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난 ‘로고’보다 퀄리티 높은 소재와 섬세한 테일러링, 입는 이의 태도로 승부하는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 

꼬꼬마 에디터 시절, 부티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각종 화려한 컬렉션 쇼피스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어 매일 황홀감에 젖어 살았다. 많은 옷 사이에서도 나의 손에 새로운 감각을 안긴 브랜드가 바로 로로피아나. 아직도 기억나는 베이비 캐시미어 룩은 스웨터와 카디건, 코트 그리고 와이드 팬츠가 한 착을 이루고 있었다. 여러 피스로 레이어링한 옷을 한 옷걸이에 걸어 옮겨도 무척 가뿐했고, 특히 살결에 닿을 때의 부드러운 감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별다른 디테일도 없는데 길게 늘어진 드레시한 실루엣은 어찌 그리 찰랑거리고 멋스러운지.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베이비 캐시미어는 날씨가 따뜻해져 더 이상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해주는 속털이 필요 없는 늦은 봄, 자연의 주기에 따라 3~12개월의 히르커스 새끼 염소로부터 채취하는데, 털을 인위적으로 깎는 것이 아닌 무해한 빗질을 통해서만 얻는다. 그리하여 얻은 결과물은 새끼 염소 한 마리당 단 30g. 보통 염소 한 마리가 100g의 캐시미어를 만드는 데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다. 지름도 13.5마이크론(1m의 10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아 굉장히 섬세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다루는 법도 까다롭다. 로로피아나는 목동을 설득하고 아기 염소의 섬유를 직조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기 위해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여기에 솜씨 좋은 장인의 노력을 보태어 비로소 비교 불가 수준의 가볍고 부드러운 베이비 캐시미어 옷이 탄생했다. 이 같은 복잡한 과정이 마법 같은 감촉의 비결이다.

슈퍼 인플루언서 사이에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가 심심찮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바비 스타일이나 발레코어 콘셉트가 SNS 피드를 유니크한 컬러웨어로 물들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한 럭셔리 피드는 로로피아나 베이비 캐시미어 룩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뉴트럴 색조의 우아한 코어 아이템으로 채워진다. 이 트렌드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면 라이오넬 리치의 딸이자 니콜 리치의 동생인 소피아 리치를 찾아보길. 1998년생으로 올해 25세인 그는 또래가 즐기는 블링블링한 스타일 대신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룩으로 Z세대까지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에 빠지게 만들었다. 승마, 요트, 테니스 클럽 등의 럭셔리 라이프에 어울릴 법한 소피아 리치의 스타일은 일명 ‘올드 머니(Old Money)’ 룩이라고도 하는데, 과거 유럽 부호 가문의 자제가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단정하고 잘 재단된 옷으로 표현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 켄달과 카일리 제너 역시 이전과는 확 달라진 심플하고 우아한 무드의 옷차림으로 자주 목격되는 중. 이를 두고 SNS 댓글러는 ‘소피아 리치의 스타일을 베꼈다’고 가십을 만들기도 했다.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는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을 쏟아 압도적 퀄리티를 자랑하기 때문에 굳이 로고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라는 보테가 베네타 메종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튀는 컬러나 장식, 로고나 브랜드 상징이 크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세련되고 개성 있는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감각과 여유로움이 필요하다. 더 로우, 질 샌더, 막스마라, 브루넬로 쿠치넬리, 로로피아나, 르메르, 발렉스트라, 알라이아 등이 그렇다. 정제된 스타일이라는 한정된 범주 안에서 치열하게 공들인 디테일과 소재의 질감으로 승부하는 브랜드다. 무엇보다 기본에 투자해야 하며 테일러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함께 매치하는 액세서리는 우아하면서도 튀지 않고 옷과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 즉, 브랜드 로고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브랜드가 그동안 쌓아온 헤리티지와 장인이 빚어낸 높은 품질을 한껏 누리며, 진정으로 옷에 스며든 고귀함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조용한 럭셔리’는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패션 소비에 관심이 높아진 지금 질 높게 잘 만든 옷 한 벌이 필요한 때다. 조용한 럭셔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유행을 벗어나 의미 있는 옷차림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을 것. 피비 파일로가 LVMH의 서포트를 받으며 자신의 레이블을 곧 론칭한다는 소식을 공표했다. 셀린느와 끌로에를 이끌었던 레전더리 디자이너로 모더니스트와 미니멀리스트 감성을 혼합해 자신만의 패션 장르를 창조한 그. 아직 새로운 레이블에 대한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았으나 오는 9월 피비 파일로가 돌아왔을 때 조용한 럭셔리도 또 한 번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지 않을까? “어떻게 입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정직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좀 더 심플하고 현실적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던 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