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 새것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로컬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이, 바르셀로나는 잃었던 생기를 되찾고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현대식 카탈루냐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델리리(Deliri).

바르셀로나 로컬 레스토랑 베르베나(Berbena). 아시아와 남미 스타일을 곁들인 지중해 요리를 선보인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아르누보 양식의 포블레노우의 아파트. 카바나가 마련된 포블레노우 혹스턴(Hoxton) 호텔 루프톱의 수영장. 지중해식 음식을 모던하게 풀어내는 알키미아(Alkimia)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 조르디 빌라(Jordi Vila). 클래식한 로컬 푸드를 제공하는 겔리다(Gelida)의 안초비 올리브 요리.

바르셀로나(Barcelona). 발음부터 경쾌한 도시를 처음 찾은 건 1980년대였다. 그 당시 맡았던 생선 비린내와 허름하고 좁은 골목길은 지금도 생생하다. 거친 항구도시였던 바르셀로나는 1992년 올림픽을 개최하며 대대적 변신을 꾀했다. 해안가는 단정해졌고, 낙후된 다운타운 지역은 말끔히 정리되며 세계가 선망하는 도시로 탈바꿈했다. 복원한 가우디의 걸작이 빛을 발했고, 람블라 델 라발(Rambla del Raval) 지역에는 아름다운 주택가와 세련되게 변모한 부티크 호텔이 늘어섰다. 여기에 쭉 뻗은 가로수길과 옛 엘 불리(El Bulli) 레스토랑의 계보를 잇는 창의적 푸드 신의 등장까지. 어느덧 도시는 즐길 거리로 가득 찼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다시 찾은 람블라 거리는 30년 전 그대로다. 팬데믹 따위는 겪은 적 없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는 행인의 걸음걸이에서 바르셀로나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느긋한 여유로움 속에서도 활기찬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역동성 말이다. 여행지에서 시선은 보통 한쪽으로 쏠린다. 멋진 건물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들거나, 도로 위 사물을 살피느라 아래를 보거나. 바르셀로나에서는 하늘과 땅 양쪽을 다 봐야 한다. 기이하고도 우아한 도로를 살피는 동시에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루프톱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이 도시만의 매력이다.

도시에 대한 아름다운 옛 기억이 재현되는 순간은 딱 거기까지였다. 시내 중심가에서 벗어나 올드타운의 어두운 골목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르셀로나가 나타났다. ‘내가 알던 그 도시가 맞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평소 같으면 각국의 언어로 시끌벅적할 대성당 주변 골목은 너무나 조용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기념품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영업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의외였다. 지난 수년간 바르셀로나는 ‘오버 투어리즘’의 가장 큰 피해자였고, 번화가의 주민은 물밀 듯이 들어닥치는 관광객 때문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으니까. 항구에는 거대한 크루즈 5척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전 세계의 관광객을 실어 날랐고, 이들의 숙박을 위해 중심가 다세대주택 상당수가 에어비앤비로 채워질 만큼 관광업은 호황을 이뤘다. 주민의 불만이 극으로 치달을 쯤, 코로나가 찾아왔다. 바이러스는 수많은 관광객을 집어삼켰고 관광업은 빠르게 무너졌다. 가장 극적인 피해의 중심에는 알베르트 아드리아(Albert Adria)의 레스토랑이 있었다. 에니그마(Enigma), 팍타(Pakta), 티케츠(Tickets)까지. 돈과 인기, 연줄이 있어도 예약조차 힘들던 곳마저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이보다 더 힘든 재난도 극복한 도시다.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인구의 60%가 사라지는 상상조차 어려운 위기도 겪었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팬데믹이 완전히 종식되기 전부터 도시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보가텔(Bogatell) 해변 뒤 포블레노우(Poblenou)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브라이언 갤러거(Brian Gallagher)는 2009년부터 바르셀로나에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여행사를 운영하며 디자인에 특화된 관점에서 도시를 소개하는데, 그중에는 포블레노우도 포함되었다.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해 순식간에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글로리에스 타워(Torre Glories)를 눈앞에 두고, 갤러거는 포블레노우 지역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지역은 첨단기술 스타트업 회사로 가득 찬 특별 상업지구가 될 거예요.”
갤러거는 유명한 카탈루냐 건축을 연이어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전에는 직물 공장이었지만 현재는 스페인의 부호 안토니 빌라 카사스(Antoni Vila Casas)가 수집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용도로 쓰이는 칸 프라미스(Can Framis)부터 과거 노동조합의 본부였다가 극장으로 바뀐 살라 베케트(Sala Beckett)까지. 바르셀로나 토박이도 모르는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오랜 전통의 엔칸츠(Encants) 벼룩시장으로 향했다. 건축가 페르민 바스케스(Fermin Vazquez)의 작품인데, 높이 24m의 번쩍이는 거울 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트렌디한 커피 바나 클래식한 오토바이 가게, 오래된 빵집처럼 궁금증을 자아내는 상점이 모여 있었다. “포블레노우가 갖고 있는 에너지는 대단해요. 전통 가게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젊고 핫한 상점이 서로 엮이고 확장하는 현상이 흥미롭죠.” 갤러거가 들뜬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다. 오래전부터 꿈틀대던 변화의 기운은 코로나를 맞닥뜨리며 결정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제 관광객은 옛 중심가 대신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지역 주민이나 갈 장소를 찾는다. 도시의 구심점이 지역민의 일상이 배어 있는 외곽으로 이동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인스타그램에 태그될 일이 없는 아빙구다 디아고날(Avinguda Diagonal) 바로 위의 그라시아(Gracia)나 산츠(Sants)역 너머로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에익삼플레(Eixample) 거리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트 안토니(Sant Antoni) 시장도 마찬가지. 재래시장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이 지역 주민에게는 어떤 곳인지 생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최근 호주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한 토미 탱(Tommy Tang)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르셀로나의 명소인 페더럴 카페(Federal Cafe)를 운영하는 그는 브런치 카페를 준비하는 데 한창이었다.

탱은 산트 안토니 시장을 거닐며 이 지역이 얼마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지 설명했다. 시장 안의 파를라멘트(Parlament)와 콤테 보렐(Comte Borrell) 사거리에는 가로수와 벤치 덕에 교통체증이 없어진 데다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장이 펼쳐졌다고. 이 공간이 진보 성향의 시장인 아다 콜라우(Ada Colau)가 이룬 성과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이런 변화야말로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말도 함께. 탱이 자신의 파트너 크릭 킹(Crick King)과 함께 카예 파를라멘트(Calle Parlament)에 첫 번째 건물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이 지역엔 카페라는 공간 자체가 없었다. 산트 안토니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시장 39곳 중 하나였을 뿐이고, 해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심지어 시장 내 상점 중 10%만이 운영되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한번 보세요!” 탱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길모퉁이에는 9년에 걸친 복원 끝에 빨간 벽돌로 지은 파빌리온이 멋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탱의 안내를 받으며 새 타일과 견고한 철제 장식으로 꾸민 시장에 들어섰다. 이곳의 손님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채소, 생선, 육류를 사기 위해 들르는 주민이다. “보세요. 영락없는 재래시장이죠. 미식가를 위한 고급스러운 식재료나 특별한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옆집에 사는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지역사회의 시장이에요”라며 탱이 덧붙인다. “물론 동네 유인책으로서의 역할도 확실히 하고 있죠.”

 

알키미아 레스토랑의 내부. 바르셀로나 귀족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앤티크 가구가 많다.

바르셀로나의 코워킹 스페이스 파브리카 레만(Fabrica Lehmann)의 안뜰. 목재 가구와 식물로 꾸며 작업에 몰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바르셀로나 산트 안토니 시장 근처의 식물 숍 마레아 베르데(Marea Verde).

알키미아 레스토랑의 식전 메뉴. 직접 양식한 해산물을 활용했다.

다시 파를라멘트 거리로 돌아온 우리는 짙은 녹색 차양에 ‘카사 데 멩하르스(Casa de Menjars)’, 즉 ‘밥 먹는 집’이라는 부제가 적힌 작은 레스토랑을 마주친다. 레스토랑 이름은 ‘버릇없다’는 의미의 ‘말레두카트(Maleducat).’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주요 미식 트렌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셰프 한두 명이 로컬 미식가만을 위한 요리를 선보이는데 특별히 꾸민 요소도 없고, 시장에서 늘 구할 수 있는 신선한 재료를 갖다 쓴다. 그 맛이 너무 궁금했던 나는 며칠 뒤 혼자 점심을 먹으러 이 식당을 다시 찾았다. 얇은 페이스트리 롤에 말린 토끼 고기와 초콜릿을 가미한 디핑 소스, 세련되고 현대적인 카탈루냐 스타일의 생선 스튜까지! 독창적인 메뉴와 맛에 크게 감동했다.

도시 전반에 걸친 변화의 움직임은 미식 신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카탈루냐 지역의 전통적 아침 식사로 유명한 아니믹(Animic)에 갔을 때 일이다. 레스토랑의 주인인 호나탄 비올(Jonathan Viol)이 새우 크로켓을 내어주며 건넨 한마디가 일주일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팬데믹 이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푸는 과제는 매일매일 새롭게 바꿔가는 것뿐입니다.” 바르셀로나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이런 절박함에서 시작한 결과물이다.

주중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도시는 금요일 밤이 되자 시끄럽게 살아났다. 특히 신식 아파트가 즐비한 에익삼플레 거리 북쪽 지역에서는 카탈루냐 지역 부르주아 집안 자제가 쇼핑을 즐기거나 바 테라스에 앉아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번 주말에 만난 루이스 카스테야르(Luis Castellar)는 에익삼플레 부촌 거리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여전히 가족과 함께 몬주이크(Montjuic)와 티비다보(Tibidabo), 저 먼 곳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까지 한눈에 담기는 고급 아파트 최고층에서 살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고 고요함만이 남은 토요일 아침. 그와 함께 카탈루냐 광장에서 출발해 바리 고딕(Barri Gotic) 지구를 지나 보른(Born)을 거쳐 그의 엄마가 좋아한다는 빵집까지 걸었다. 해마다 관광객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는 곳 중 하나인 레이알 광장의 분수대에서는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해도 올드타운에는 출입 자체를 꺼리는 지역이 많았다. 마약, 매춘이 횡행하는 우범지대였기 때문이다. 불과 30여 년 만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부티크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문화공간으로 빼곡해졌다.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과 이웃한 중세 시대 건물에는 모코 미술관(Moco Museum)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네덜란드 컬렉터인 리오넬(Lionel)과 킴 로치스(Kim Logchies) 부부가 평생 모은 훌륭한 현대미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10분 거리에는 팬데믹 동안 문을 연 럭셔리 호텔 중 하나인 킴튼 비비도라(Kimpton Vividora)가 자리를 잡았다.

좁은 뒷골목을 거닐며 지나친 작은 공방에는 한 소녀가 재봉틀 앞에 앉아 바삐 작업하고 있었다. 카스테야르는 “과거 장인정신과 질 좋은 수공예품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영광이 재현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보른 지구의 골목길을 헤집으며 살핀 각양각색의 디자이너 숍과 화방, 가죽, 보석 공방 덕에 눈은 쉴 새 없이 즐거웠다. 각각의 공간은 올드타운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태계를 가꿔가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쇼트 팬츠와 선글라스 차림에 한 손에는 맥주,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든 전형적인 주말 관광객이었다. 우리도 모래사장 한쪽에 자리 잡고 남은 오후를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서 노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일단 부모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해변에 쓰레기는 한가득인 데다, 바닷물은 얼마나 더러웠는지 상상도 못할 정도였거든요.” 아득한 과거를 더듬듯 말하는 카스테야르를 보며 나는 주저없이 겉옷을 벗고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얼마나 헤엄쳐왔을까. 돌아보니 바르셀로나의 건물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 더없이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해 질 무렵,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맥주 마실 곳을 찾았다. 주인은 오랜만에 바깥 테라스까지 손님이 앉은 날이라고 했다. 카스테야르는 라 반구아르디아(La Vanguardia) 맥주를 주문했다. 산타 마리아 델 마르(Santa Maria del Mar) 성당에서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단체 관광객을 만났다. 지난 2년간 추운 겨울을 보낸 이 도시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방인이다.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다. 빠르지는 않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는 바르셀로나에는 이미 새 변화가 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