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을 위한 변명

다 큰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산다. 무슨 사정일까? 어느덧 새로운 가족 형태가 된 ‘캥거루 가족’을 위한 변명.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을 ‘캥거루족’이라고 한다. 마치 호주에서 시작되었을 것 같은 이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용어임을 아는지? 다른 시사 경제 용어로는 ‘자라 증후군’ ‘패러사이트 싱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캥거루는 귀엽기라도 하지, 기생충이라니!

나 역시 캥거루의 일원. 동생 둘이 결혼으로 떠난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서른 살부터는 다달이 얼마간 생활비도 내고 있다. 다섯 식구가 살던 집에서 셋이 사는 것. 복층 아파트의 2층을 홀로 차지한 터라 익숙함을 넘어 쾌적하기까지 하지만, 30대 후반이 지나면서부터는 어디서 말하기가 면구스럽다. 예컨대, 살면서 단 한 번도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를 할 수 없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런데 엄마도 있어요. 아빠도…”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우리 집으로 와! 맛있는 거 해줄게”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나만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다. 학업, 결혼 등으로 일찌감치 지방에서 상경해 자연스럽게 독립한 이들은 계속 독립 가구를 이루는 반면, 어릴 적부터 서울과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결혼이나 장거리 취업 등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같이 거주하는 형태가 이어지는 것. 통계 역시 이를 방증한다. 2022년 OECD 자료에 따르면, 부모와 사는 한국의 20대 비율은 81%로 OECD 36국 중 1위다. OECD 평균 50%에 비하면 1.6배에 달하는 수치다. 뒤를 잇는 건 이탈리아인데, 30~40대 자녀가 부모 신세를 지는 ‘다 큰 아기’가 너무 많아 ‘밤보초니(Bamboccioni) 현상’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영국에서는 부모의 연금을 축낸다며 눈을 흘긴다. 성년이 되면 일찌감치 독립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은 어떤가? 2025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18~34세의 미국 성인 3명 중 1명이 부모 집에서 거주 중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더 많은 청년이 부모와 살게 됐다. 이렇듯 캥거루족이 전 세계 사회 현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독립할 ‘돈’이 없어서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금융 안전성도 흔들리면서 Z세대의 독립은 더 어려워졌다. 2024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Z세대 성인 중 절반 이상이 높은 물가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수입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 성인 500만 명이 여전히 부모와 살고 있고, 이 중 130만 명은 수입이 있음에도 치솟는 집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부모와 함께 산다. 유럽 도시 대부분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와 집세로 인해 혹여 

독립하더라도 두세 명이 함께 공동 생활을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가족과 사는 게 낫다는 거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MZ세대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좋은 일자리, 문화적 인프라 등은 서울 및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작은 원룸을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월세는 물론이고, 대출을 받아 전세를 얻어도 높은 이자를 감당해야 한다. 무리해서 독립해봤자 돈은 돈대로 들고, 삶의 질은 추락하는 상황. 그러니 출퇴근이 가능한 경우라면 부모 집에 거주하기를 택한다.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비혼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캥거루족이 증가하는 이유다. ‘패러사이트 싱글’은 소득이 없이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독신을 의미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거 생활을 함께하는 ‘캥거루 가족’도 적지 않다. 그런 나도 5년 전, 독립을 결심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어디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둔 후에 내년에는 집을 나가겠노라고 결심을 전했다. 그런데도 “이제 아빠랑 살기 싫으냐?”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아빠의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 감정에 호소하는 아빠와 달리 엄마는 경제적 이유를 들었다. “독립할 돈 있으면 저축을 더 해라.” 이왕 나갈 관리비, 이왕 나갈 전기세와 수도세라면 같이 사는 게 더 이득이라는 거다.

자식과 사는 부모의 심경도 복잡하다. “다 컸는데 안 나가요”라면서 겉으로는 투덜대지만, 내심 자식과 사는 삶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사 캥거루’가 되었다. 집수리 하기, 새로운 에어컨 구입하기, 무거운 물건 주문하기, 폰에 앱 깔기, 공항버스 같은 각종 예약 등 어느덧 노년의 삶에 접어든 부모의 일을 대신한다. 새로운 정보와 복잡한 일을 피하고 싶은 부모 역시 자식에게 점점 더 의존한다. 몸이 약해지면서 병원 가는 일이 잦아지고, 그럴 때 가장 먼저 상의할 수 있는 것도 함께 사는 자식.

“확률적으로 세 자식 중 하나는 결혼 안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게 너일까? 지금이라도 결혼해서 나가라” 했던 부모님이 거꾸로, 이제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영원히 오순도순 같이 살자고 할 때는 웃음이 난다. 그렇다고 독립할 생각을 아예 저버린 건 아니다. 다만 안온하게 흘러가는 캥거루 하우스에서, 이제는 내가 없으면 노년의 부모님은 어떡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가더라도 근처에 살아야만 할 거 같다. 주머니 속에 아기를 넣어 양육하던 캥거루 부부가 시간이 흐르면서 늙어갈 때,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건 이제 다 큰 어른이 된 캥거루이기에. 

    일러스트레이터
    신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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