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를 맞으며 강원도 선자령을 올랐다. 배낭은 채우고, 생각은 비우며 걷고 또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 오랜 버킷 리스트 여행지 중 하나다. 자기 몸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한 달 여간 700~1000km를 걷고 또 걷는다. 이건 여행일까, 수행일까? 그 모호한 지점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 몸 하나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걷고 또 걷는다는 점에서 백패킹은 순례길의 여정과 닮았다. 숙박에 필요한 모든 짐은 어깨에 멘 배낭 안에 있고, 산이든 바다든 두 발로 갈 수 있는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언젠가 떠나고야 말 순례길의 워밍업으로 삼기에는 충분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화장실은 구비되어 있는지, 끼니는 어떻게 때워야 하는지, 이 모든 것에 앞서 과연 15kg짜리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를 수는 있는지…. 아는 것 하나 없이 강원도행 버스표부터 끊었다. 풍차 수십 대와 초록빛 언덕이 펼쳐진 곳. 제주 우도의 비양도, 인천 굴업도와 함께 백패킹 3대 성지로 불리는 평창의 선자령에서 오랜 버킷 리스트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뎌볼 참이다. 

백패킹의 시작은 장비로부터 

준비물은 등산과 캠핑에 필요한 물건을 각각 떠올리면 쉽다. 텐트와 의자 같은 기본 캠핑 장비도, 어엿한 등산용품도 없었기에 대여하기로 했다. “백패킹의 장비는 무겁지 않아야 해요. 작고 가벼운 알파인 텐트를 주로 쓰는 이유죠. 매트리스로는 폼매트가 딱이에요. 부피는 크지만 가벼워서 배낭 위에 얹어 가면 되거든요. 가격도 저렴하고요.” 백패킹 장비 전문 ‘슬로우 아웃도어 팩토리’ 이재승 대표의 말이다.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는 그대로 회수해 오는 것이 백패킹의 기본. 그에 따르면 1박 기준으로 20L 쓰레기봉투면 충분하다. 선자령 백패킹에서 주의할 사항 몇 가지도 일러주었다. “선자령은 바람이 정말 세요. 두툼한 아우터는 필수죠. 얇은 옷을 겹쳐 입는 것도 잊지 마세요.” 산행 당일, 전국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짐을 하나라도 덜어야 하는 백패킹에서는 우산보다 우의가 답이다. 백팩을 덮을 수 있는 크기의 튼튼하고 큼지막한 판초 우의를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걸으며 하는 명상 

초반 30분 정도는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이 속도로 간다면 오늘 중에 도착은 할까?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할까? 끊임없이 저울질하던 머릿속이 차분해지기 시작한 건 1시간을 넘겼을 무렵부터다. 생존 본능이 발동했는지 어느새 걷는 행위가 생각을 밀어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멈춰 쉬는 횟수는 줄어들고 발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배낭의 무게를 이겨내고자 몸을 앞으로 더 기울이며 걷다 보니 시선은 자연스레 발아래 놓인 것들로 향한다. 흙과 돌, 풀, 나뭇가지…. 이따금 개구리와 다람쥐도 보였다. 잠시 쉴 때는 고개를 들어 키 큰 식물과 곧게 뻗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을 머금고 짙은 풀 냄새를 내뿜는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숨을 고른다. 한계를 시험하듯 몸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세우니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다. 분명 명상에 가까웠다. 생각을 비우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 서울에서는 좀처럼 되지 않던 일이다. 

예상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텐트를 칠 수 있는 박지에 도착했다. 사진으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붉게 타는 노을 대신 지척의 풍차도 희미한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운무가 짙게 깔려 있었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만 볼 수 있는 귀한 풍경이다. 깜깜해지기 전, 서둘러 텐트를 친 뒤 휴게소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단출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다음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가물가물하다. 아늑한 텐트 안에 눕자마자 잠들었으니까. 요가 수련에서 힘든 아사나를 끝낸 후 송장 자세(사바사나)를 취했을 때의 기분 좋은 노곤함과 비슷했달까. 오랜만에 빠진 깊은 잠이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텐트가 휘청일 정도로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은 어제보다 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푹신한 매트리스도 없었고, 몸은 이미 근육통에 지배당했으며,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에 젖은 눅눅한 신발을 그대로 신어야 했지만, 어느 때보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일출을 보려고 산에 올랐을 때 느낀 것과는 분명 달랐다. 자연 안에서 칠흑 같은 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에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LEAVE NO TRACE 

일출 예상 시간이 가까워왔지만 뜨는 해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안고 서둘러 텐트를 정리했다. 등산객의 발걸음이 뜸해지는 해 질 무렵에 짐을 풀고, 다음 날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철수하는 것. 백패커 사이의 암묵적 룰이다. 등산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머문 흔적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짐 정리를 거의 마친 듯한 또 다른 일행은 바람과 사투를 벌이는 우리에게 선뜻 도움을 건넸다. 허둥거리는 모습에서 초보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저희 부부는 이맘때랑 겨울에 꼭 한 번씩 선자령에 와요. 선자령의 사계절 중 비 오는 날의 풍경을 가장 좋아하고요. 지금처럼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안 보이지만 그게 묘미거든요. 시야에 걸리는 게 없으니 가만히 멍 때리면서 생각을 비우는 게 가능해지죠. 구름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끝으로 올겨울에는 눈 덮인 선자령을 보러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텐트가 있던 주변을 다시 한번 깨끗이 정리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더 무거워진 듯한 배낭에 쓰레기봉투까지 생겼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지는 해도 뜨는 해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겨울을 기약하며 달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