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계획 없는 ‘P’의 여행이 그저 허랑방탕해 보이나? 그러나 ‘P’는 자신 있게 말한다. 지금 누구보다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MBTI의 망령이 온 세대를 덮치면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는 게 이해를 넘어 오락이 됐다. 냉혈한이 된 T와 드라마 퀸이 된 F의 평행선, 사람들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E와 어떻게든 혼자 있고 싶은 I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대립은 P와 J. 흔히 계획형으로 알려진 J와 인식형으로 알려진 P가 가장 극렬하게 전쟁을 벌이는 분야는 다름 아닌 여행이다.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날짜별, 시간대별로 여행 계획을 짜고 있나? 만약 한 달 후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까지 예약되어 있나? 이 모든 것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J일 것이며, 이 모든 것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당신은 P일 가능성이 높다. J가 보기에 P는 여행을 가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지만 P는 태평하다. P의 계획은 오직 한 가지면 된다. ‘여행을 떠남. 아무튼 떠날 예정’. 

“선배 J 아니었어요?” 후배들이 종종 묻고는 한다. 긴 마감 생활을 통해 J처럼 행동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학습과 훈련의 결과일 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생활에서는 여전히 극단적 P다. 얼마 전에는 3년을 미루고 미룬 3주간의 장기 여행을 떠났다. 휴가를 잡으면 큰 프로젝트가 생기는 징크스 탓에 마지막까지도 떠날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이번엔 정말 휴가였다. “그래서 어디 가니?” 편집장이 물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내 여행의 목적지는 ‘대한항공 프레스티지 마일리지 좌석이 풀리는 곳’이었기 때문. 파리와 런던, 바르셀로나까지 유럽 주요 항공편에 죄다 대기를 걸어둔 상태였다. 정말 나는 어디든 다 좋았다. 파리로 들어가도 런던을 갈 수도 있었고, 그리운 코펜하겐에 가도 좋았고, 안 가본 몰타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일리지 신의 선택은? 파리였다. 내가 파리에 가는구나! 한 줄짜리 계획을 짰다. ‘미술관을 실컷 다니면서 진짜 프렌치 요리를 자주 먹는다. 질릴 때쯤 스페인으로 간다.’ 겨우 파리 가는 편도 항공편만 손에 쥐고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아뿔싸! 그때가 마침 부활절 휴가 기간일 줄이야. 모든 호텔 방이 동났거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쌌다. 차와 시계를 팔아서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급기야 위치가 좋은 파리 8구에 있다는 ‘한인 서블렛(단기 임대)’을 얻기에 이르렀다. 긴 비행과 막히는 택시에 시달린 후 마침내 서블렛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던 것은 뭐였을까. 이불도 수건도 없고(가져오라는 말을 깜박했단다), 샤워기는 막혀 있었으며(식초를 사다가 뚫으라고 했다), 전임 대통령 굿즈로 장식된, 위치만은 환상적으로 좋았던 그 방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행이 이렇게 망해버리나? P의 여행은 피를 보는 여행이었나? 

숙소에 들어가면 우울해지긴 했지만, 사실 밖에서는 매 순간을 신나게 보냈다. 숙소에서 나와 문을 연 곳에서 라테를 한잔 마시고,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오르세 미술관에 긴 줄이 늘어서 있으면 로댕 미술관에 가는 식. 팔레 드 도쿄 전시를 보러 갔다가 그곳의 카페가 볕이 좋길래 자리를 잡고 책 한 권을 읽었다. 출출해지면 적당히 좋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끼니를 해결했는데, 최고로 맛있는 굴과 가자미 요리를 맛보았다. 파리에서의 일주일 동안 예약한 거라고는 지베르니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다녀오는 하루 투어와 테이블 수가 적어 예약하기 너무 어렵다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뿐(투어는 이틀 전에 카톡으로 예약했고, 레스토랑은 닷새 동안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한 시간에 방문했다). 매일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흥미로운 곳을 발견했다.

마레 지구에서는 작은 안내판을 보고 무작정 벨을 눌렀더니, 안쪽에 아주 멋진 사진 갤러리가 숨어 있었다. 파리에서 사는 친구조차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감탄했는데, 1시간 정도 갤러리스트와 수다를 떤 뒤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파리에서 샴페인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 부부를 만났을 때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페루비안 레스토랑에 갔더니 부엌 안쪽에 스피크이지 바가 숨어 있었고, 또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럭셔리 테이블웨어 브랜드에서 주최하는 칵테일 파티에 갑자기 초대받아 맛있는 하몽과 치즈, 와인을 실컷 맛보기도 했다. 이렇듯 여행은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 또 다른 즉흥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진행되곤 했다. 지난해 오랜만에 교토를 방문했을 때는 숙소 근처 바에 들어갔다. 토마토 사와 한잔을 마시면서 인사를 하게 된 사람들은 제각기 교토에서 카페, 와인 바, 이자카야를 운영하고 있어 다음 날에는 그들의 가게를 순회하며 즐겼다. 모두 아직 국내에는 정보가 없는 곳이었다. 

파리에서 마드리드, 그라나다, 포르투, 바르셀로나에 가기로 큰 그림을 정했지만, 어디에 얼마나 머물지를 결정하진 않았다. 좋으면 더 있고, 별로면 떠나면 됐다. 그 대가로 번번히 상대적으로 비싼 항공료와 기차표,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지만, 다행히 그 이후에는 파리 숙소 같은 대참사는 없었다.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한 마드리드에서 닷새나 지냈는데, 마드리드에 보석 같은 갤러리와 서점이 많은 건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곳들을 산책하면서 찾아냈다. 물가가 저렴한 포르투는 천국 같았고, 바르셀로나는 눈이 부셨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뻔뻔하게 먹고 마시는 사이 어느덧 서울에서 사람들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기 시작했는데, 사실 나도 몰랐다. ‘대한항공 마일리지 좌석이 풀리는 날’이라고 했더니, 다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J의 여행이라면 모든 게 달랐을 테다. 무엇보다 계획적이고, 그곳에서 보거나 해야 할 모든 것을 누리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여행의 전체 비용도 예산 안에서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은 조사에 기반한다. 여기서 먹고, 거기서 보고, 저기서 자기로 한 모든 정보는 누군가가 경험한 정보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계획을 짰다고 하더라도 여행에서 변수는 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좋았던 곳이 나한테 반드시 맞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맛집은 실망감을 주고 그걸 시키지 말 걸 하는 후회도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나 파업과 같은 사건, 때로는 나의 컨디션도 변수가 된다. 나는 계획이 없었기에 변수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때그때 내 마음속 소리를 들으며 결정을 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 먹고, 쉬고 싶을 때 쉬었고, 보고 싶은 걸 봤다. 여행이란 다름 아닌 내가 하는 것이니까. 결국 ‘P’의 여행이란, 100% 내 마음을 따르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