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 럭셔리 리세일 월드로 초대합니다.

아우터, 드레스, 슈즈, 링 모두 생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리세일 시장의 뜨거운 감자는 단연 롤렉스 시계다. ‘삼성 주가 대신 롤렉스 시계에 투자하라’ ‘오늘 사는 게 제일 싸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 많은 건 잘 알려진 사실. 커뮤니티나 명품 위탁 업체에서 주로 행해지던 롤렉스 워치 리셀 거래가 브랜드의 공식 판매점 부커러(Bucherer)로 옮겨진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영국에 한해 먼저 시행됐고, 다른 국가들도 올봄부터 판매에 들어설 예정. 부커러에서 검증받은 중고 롤렉스 제품에는 정품 보증서도 발급해 더 믿음직스럽다. 대상은 제조한 지 3년 넘은 워치로 한정했다. 

이전까지 중고 마켓에는 기묘한 만행이 잦았다.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 중고로운 평화나라’와 같이 비꼬며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를 유머화할 정도로. 하지만 이제 롤렉스처럼 브랜드가 직접 리세일 과정에 뛰어들면서 정말로 평화롭고 럭셔리해질 전망이다. 일반적으로 중고 마켓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착용하지 않는 아이템을 처리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좀 더 저렴하게 구입하려고 방문한다. 가격 대부분이 신제품의 75% 수준에서 정해지지만, 운이 좋으면 2천 달러의 신상 핸드백을 2백50달러로 ‘득템’할 수 있는 것이 거래의 묘미. 물론 몇몇 하이엔드 럭셔리 제품군에 한해서는 성격이 조금 다르게 비춰진다. 장인의 수작업이 필요해 생산량 자체가 적은 희귀 아이템이나 특별 협업 리미티드 에디션 등은 사고파는 과정에서 매장 구입가보다 더 비싸게 거래된다. 그 때문에 리세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의 ‘사재기’도 비일비재하다. 소수의 부티크는 1일 1개 제품 구매 또는 적정선 금액 한도라는 대비책도 마련했다. 브랜드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부정적인 소비 행태는 글로벌 명품 리세일 시장 규모가 2015년 1백89억 달러에서 현재 3백90억 달러로 2배가량 성장한 시점에 큰 골칫거리다. 금액을 올릴수록 찾는 이가 많아지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에 중독된 사람들은 제품의 정통성과 디자인에 대한 예술적 가치는 뒷전이고, 치솟는 리셀 가격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런 탓에 에르메스와 샤넬, 루이 비통은 리셀 문화에 대해 현재까지도 강경하게 선을 긋고 있다. 에르메스 최고경영자 악셀 뒤마는 “중고 거래는 매장을 찾는 고객에게 피해를 줍니다”라는 입장을 표한다. 

반면 탄소 제로와 지속가능성, 순환 소비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중고 제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헤리티지와 아카이브 확보를 위한 유통 경로로 활용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도 늘고 있다. 든든하고 공인된 명품 브랜드와 함께하는 거래는 ‘혹시 가짜 아닐까?’ ‘제값을 치른 게 맞을까?’라며 애태우던 걱정을 덜어준다. 브랜드가 가장 먼저 시도한 방법은 기존 리셀 플랫폼의 도움 받기. 버버리와 스텔라 매카트니는 이미 2008년부터 더리얼리얼(The Real Real)과 파트너십을 맺고 상품 수급, 큐레이터, 판매를 이어왔다. 럭셔리 중고 마켓의 스케일 확장에는 케어링 그룹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팬데믹으로 판매 경로가 막힌 2020년 더리얼리얼에 자사 대표 브랜드 구찌의 중고 아이템을 공식 론칭했고, 2021년에는 베스티에르 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에 2억1천6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같은 시기 피아제, IWC, 까르띠에 등을 보유한 리치몬드 그룹도 영국 기반의 시계 장터 워치파인더(Watchfinder) 지분 100%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워치파인더는 공식 웹사이트와 오프라인 부티크 7개, 애프터서비스 센터, 전문교육을 이수한 직원 2백여 명을 둔 업체로 누구나 자신의 시계를 사고팔 수 있는 플랫폼이다. 거래 규모 2백억 달러 추정, 2030년까지 3백50억 달러의 성장이 예상되는 글로벌 중고 시계 마켓을 선점하려는 리치몬드 그룹의 포부가 느껴지는 행보가 아닐까 한다. 

 

리셀 마켓을 경험한 럭셔리 브랜드들은 아카이브를 수집하고, 다시 새로운 고객에게 소개하는 선순환의 희망을 찾았다. 그래서 고객 리텐션(Retention) 전략을 도입했다. 고객 리텐션이란 기업에서 기존 고객의 이탈률을 줄이는 행위를 말한다.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매장에 반환하고 다시 ‘신상’으로 재구매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선례는 알렉산더 맥퀸이 남겼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버튼은 사용하고 남은 원단이나 과거 아카이브를 해체해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지속가능한 패션을 강조한다. 이 같은 브랜드 정신으로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와 세계 최초 ‘브랜드 승인’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성공적으로 마쳤다. 협업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엄선한 고객으로부터 판매를 원하는 제품을 수집해 정품이 맞는지 감정한다. 적격 판정이 나면 재매입 가격을 책정, 지정된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지급한다. 해당 제품은 스마트폰에서 정품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NFC 태그 작업을 했다. 당시 알렉산더 맥퀸 CEO 엠마누엘 긴츠버거는 “매 순간 순환 경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름다운 제품에 새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 기뻐요. 앞으로도 브랜드 승인 프로그램 같은 지속가능한 표준을 세우는 활동에 많은 패션 하우스가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큰 영향력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여럿이 하나 되어 액션을 취해야 하니까요”라고 밝혔다. 

그 소망은 머지않아 메종 발렌티노가 잇는다. 이름하여 발렌티노 빈티지 프로젝트. 역시 변화무쌍한 브랜드의 옛 아카이브를 발굴하고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함이다. 알렉산더 맥퀸의 브랜드 승인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발렌티노 공식 웹사이트에서 의류 판매 신청을 하고 승인이 나면 오프라인 빈티지 스토어에 가서 제품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고객이 의류 위탁 대가로 책정한 평가액에 동의하면 그에 상응하는 크레딧을 받는다. 선정된 오프라인 빈티지 스토어는 밀라노 마담 폴린, 뉴욕 빈티지 Inc, 로스앤젤레스 레저렉션, 도쿄 라이라 토키오로 전 세계 4군데. 발렌티노는 두 번의 빈티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올해 세 번째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알렉산더 맥퀸과 발렌티노가 팝업성 이벤트로 중고 리텐션 전략을 주도했다면, 웹사이트에 카테고리를 신설한 브랜드도 있다. 발렌시아가는 리세일 서비스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리플런트(Reflaunt)의 힘을 빌렸다. 일찍이 리플런트는 발렌시아가뿐 아니라 스와로브스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지미 추 전임 CEO 등으로부터 투자금 2백70만 달러를 확보한 바 있다. 투자자를 매료시킨 건 이 스타트업이 리세일 시장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성을 제거하려고 정보를 디지털화한다는 부분이다. 동시에 리세일 제품 리스트를 미국,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등 최고 25개 글로벌 마켓 플레이스에 릴리스해준다. 발렌시아가의 재판매 프로그램은 파일럿 단계로 현재 미국, 영국, 이탈리아, 싱가포르, 프랑스에 한해 제공한다. 해당 국가에 살고 있는 고객이 서비스를 체험하려면 먼저 온라인 등록 사이트(balenciaga.reflaunt.com)에서 상품을 업로드하고 제품 전달을 위해 무료 픽업이나 매장 방문 시간을 예약하면 된다. 이후 전문가 감정, 사진 촬영, 가격 설정이 이뤄지고 리플런트는 협업 중고 채널에 정보를 업로드한다. 판매가 완료되면 현금으로 계좌 이체 또는 추가 20% 더 많은 금액으로 책정되는 발렌시아가 바우처로 돌려받을 수 있다. 

발렌시아가 홈페이지에서 제품을 팔 수 있다면 구찌 볼트(vault.gucci.com)에서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재해석한 빈티지 아카이브를 살 수 있다. 구찌 볼트는 공식 온라인 사이트와 별개로 운영하는 실험적 콘셉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브랜드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독점적인 캡슐 컬렉션, 한정판 디자인, 메타버스, 아트 스페이스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구찌 빈티지 탭으로 들어가면 전 세계 리세일 공급업체와 경매에서 취득한 1960년대 재키 백, 1990년대 다이애나 백 등 빈티지 중고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모두 하우스의 아이코닉한 요소로 장식한 커스텀 작업을 거쳤고, 해당 품목에 알맞게 맞춤 제작한 특별 패키지로 배송된다. 빈티지 커스텀 아이템이기에 구입하려면 볼트 클라이언트에게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몇 시즌 전 장 폴 고티에 온라인 스토어에도 이 같은 빈티지 카테고리가 등장했다. 당시 개인 고객 및 타사 리셀러로부터 조달받은 장 폴 고티에 빈티지 제품을 브랜드 공식 사이트에서 판매하고 렌털까지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패션 하우스를 등에 업고 리세일하기! 이제 첫 삽을 뜬 격이다. 아직 국내까지 뻗치지 않은 서비스가 대다수라고 해도 실망할 필요 없다. 시행착오를 거쳐 탄탄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찾아올 때까지 눈과 귀를 크게 열고 팔로우하면 된다. 음지에서 양지로 싹을 틔운 럭셔리 중고나라는 상식적이고 꽉 찬 아카이브로 무럭무럭 자랄 테니까.