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의심과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그림자를 들춰볼 타이밍이다.

아홉수 탓일까. 부쩍 삶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매번 같은 고민과 한계에 부딪치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어떤 일도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다. 더 자극적 콘텐츠나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강박적으로 좇으려는 건 어쩌면 일상의 환기를 가능케 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 더 이상 내 삶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버린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근본적 변화가 필요했다.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뻔했다. 유튜브 검색창에 ‘동기 부여’ ‘자극’ ‘무기력’ ‘번아웃’ 등의 키워드를 이리저리 조합하며 내게 맞는 처방전을 찾는 거다. 인간의 고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했던가. 얼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뻔한, 와닿지 않는 말뿐. ‘진정 무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가’ 좌절할 때쯤 똑똑한 알고리즘이 뜻밖의 대안을 들이밀었다. 깊은 내면 속 어둠을 의식 위로 끌어올려 정화하는 ‘그림자 작업(Shadow Work)’의 필요성에 대한 영상이었다. 저마다의 한계에 부딪치고 삶의 원칙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등 심리적 변화는 내면의 그림자를 돌보지 않아 생긴 문제라는 말이 마음에 콕 박혔다. 그제야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찾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내면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던 내가 보였다. 그림자를 제대로 아는 일이 지금 나의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림자는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이 제시한 개념이에요. ‘감추고 싶은 모든 것’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있는 뭔가를 탁 건드릴 때, 나도 모르게 작동하는 감정의 기제를 포함하는 개념이죠.” 알쏭달쏭한 그림자의 정체에 대해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반유화 원장이 내린 정의다.그는 “그림자의 명확한 범위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부끄러움, 죄책감, 분노, 슬픔 등 현재 인지가 가능한 감정도 있겠지만, 전 생애에 걸쳐 축적한 경험에서 비롯해 무의식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다. 그렇다면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의 그림자에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이나 행동이 있다면 그것이 그림자와 직결된 지점일 가능성이 높아요. 늘 같은 주기와 패턴의 연애를 해왔거나, 직장을 옮겨 다녀도 번번이 비슷한 고민과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상황을 겪는다면 그 이유를 빨리 알아내야만 상황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반복되는 문제 상황을 마주할 때 흔히 ‘타고난 성격이나 팔자겠거니’ 하고 넘길 때가 많아요. 그럼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팔자라는 말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 인한 상황이라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잠깐의 편안함을 위해 계속 같은 문제와 갈등을 반복해서는 안 되겠죠. 내 안의 어떤 생각이 그 상황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 알아내 반복의 굴레를 끊어내야 해요. 그게 그림자 작업의 핵심이고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부정적이고 탁한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기를 꺼린다. 이를 알아채는 순간 집단에서 소외되고,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니까. 무엇보다 생각의 꼬리를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과정은 퍽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림자 작업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요. 그림자 작업은 곧 성숙한 자기 이해를 위한 방법인데,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휘둘리게 되죠. 그림자를 대면해야만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그림자 작업이 특히 지금의 20~30대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요즘 병원을 찾는 20~30대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자책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미디어에서는 MZ세대를 다소 뻔뻔하다 느낄 정도로 자신감 있고 당차게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스스로에 대해 치열한 고민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대부분 이 고민이 자책으로 이어져 자기 파괴적 성향을 보인다는 게 문제고요.”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부분은 자책이 스스로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쳐야만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는 점이다. 자책을 야기한 상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수반될 수만 있다면 효과적인 그림자 작업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림자를 직면하고 포용하는 쪽으로 방향만 살짝 틀어주면 자책 대신 성숙한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어요.” 나에 대한 고민을 자의식 과잉으로 치부하던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 그림자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충분히 알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림자를 어떻게 직면하느냐다. 융의 심리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과 제리 룰은 공동 저서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를 통해 여러 방법을 제시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것이 그중 하나. 스스로의 불합리성이나 모순과 싸우려 하지 말고 포용하는 것이 그림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작점이라는 거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힘이 빠졌다.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자 노력해봤을 현대인이라면 이미 숱하게 들어온 말 아닌가! 반유화 원장은 인정의 의미를 다시 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말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해요. ‘인정’을 단념, 순응, 굴복의 뉘앙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인정한다는 것은 제대로 이해한다는 의미라는 게 중요해요.”

인정하는 훈련을 위한 가장 이상적 방법을 묻는 질문에는 주저없이 전문가와의 상담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상담에 이르기까지 좁혀야 할 심리적 거리감과 비용 문제가 뒤따른다. 문득 부정적 감정에 매몰되어 아무도 마주할 자신이 없을 때 일기로 감정을 정화하던 경험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말로 털어놓는 대신, 글로 쏟아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기는 효과적 셀프 상담 방법이에요. 사람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괴로워해서 빨리 단정지으려 해요. 대부분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를 택하죠. 합리화하면서 남 탓을 하거나, 자기 탓을 하거나. 일기를 쓸 때 이 선택지를 벗어나야겠다고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막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면 주의할 점이 있다. 자신의 결점이나 상처를 섣불리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SNS라는 손쉬운 장치까지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반유화 원장은 이런 실수가 ‘반동 형성’ 작용에 의한 것이라 설명했다.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욕구와는 상반되는 과장된 행동을 한다는 거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그걸 이겨내려고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다는 상황인 셈. 스스로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생각과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되레 상처를 입는다면 그림자가 더 짙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내 안의 어두운 마음, 오랜 시간 묻어둔 욕구 같은 그림자를 발견해냈어도 제대로 인정하고 포용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멀리서 봤을 때 이 또한 무수한 그림자 중 하나라는 것이 반유화 원장의 생각이다. “내 안의 욕구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깨닫고 좌절한대도 좋아요. 중요한 건 내가 이 간극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니까요.”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림자는 극복할 대상이라기보다 평생 안고 가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를 깨닫는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상황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는 없다. 그저 정보 하나를 새롭게 얻었을 뿐이다. 같은 상황에서 아는 것이 늘었으니 그때부터는 내게 유리한 게임이 시작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가장 먼저 아홉수에 대한 의심부터 내려놨다. 오늘 밤에는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는 대신 일기를 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