 장작불 위 솥에서는 수수가 부글부글 끓었다.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건 2000년대 초반이라고. 한편에서는 목을 따갑게 하는 전통 증류주 바이주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세월과 고된 노동에 풍화된 얼굴을 한 마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연신 담배를 피우며 카드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럭스의 차마고도 석두성 지점 관리인이자 유쾌한 성격의 장시우윈(Xiuyun Zhang)은 차와 야생 사과 레모네이드를 내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객실이 6개뿐인 석두성 산장은 휴양지라기보다는 홈스테이 같은 느낌을 줬다. 장은 50대 중반을 훌쩍 넘겼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이 마을에서는 젊은 축에 속한다. 장시우윈은 호텔 관리를 하지 않을 때 계곡을 가로질러 40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식물학자로 일한다. 그는 전통 종자와 품종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멕시코와 이탈리아, 페루에서 열린 학회에 초청받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희귀 옥수수 품종만 해도 3가지나 된다. “돈을 좇아 도시로 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요. 어디로 가든 중요한 건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요. 씨앗을 심고 잘 돌보면, 빈 곳에 있더라도 결국 자라게 되어 있어요.”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양쯔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드넓은 전나무 숲과 논밭을 지나 마침내 다주(Daju) 마을에 도착했다. 한 건물에서 나시족의 사제이자 현자를 일컫는 ‘동파’ 허궈웨이(Guowei He)를 만나 환대를 받았다. 정원에서 딴 비파를 과즙이 턱밑까지 흐르도록 맛있게 먹었다. 탁자 위에는 두루마리와 얇은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먹으로 쓴 동파 문자가 춤추듯 펼쳐져 있었다. 동파 문자는 한자보다 앞선 나시족의 고대 문자로, 현재까지 사용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상형문자 체계 중 하나다. 허궈웨이는 이 문자를 익히는 데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지방 정부에서 이 문자의 보존을 장려하고 있지만, 그 유산은 결국 허궈웨이 같은 노련한 장인의 손에 달렸다. 가르치는 제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많죠. 그런데 거의 안 옵니다.”

리장에서 113km(약 70마일) 떨어진 석두성 마을.
럭스 차마고도 다주 빌리지의 지역 채소볶음.
리장 시장에서 판매하는 귤.
다주 마을의 동파 사제.
동죽림사 외부 모습.

샹그릴라로 향하는 길 중반에 다다르자 마을의 풍경이 갑작스레 변했다. 마을 곳곳에 널려 있던 나시족 가옥 대신, 흙벽과 화려한 창틀을 갖춘 티베트식 농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위에는 새하얀 불탑이 빛나고 있었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상점 간판에는 거미줄처럼 얽힌 티베트 문자가 적혀 있었다. 샹그릴라 인구의 80%는 티베트 민족이 차지하지만, 사원이 즐비한 구시가지 두커종(Dukezong)의 자갈길을 걷는 사람 중 상당수는 티베트 전통의상을 입은 한족 관광객이다. 오늘날 샹그릴라의 주된 상품은 차가 아니라 거리 곳곳의 의상 대여점이다. 이 마을은 털이 장식된 티베트 전통 예복인 추바와 보석으로 꾸민 모자를 대여하는 일로 분주하다. 흰 회벽과 지붕이 층층이 쌓인 송찬림사에서 주지 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며 사원 입구에 있는 국영 매표소와 윈난 최대 규모의 티베트 사원에 코스프레하듯 사진을 찍으러 몰려드는 관광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샹그릴라 직전에 들어서는 마을인 벤질란이 더 마음에 들었다. 중국의 민족주의 부흥 캠페인 ‘중국몽’을 찬양하는 굵직한 한자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변방의 기운을 풍겼기 때문. 우리가 니딩의 라오를 만난 것도 여기였다.

어느 아침, 벤질란의 산속에서 헝클어진 머리에 커다란 티베트 천주 반지를 낀 현지 가이드 타시(Tashi)가 향냄새 가득한 동죽림사로 안내했다. 마치 절벽 위에 파수꾼처럼 서 있는 이 사원은 송찬림사와 달리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았다. 금빛과 비단이 흐르는 공간, 탕카 벽화 속 수백 신들이 내려다보는 이곳에는 우리와 화려한 운동화를 신은 자주색 승복의 승려, 그리고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외우는 티베트 순려자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우유 봉지와 라벨 없는 바이주를 사서, 행운을 빌며 기도 깃발 1000개 사이에 놓인 대리석 불상 머리 위에 부었다.

우리의 여정은 시작점인 리장에서 막을 내렸다. 나는 마침내 원반 모양의 병차와 섬세한 마호가니 조각으로 가득한 목조 찻집에서 구롱구이(Rongui Gu)를 만났다. 29대째 이어진 차 상인 가문의 마지막 상인인 그는 히말라야산맥을 무려 7번이나 넘었다.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에 그려진 지도를 보며 리장에서 라싸를 지나 남쪽의 콜카타까지 이어지는 본인의 경로를 설명해줬다. 그는 종종 호랑이나 산적을 물리쳐야 했고, 그의 손에는 험한 산등성이를 오르며 약초를 캔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요즘 그의 차 무역은 예전만큼 고되지는 않지만, 그는 가게 위층의 작은 박물관을 통해 차마고도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주변의 카페들을 가리키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와 전통의상을 입고 거리를 거니는 관광객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상인의 끈기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책임은 옛 상인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경로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잇지 않는다면, 진짜 역사는 사라질 겁니다.”

    CHRIS SCHALKX
    포토그래퍼
    CHRIS SCHALK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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