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발전하려는 배우 김지훈의 행보는 생존을 향한 원시적 힘에서 기인한다.

슬리브리스 톱은 레이블리스(Labeless). 실버 펜던트 네크리스는 쿼르코어. 레드 펜던트 네크리스는 불레또(Bulletto).

셔츠는 마틴 로즈 바이 아데쿠베 (Martin Rose by Adekuver). 팬츠는 꾸레쥬(Courreges). 벨트는 마틴 페이지(Martin Faizey). 실버 펜던트 네크리스는 쿼르코어(Quarqor). 골드 펜던트 네크리스는 톰우드(Tom Wood). 슈즈와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셔츠는 잉크(Eenk).

얼마 전 일본에 다녀왔죠?
<이재, 곧 죽습니다> 홍보 일정이 모두 끝나서 여행을 다녀왔어요. 어쩌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원피스> 속 조로를 연기한 배우 아라타 마켄유가 주최하는 행사에 초대받은 재미있는 이벤트도 있었어요.

<이재, 곧 죽습니다>가 아마존 프라임 TV쇼 글로벌 종합 순위 톱 2, 티빙 오리지널 누적 시청UV(순 방문자 수) 1위를 기록했으니 홀가분한 휴가였겠어요. 예상한 결과였나요?
캐릭터를 떠나 작품 자체가 주는 임팩트가 강렬했어요. 주인공 최이재가 자살 후 12번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과정이 지루할 틈 없이 숨 가쁘게 진행돼요. 각 인물의 서사도 재미있고요. 허무맹랑한 액션을 시청자의 높아진 수준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지만, 이야기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름의 자신감을 갖고 시작했어요. 물론 핵심은 마지막 환생 에피소드예요.

이재가 마지막 환생하는 삶이 자신의 어머니였죠.
맞아요. 정신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이제 내리려고 하는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 제게는 그 정도의 반전으로 다가왔어요. 배우이기 이전에 대본을 처음 본 시청자로서 된통 당했어요.

어느 정도였어요?
말도 마세요. 혼자 대본을 읽을 때, 같이 리딩할 때 매번 그 장면에서 오열했어요. 제가 맡은 박태우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이코패스인데, 엉엉 울고 있었어요.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있나요?
어느 순간 부모님의 인생에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게 되더라고요. 어릴 때는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로서 역할이 뚜렷했는데 함께 늙어가면서 그들의 인생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시절의 어머니들은 많은 희생을 하셨잖아요.

그럴 때는 위로와 응원 중 어느 쪽을 택해요?
자꾸 잔소리만 하게 돼요. 20대 초반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평생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온 삶이거든요. 엄마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이후로는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누구의 엄마, 아내로만 살아온 삶이 안타까워요. 자기 자신은 없이 평생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게.

그런 마음을 품고 지독한 빌런을 연기해야 했죠. 어떻게 연구했어요?
극 중 태우는 악행을 끊임없이 저질러요. 글로 볼 때는 흥미진진한데 연기자 입장에서는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더라고요.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야 내가 설득되고, 그 설득된 내용을 바탕으로 연기해야 하거든요. 제아무리 드라마틱한 인물이라도 어느 정도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대중에게 감정, 임팩트를 전할 수 있거든요.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그 이유를 찾는 데 오래 걸렸어요. 단서가 너무 없었거든요. 대본에는 박태우의 서사에 대한 잔향만 남아 있었어요.

그 향의 뿌리를 찾는 건 배우의 몫이었겠네요?
사냥개가 냄새로 범인을 찾듯 쫓았죠. 그 여정이 무척 힘들었어요. 경력이 쌓이며 눈이 높아지고 확장되니까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게 많아져요.

박태우는 그중에서도 유독 힘든 인물이었나 봐요?
손에 꼽을 만큼 힘들었어요. 향을 좇아서 뿌리를 만들기는 했는데, 이것저것 다양하게 준비해야 했죠. 감독님이 대본, 연출, 편집을 전부 다 맡으셨는데 많은 얘기를 하면서 다양한 버전을 찍었죠. 지금보다 더 섬뜩한 인물로 준비하긴 했어요.

<악의 꽃>의 백희성, <발레리나>의 최프로부터 박태우까지,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세상에 같은 빌런은 없다’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 보여요. 빌런 역을 할 때 특별한 쾌감이 있어요?
자꾸 악역을 해서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런 걱정이 0%예요. 지금 이 방향은 오랜 시간 염원했고 애써 만든 결과예요. 데뷔 이후 10년간 활동하며 커리어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고착된 이미지가 힘들었어요.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 해오던 것을 툭 멈추고 기다렸어요.

그 기다림 속에서도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잖아요.
뭐라도 해야 했죠. 하고 싶은 작품이라면 역할의 경중을 가리지 않았어요. 여러 시도를 하던 중 드라마 <바벨>을 만났죠. 처음 악역 제의가 들어온 작품이었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이후 <악의 꽃>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것 같아요. 굳이 악역을 고집한 적은 없어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기회가 없었는데 유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잡았을 뿐이죠. 그때는 ‘일단 주어지면 내 영혼을 갈아 넣겠다’는 심정이었어요.

 

가죽 코트는 르수기 아뜰리에(Le Sugi Atelier).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팬츠는 뉴인(Neu_In). 벨트는 누마레(Nouvmaree).

재킷과 팬츠는 준지(Juun.J). 벨트는 타이거오브스웨덴(Tiger of Sweden). 슈즈는 아워레가시(Our Legacy). 링은 불레또.

셔츠는 마틴 로즈 바이 아데쿠베. 팬츠는 꾸레쥬. 벨트는 마틴 페이지. 골드 네크리스는 톰우드(Tom Wood). 사각형 펜던트 네크리스는 쿼르코어. 워치는 빈티지 파텍 필립 바이 빈티크(Vintage Patek Phillippe by Beantique). 슈즈와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왜 그토록 간절했어요?
한창 드라마를 찍고 있어도 친구들을 만나면 “요즘 왜 활동 안 해?”라는 말을 듣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환경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전 세대가 재미있게 보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달렸는데 다른 궤도를 걷고 있었던 거죠.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필연적으로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직업이거든요. 관객 없는 배우는 사기꾼에 불과해요. 사람들의 인정과 피드백이 없는 길에서는 언젠가 소멸할 거라고 판단했어요. <왔다! 장보리> 이후 10년간 그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살았어요.

판단과 전략, 실행까지 완벽했고, 오랜 시간 해온 비결이 있었네요.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어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어요. 외모만 믿고 까불었죠. 솔직히 진짜 그랬어요.(웃음) 현장에서 선배님들의 연기와 태도를 보면서 ‘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갈증을 느끼면서 더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점점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어졌거든요.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욕망이 있어요?
이제는 행복하게 일하는 쪽으로 방향이 기울었어요. 뭘 이루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기대가 좌절되는 경험을 수없이 겪으면서 캐릭터를 만들며 연기하는 과정, 현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림이 더 행복해요.

‘남자 배우는 40대부터’라는 말이 있잖아요. 더 높은 곳을 꿈꿔보고 싶지는 않아요?
20대부터 잘되면 더 좋았잖아요.(웃음) 당연히 20대부터 잘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행복은 느낄 수 없었겠죠. 그렇다고 ‘남자 배우는 40대부터지, 나도 지금부터!’ 이런 유의 말로는 위로가 안 돼요. 자기 객관화가 철저한 편이에요.

요즘 빠져 있는 건 뭔가요?
유튜브에 김주환 교수님 강연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배우로서 연기를 하기 전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이 인물이 왜 이럴까?’를 늘 고민했어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이론인데, 뇌를 스캔할 수 있게 되면서 ‘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죠.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면 나를 이해하게 돼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철봉 운동인 프런트 레버를 꽤 오래했죠?
운동만큼 정직한 보상이 따라오는 게 없어요. 몸은 땀 흘리고 움직이는 만큼, 근육통을 겪은 만큼 돌려주거든요. 덩달아 자존감도 올라요.

<나 혼자 산다>에서처럼 여전히 ‘갓생’을 사나요?
그건 휴식기에 온 기운을 모아 의지를 불태울 때 모습이에요. 여전히 뭔가를 배우지만 매일 그렇게 하지는 못해요.

운동, 언어, 노래 등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는 이유는 뭐예요?
원체 게을러요. 자꾸 나태해지려고 하는데 순응하면 후회하고 반성하게 되잖아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의미 있게 쓰려고 노력하죠. 평생이 그 싸움의 연속인 것 같아요. 최소한의 것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배움으로 발현한 셈이죠.

배움의 이유에 대해 양적인 축적이 있으면 어느 단계에 이르러 질적인 도약과 변화가 생긴다는 ‘양질 전환의 법칙’을 언급한 적도 있죠. 요즘은 뭘 또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새로운 건 없고, 노래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올해 안에 어느 정도의 ‘득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만족할 수준이 되면 노래방 가서 친구들에게 들려줄 거예요.  밑바닥 실력을 아는 녀석들이라 인정받고 싶을 뿐이에요. 더디게 조금씩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거죠. “너 진짜 해냈구나!” 이 말을 듣고 싶어요.

양희은 노래 ‘상록수’가 떠올라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계속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 돌아보면 ‘지금이 더 낫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요. 배우라는 직업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며칠 전 최민식 선배님의 인터뷰를 봤는데, ‘이 직업은 죽어야 끝난다’는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성장할수록 보는 눈이 점점 높아지는데, 그걸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발전해야 하니까요. 한번 넓어지면 좁혀지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다음 발전은 어디로 향하나요?
오디션을 본 작품이 있어요. 하게 된다면 또 큰 도전이 될 작품이에요. 또 한 번 부딪치고 깨져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