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한 활약과 하늘을 찌를 듯 우렁찬 기세. 지속가능한 전성기를 위해 더 많은 ‘언니’가 필요하다.

2023년 연말 누군가 올해의 말을 묻는다면 다음 문장을 뱉을 테다. “여성이여, 당신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은 믿지 마세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한국 시각으로 지난 3월 13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양자경의 멀티버스가 실현됐다.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데 이어 수상까지 한 순간은 영화 속 장면보다 빛났다. 여우주연상에 그의 이름이 호명되고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손에 쥐는 모든 순간이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양자경이 수상 소감을 전할 때는 뭉클함이 절정에 달했다. 왼손에는 트로피, 오른손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여성에게 건넨 위로와 응원 말이다.
“이 시상식을 지켜보는 나와 닮은 어린 친구에게 내 수상이 희망과 가능성의 불빛이 되기를 바란다”로 이어진 그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진 건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었던 듯하다. SNS를 통해 관련 영상은 흩어지고 퍼지며 조회수가 쌓였다. 데뷔 40주년을 넘긴 환갑의 배우는 여성 그리고 아시안이라는 한계를 넘어 가장 높은 곳에서 울림 있는 말을 퍼뜨렸다. 1962년생 여성의 울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상 직후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자신을 향한 관심을 여성 문제로 돌려달라고 당부했다.

<골든 글로브>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영화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아콰피나 역시 가장 높은 곳에서 응원을 보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전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정관념과 함께 자란다는 것은 낯선 사람만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을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데 할애했어요.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요. 이전까지 아시아계 여자애가 저처럼 뻔뻔한 캐릭터를 보여준 적이 없어요.” 만연한 편견을 극복해 이룬 성과 앞에서 위풍당당 성과를 뽐내며 응원을 건네는 사람들을 보며 목 놓아 외치고 싶다. “언니 날 가져요!”

사회에 발을 내딛고 더 큰 세계를 향해 나아가며 우리는 일련의 주기처럼 성장과 퇴보를 반복한다. 불쑥 찾아오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극복하려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헤어 나오려 안간힘을 쓰지만 구해줄 영웅은 없다. 몇 년 전, 나 역시 커리어에 있어 막막함과 허무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번아웃일까, 우울증일까. 밤마다 증상과 원인을 내 상태와 비교하며 몇 달을 고민했다. 폭식과 폭음에 취했던 어느 날 내 영웅이 불시착했다. 살롱과 커뮤니티의 부흥으로 다양한 커뮤니티를 소개하는 칼럼을 취재하기 위해 나간 자리였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헤이조이스’를 방문해 설립 이유와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경직된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일을 하며 결국 답을 찾았다. “헤이조이스는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여러 사람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요. 그게 우리가 더 나은 인생을 쟁취하려는 의지를 품은 여성에게 절대적 호의와 응원을 보내는 방법이죠”라는 헤이조이스 이나리 대표의 말은 지금까지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인터뷰인지 고민 상담일지 모르는 대화를 끝내고 며칠 뒤 나는 그곳에 멤버십 등록을 했다. 서로 다른 분야일지라도 자기 일을 사랑하며 더 잘하기 위해 애쓰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응원은 어떤 실천법보다 효과적이었다. 대단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저 ‘잘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해왔고 이겨낸 사람들은 존재만으로 삶의 리더이자 영웅이다.

물론 이렇게 채운 동력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시간이 쌓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한다. SBS가 양자경의 수상 소식을 전하며 제멋대로 주어를 삭제한 그 사건처럼 말이다. “여성 여러분(And Ladies)”이라는 부분의 음성과 자막을 지우고 보도해 메시지는 발화자가 의도하고 닿기를 바랐던 주체가 지워진 채 불특정 다수를 향해버리는 꼴이 됐다. 여성의 한계 없는 도전을 격려한 수상 소감을 왜곡했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SBS 보도국은 “꼭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해당 단어를 삭제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제부터 뉴스 보도가 개인의 의견으로 편집되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된 걸까? 혹은 이 양자경의 말쯤은 보도 원칙에 어긋나도 될 만큼의 무게를 가진 뉴스인 걸까?

열심히 채워넣은 동력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더 잦은 빈도로 더 많이 채워넣어야 한다. 다행인 사실은 주변에 숨어 있던 멋진 ‘언니’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쌓은 성과를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윤여정, 김혜자, 문소리, 김숙, 송은이 같은 방송인부터 구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의 로이스 킴 등 실력을 쌓으며 시간을 통과한 이들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하루가 모여 내일이 되는 것처럼 이들이 쌓아온 모든 순간은 전성기와 같다. 적어도 국어사전이 설명하는 전성기의 뜻 ‘형세나 세력 따위가 왕성한 시기’라는 설명에 완벽히 부합한다. 오늘도 일 속에서 휘청할 때면 유튜브에 좋아하는 언니의 이름을 검색한다. 존재 자체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인생의 전성기로 완성하는 이름이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